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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51화 (1,252/1,567)

1251화. 그리고 살기 위해서다!(1)

"군사!"

적막한 대전 안으로 한 사람이 격하게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책상에 산처럼 쌓인 장부를 검토하고 있던 이는 뛰어 들어온 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군사."

"기다려라."

부복한 이는 침묵하며 기다렸다.

초가 한 치는 더 타들어 갈 시간 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사내가 세필로 장부의 한쪽에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고는 장부를 덮었다.

"이 서류들은 승인하여 보내 주고."

"예."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이가 공손히 대답했다.

"이 장부를 작성한 놈들은 따로 불러 옥에 가둬라."

"예, 군사."

"특히."

호가명이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책상에 툭 내던졌다.

"이 장부와 관련된 책임자는 단전을 폐하고 전신의 힘줄을 자른 후, 지하뇌옥에 가둴. 그리고 병력을 풀어 가산을 몰수해라. 저항하는 이가 있으면 같은 꼴로 만들어주고."

"그 꼴로 뇌옥에 들어가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래? 실수를 저지를 뻔했군. 그럼 못 버티고 죽기 전에 뇌옥에서 꺼내 목을 베어 줘라. 제명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명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사패련의 군사 호가명은 눈을 감은 채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사람이란 도통 알 수 없는 존재란 말이야. 제 목숨과 몇 푼 안 되는 재물 중 대체 어느 쪽이 중하다고 여기는 거지?"

방의 제물을 횡령하다 걸리다면 천참만륙이 나 죽는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 그렇게 죽어 나간  이들의 수가 그리 적지 않음에도 조금만 틈이 나면 다시 슬그머니 일을 저지른다.

그 역시 사파지만, 이런 놈들에게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가 선택한 일인 것을.

호가명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보고해라."

"예, 군사! 출항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늦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호가명의 시선이 활짝 열린 물으로 향했다. 구름 걷힌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풍이 걷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는 아직 높은 편이지만, 이 정도면 항해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해남이라……"

호가명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길게 끌어 좋을 게 없겠지. 병력을 승선시켜라."

"예!"

보고한 이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두 눈으로 힐끔 본 호가명은 이내 미련을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해남부터 처리하고 돌아와서 마무리해도 괜찮겠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다만……

"문방(文房)."

"예, 군사."

"구파일방이나 천우맹의 움직임에 대해 들어온 보고가 있나?"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기가 사흘 전입니다만, 그때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리한 장강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사흘 내에 이곳까지 도달할 수 없다.

"구파일방이야 그렇다 치고, 천우맹도……"

호가명의 입가에 얼핏 옅은 비웃음이 어렸다.

"저들이라고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겠습니까?"

"아닐 것이다."

"……예?"

호가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상황을 알았따면, 뭐라도 했겠지. 놈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해남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다. 적어도 우리가 이 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장강에서 싸움을 벌이는 짓이라도 했을 거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움직였다는 정보가 저들에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겠지."

호가명은 즉시 천우맹에 대한 평가를 미묘하게 수정했다. 저들의 정보력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미력한 것이 분명했다. 강남에 한해서는 말이다.

'구파일방은? 아니, 놈들은 설사 알았다고 해도 천우맹에 정보를 전하지 않앗을 것이다. 아니…… 아니지. 알았다면 정보를 흘려 천우맹과 사패련이 서로 전력을 깎아 먹도록 했겠지. 그 중늙은이는 그런 놈이니까.'

그가 얻어 낸 정보를 바탕으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 귓가에 문방의 의아한 목소리가 스쳤다.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군사. 굳이 해남과 관련이 있는 쪽을 따지자면 구파일방 쪽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천우맹이 움직인단 말입니까?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호가명은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여 이해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것은 호가명이다. 이들은 그저 그의 말을 잘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실리를 따져 움직이는 이들이라면 이 고생을 안 하겠지.'

저들이 껄끄러운 건, 그 행동에서 원리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에야 뭐든 이유가 있겠지만, 이쪽에서 생각하기엔 도통 그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일소만은 어느 정도 저들의 움직임마저 계산에 넣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생각을 잠시 미뤄 둔 호가명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찌 되었건 이 해남에서의 일은 저들에게 보내는 커다란 경고가 될 것이다. 감히 사패련에 대항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보여 주는 명백한 경고.

그러니 더없이 확실하고 더없이 잔인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제 와 뭘 하든 상관없다. 구파일방이든 천우맹이든 불타 버린 해남의 소식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직접 나선 것이니까.

"한 시진 내로 모든 준비를 마쳐라. 해남으로 간다."

"예! 군사!"

⁂   ⁂   ⁂

"사형. 우리 파문식 때문에 모인 것 아닙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저들은 왜 저기 저러고 있습니까?"

"글쎄?"

아직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해남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우맹의 맹도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이 보기엔 기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파문식이라는 게 굳이 남들에게 숨겨야 할 일은 아니겠지만, 내보이기에도 묘하게 껄끄럽지 않은가?

제자가 죄를 지어 파문을 당하든, 아니면 스스로 문파를 걸어 나가든, 문파의 입장에서는 낯부끄러울 일이니까.

"밥 먹고 떠나는 것 아니었어?"

"기어코 파문식까지 보고 떠나겠다고?"

"……말이 안 되는데?"

그런데도 눈치 없이 이곳에 끼어든 이들을 무턱대로 비난하지 못하는 건, 천우맹의 맹도들과 함께 서 있는이가 다름 아닌 해남의 장문인 금양백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천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보여 준다. 금양백이 저기 함께 서 있는 것 자체가 저들의 행위를 문파 차원에서 용인했다는 더없이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대사형. 대사형은 뭔가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상황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결국은 곽환소를 찾았다. 그들이 알기로 저들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이 곽환소이기 때문이다.

"장문인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다."

"예?"

"우선은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의구심일 일었지만 더는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말을 이어 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탓이었다.

'이해를 못 하겠네.'

이자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번번히 느끼는 것이지만 해남을 방문한 저들은 너무 자주 도를 넘어선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문파를 떠날 이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자리?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이런 상황까지 왔음에도 해남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마지막 각오를 다지는 자리다.

그렇기에 더더욱 순수해야 할 자리다. 그런데 저런 불순물들이 끼어들었으니 속이 편치 않을 수밖에.

'천우맹의 젊은 무인들은 하나같이 천하의 기재들이라더니.'

세상에 소문만큼 믿기 힘든 게 없단 말이 딱 맞는 모양이다. 무학만 강하다 해서 기재라 불릴 자격이 있겠는가. 저런 눈치도 없는 이들을 두고.

이자양이 불편한 속을 어떻게든 달래려 안간힘을 쓰는 중, 금양백이 연단 위로 올라섰다.

해남의 제자들이 곧장 자세를 바로 하며 그런 장문인을 맞이했다.

연단에 올라선 금양백이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원래 해남을 떠날 이들을 위한 파문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원래?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걸 직감한 이들이 금양백의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파문식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 대신!"

금양백이 단호한 어조로 외치며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패련의 적도들을 상대하기 위한 계획을 모두와 나누고자 한다!"

이자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갑자기 뭔 말씀이시지?'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는 이미 결정이 난……

"나 금양백은! 해남의 장문인으로서 해남의 제자들을 이끌고, 저들이 지배하고 있는 강남 땅으로 향할 것이다."

날벼락처럼 떨어진 그 말에 해남의 제자들은 모두 기겁했다.

"예?"

"자, 장문인!"

"강남이라니요?"

물론 그들도 장문인이 다른 방법을 추진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으나 사나 배에 몸을 싣고 저 먼 망망대해로 향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강남이라니? 어느 미친놈이 호랑이를 피해서 호굴로 몸을 던진단 말인가?

하지만 금양백은 그들의 이해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천우맹의 사자들 역시 우리 해남과 함께 강남으로 향햘 것이다."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연단 아래에 서 있는 이들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많은 시선 속에서도 그들은 그저 담담히 서 있었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자, 장문인. 왜 이리 급작스레……"

"강요하지 않는다!"

금양백이 소리쳤다.

"파문식을 따로 거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의 앞에서 파문을 당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남과 마지막을 함께할 각오가 없는 이들은 이 ㅅ섬에 남아라. 그렇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금양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해남이라는 이름 아래 싸울 이들은! 그 목숨을 걸고 활로를 열고자 하는 이들은 나를 따라나서거라. 우리는 저 강남을 뚷고, 적의 심장을 꿰뚫고 장강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해남이 아닌 장강에서 저 간악한 사패련과의 싸움을 이어 나갈 것이다!"

"……"

"나를 믿는 자!"

금양백이 모두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해남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는 자는 나서라! 나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해남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천하에 알릴 것이다!"

무거운 정적 속, 해남의 제자들은 금양백을 그저 바라보았다. 논리 하나 없이 그저 격한 의지만이 가득한 저 말에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침묵하던 곽환소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더니 금양백과 마주 섰다.

"제자 곽환소, 감히 장문인께 하나 묻겠습니다."

"허한다!"

곽환소가 예를 표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문인께서 이곳이 아닌 강남에서 싸우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에 금양백이 심호흡했다. 그리고 말했다.

"혹자는 말한다. 어부는 바다의 이치를 알고 순응하는 이들이라고."

"……"

"어떠냐. 그 말이 사실이더냐?"

몇몇 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결코 그렇지 않다. 바다에 순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다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 변덕을 부려 뒤바뀔지 모르는 바라도 배를 몰지 않으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할 일 따위는 없다! 해남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 역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금양백이 단호한 눈으로 소리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다로 나선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단 걸 알면서도! 또 배를 몰아 나가고 그물을 던진다. 그게 싸우는 자의 길이기 때문이고, 그게 항거하는 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바다와 싸우는 이의 아들딸이다. 그러니 금양백의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이는 없다.

"우리에게 강남은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와도 같다. 그래서? 배를 부두에 대어 놓고 뻔히 바다ㅣ를 바라보다 굶어 죽을 테냐?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나서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 죽음을 받아들일 테냐?"

아니. 누구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해남의 사람이라면 결코.

"강남으로 가는 이유?"

금양백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 포효하듯 외쳤다.

"싸우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다! 더없이 무모해 보인다고 해도, 바다를 살아가는 이들은 알 것이다. 그저 머무르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은 없다는 것을!"

금양백의 시선이 한편에 있는 천우맹 일행에게로 향했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이들이 알려 주었다. 바다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보다 먼저 이해해야 했던 일들을, 육지에서 온 객들이 일깨워 주었다. 정녕 지키고자 한다면, 살고자 한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지막으로 금양백의 시선이 곽환소에게 꽃혔다.

"그래서 가려 한다. 저 사패련이 아무리 두렵다 해도,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만큼 두렵지는 않을 테니까."

곽환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제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제 아비 역시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

"차기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고, 결국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장문인께서 강남이라는 바라로 향하시겠다면."

곽환소가 움켜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자 곽환소, 한 사람의 해남인으로서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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