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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50화 (1,251/1,567)

1250화. 그건 그거고. (5)

금양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

지금 그가 당황한 이유는, 들은 말을 해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했기 때문이다.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린 그는 앞에 앉은 이를 다시 유심히 보았다.

화산의 장문대리는 이제 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뒤쪽으로 물러나 정좌하고 있고,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엔 웬 놈팡이가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떡하니 앉아 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구도가 맞을지도 모른다.

백천이 화산의 장문대리이자 천우맹의 대표로서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휩쓸려 잠시 잊어버리긴 했으나, 사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천우맹의 실질적 상징은 바로 이 사람이다.

‘화산검협.’

아무리 화산이란 문파가 대단하고, 화산의 장문대리가 이제 천하의 누구도 함부로 굴 수 없을 만큼의 입지를 가진 자리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 모든 것은 이 ‘화산검협’이라는 네 글자 앞에서는 초라해질 뿐이다.

“그⋯⋯.”

잠시 헛기침하며 당혹한 마음을 진정시킨 금양백이 넌지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남아서 사패련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십시다, 장문인.”

“⋯⋯.”

“이제 어쩔 생각이신데요.”

“예?”

금양백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어쩔 생각이냐니. 그건 오히려 이쪽에서 물어야 할 말이 아닌가?

그때 화산검협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 사패련이랑 싸운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싸우실 거냐고요.”

“⋯⋯그야⋯⋯.”

어떻게? 이게 ‘어떻게’를 논할 일이던가? 그저 본산을 지키며 최선을 다해 싸우⋯⋯.

“그냥 본산을 지키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다 뒈지면 그만이다. 설마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한 문파의 장문인이시라는 분이?”

“쿨럭.”

금양백의 입에서 순간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에이, 아니겠죠? 하긴 사람 목숨이 한둘 걸린 것도 아닌데, 벌써 다 뒈진 것처럼 굴고 계시지는 않겠죠. 그래도 일문의 장문이신데.”

“⋯⋯.”

“그죠?”

금양백이 대답을 제대로 못 하자 청명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

“근데 이 양반들은 다들 뭔 영웅소설만 읽고 살았나? 사람이 뒈지는 게 그렇게 쉬운 일로 보이시나?”

“청명아. 장문인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지.”

“장문인은 목숨이 두 개라 막 뒈져도 된대?”

“⋯⋯그래도 말은 조심해야지.”

짜증이란 짜증은 얼굴에 다 담은 청명을 보며 금양백은 아연실색했다.

“그러니까⋯⋯.”

“뭐요?”

“⋯⋯화산검협을 비롯한 천우맹 분들은⋯⋯.”

“그냥 편히 말씀하세요. 이제 공적인 자리 아니니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하는 게 서로 말이 잘 나오니 좋죠.”

“⋯⋯그럼 그러겠네. 자네들은 저 사패련을 맞아 싸워 정말 이길 생각인 건가?”

“뭐 뻔한 말을.”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래야죠.”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진 금양백은 대답한 이들의 면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

“의기는 이해하네만, 현실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현실?”

청명이 팽 코웃음을 쳤다.

“저기요, 아저씨.”

“⋯⋯청명아, 장문인이시다.”

“장문인은 아저씨 아냐?”

“그래도 장문인이라고 불러야지.”

“쯧.”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지못해 제 말을 정정했다.

“예, 장문인. 현실이 어쩌고 하시는데, 제 말이 이해하기 힘드세요?”

“음?”

“장문인 말대로면 현실적으로 여기 남은 사람들에게 남은 운명은 사패련 칼에 맞고 뒈지는 것밖에 없다는 거잖아요.”

“⋯⋯.”

“그러니까 어차피 뒈질 거 제대로 한번 엿이나 먹여 보자는 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냐고요.”

금양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이 대체 어떻게 전달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라 해서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아니었네. 당연히 한 사람이라도 더 길동무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지. 그건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청명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자고요.”

“조금 더?”

점점 청명의 말에 빨려들기라도 하는 듯 금양백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청명이 까딱 손짓하며 외쳤다.

“야, 설명!”

“크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임소병이 앞으로 다가와 착석했다.

“물론 지형상, 해남산이 적의 공격을 방어해 내기 적합한 곳인 건 확실합니다. 산지를 선점하고 산을 오르는 이를 요격하는 건 예로부터 병법의 정석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지.”

“하지만 문제는, 이게 버틴다고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산지를 지키는 순간 포위될 테고, 결국에는 얼마나 오래 버티다 죽느냐만 남을 뿐입니다. 공격하는 이들 역시 급할 게 없어지는 겁니다.”

금양백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오. 하지만 한 가지를 놓친 것 같은데, 이곳은 섬이외다. 아무리 해남도가 넓다고는 하지만 결국 섬이 가진 지형의 한계가 있는 법. 해남산을 버린다고 해도 지형이 넓은 걸 활용할 수는 없소.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결국 술래잡기가 될 뿐이지.”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될 시에는 해남도에 사는 양민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소. 더구나 그렇게 되면 민가로 내려보낸 해남의 제자들도 필연적으로 적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단 말이오.”

그 순간 금양백을 바라보는 임소병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냥 정론만 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황을 보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해남파는 이 산을 벗어날 수가 없소. 사패련의 공격 이후에도 해남도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저들에게 확실한 목표와 점령해야 할 지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단 말이오.”

“장문인의 말씀은, 사패련이 공격할 대상을 모조리 이 산에 밀어 넣어야 다른 곳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시지요?”

“바로 그렇소.”

금양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은 정말 감사하오. 하지만 우리라고 멍청해서 이런 방법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외다. 지난 몇 해간 우리는 사패련이 쳐들어올 때 어찌 싸워야 하는가를 내내 고민해 왔소. 그 결론이 이것이외다.”

“흐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이곳이 섬이고, 어떻게든 다른 이들의 피해를 줄이는 게 목적이라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겠지요.”

“이해를 하시니 다행⋯⋯.”

“하지만.”

금양백의 말허리를 뚝 끊은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그건 섬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예?”

금양백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임소병이 웃으며 부연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키지 않아도 해남도가 입을 피해를 완벽하게 없애고, 사가로 내려보낸 제자들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저들이 오직 해남파 하나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방법이 말입니다.”

“아니, 그런 방법이 대체 어디⋯⋯.”

말을 하던 금양백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도 떠오르고 만 것이다. 지금 임소병이 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저 조건만은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서, 설마⋯⋯?”

“예.”

임소병이 씨익 웃었다.

“제 안방에 불이 났는데 다른 집을 신경 쓰는 이는 없는 법이지요.”

“⋯⋯.”

“우리가 해남파를 이끌고 강남 땅을 밟아 버리는 순간, 저들은 해남도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제,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오?”

“물론 제정신입니다.”

금양백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임소병뿐만 아니라 그 일행들 모두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그러니까, 여기서 지키고 버틸 게 아니라 오히려 저들의 본거지인 강남으로 쳐들어가자?”

“예.”

“그걸 지금 전략이라고 내어 놓고 있는 거요? 그랬을 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 순간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뭔 일이 벌어지는데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요?”

“아, 그러니까 뭔 일이 벌어지냐고요.”

“이런 답답한! 그렇게 되면 당연히⋯⋯.”

말을 하려던 금양백의 입이 절로 닫혔다.

당연히 모두 죽는다.

강남 땅을 밟은 해남의 제자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순간 혼란스러워진 금양백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건 청명의 혀 차는 소리였다.

“쯧쯧. 이래서 어설프게 용기 있는 척하는 양반들이란.”

“⋯⋯”

“안방에서 버티며 죽을 용기는 있어도, 가서 싸우다 죽을 용기는 없어요?”

금양백은 어떠한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청명을 볼 뿐이었다.

“이왕 뒈질 거면, 화끈하게 뒈지자고요.”

“⋯⋯.”

“장문인이 정말 해남의 의기를 보여 주고 싶다면,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 거죠. 죽더라도 가서 죽어야죠. 어느 쪽이 더 옳은 일일지는 굳이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금양백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말도 안 되는 전략이라는 생각과 청명의 말이 옳단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켰다.

“그럼⋯⋯.”

금양백이 굳은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여러분께서는 해남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어 옥쇄(玉碎)할 생각이신 겁니까?”

옥쇄라는 말이 과연 여기 어울리는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다른 표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청명은 딱 잘라 답했다.

“아뇨.”

“⋯⋯예?”

“그건 해남의 입장이고.”

금양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럼 이들의 입장은 뭐란 말인가?

“잘 들으세요, 아저씨.”

“장문인.”

“끄응. 예. 잘 들으세요, 장문인. 죽으러 가는 길 따위는 없어요.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은 방법이 있을 뿐이지.”

“⋯⋯.”

“우리의 계획은 강남에서 죽는 게 아니에요.”

청명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우리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거지.”

“⋯⋯되, 되돌아?”

“예.”

청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해남을 이끌고 강남을 역으로 거슬러 오를 겁니다. 하나라도 더 살려서 장강까지 도달할 거예요.

”금양백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성공한다면 해남의 이름은 천하에 퍼져 나가겠죠. 만약 실패한다 해도 여기서 뒈지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거고요. 중요한 건, 두 가지 방법 중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쪽은 명백히 강남행이라는 거예요.”

“이, 이보시게. 그건⋯⋯.”

“정말 해남의 장문인이시라면 해남의 끝을 겸허히 받아들이실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해남이라는 이름을 이을 방법을 찾아 시도해야죠. 그게 장문인이 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지금껏 짜증만 어려 있던 청명의 얼굴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본 순간 한기가 금양백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청명이 말했다.

“길은 내가 엽니다.”

금양백은 그 자리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백천은 태연하게 청명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네가 아니라 우리가 여는 거지.”

청명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길은 우리가 열 겁니다. 그러니 해남은 단 하나만 결정하면 됩니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맞서 싸울 건지. 아니면 다 포기하고 여기서 순순히 죽을 건지.”

“⋯⋯.”

“뭐라도 남기고 싶다고 하셨죠?”

“⋯⋯.”

“똑똑히 들어 두세요, 장문인. 이기지 못한다고 싸우는 걸 포기하는 이들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건, 오직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이들 뿐이에요.”

그 말이 둔중한 둔기처럼 금양백을 후려쳤다.

“길은 드렸어요. 남은 건 선택뿐이죠.”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금양백을 빤히 응시했다.

“해남의 선택은 뭐죠?”

금양백은 말없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논리로 상대를 무너뜨리려 했을 청명도 이 순간만은 그저 금양백의 판단을 기다렸다. 이건 누가 등 떠밀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금양백이 마침내 그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이제부터⋯⋯.”

모두가 금양백을 주시했다.

“해남이 무엇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 이상 마음에 들 수 없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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