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7화. 그건 그거고. (2)
아직은 조금 서늘한 공기가 팔뚝을 스쳤다.
금양백은 맑게 갠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무심하기도 하구나.’
삶의 대부분이 결국 제 노력으로 결정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살아왔던 금양백도, 사는 동안 몇 번쯤은 하늘을 찾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늘은 그의 바람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리 대단한 바람도 아니었을 텐데⋯⋯.’
태풍을 영원히 멎지 않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단 하루라도 더 불게 해 달라는 게 그리 과한 바람이었을까?
천망회회소이불루(天網恢恢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은 넓고 엉성해도 그 그물을 빠져나가는 것은 없다지만, 지금 금양백은 그 엉성하고 넓은 그물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금양백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 무엇이 차오르든, 그는 해남의 장문인이다. 마지막까지 해남의 장문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지금껏 그가 해 온 것들에 대한 책임이자, 그 목숨으로 해남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이들에 대한 예의다.
“천우맹의 손님들은?”
“환소가 어제 이미 배를 준비했고, 배가 있는 곳까지 알려 드렸다고 합니다.”
“환소가?”
“예.”
곽환소의 모습을 떠올려 본 금양백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뱃사람이 풍랑을 맞으며 성장하듯, 무인은 위기를 맞으며 성장하는 모양이다. 검에 재능은 있되, 워낙 성격이 급해 문제였던 곽환소가 그런 배려를 할 수 있는 이가 된 걸 보니 말이다.
‘그래서 더 안타깝구나.’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가 해남의 명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곽환소는 그와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장문이 될 수 있을진대⋯⋯.
그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가셨느냐?”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만,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아 말없이 가신 모양입니다.”
“음.”
“서로 얼굴을 보고 떠나기에는 민망하지 않습니까.”
“⋯⋯민망할 게 뭐가 있느냐.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금양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겸.”
“예, 장문인.”
“사패련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해남을 본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
“⋯⋯.”
“어떠냐. 해남의 장문인으로서 나는 괜찮았더냐?”
금양백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지만, 임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께서는 훌륭하셨습니다. 천우맹의 사자들도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갔을 것입니다.”
“그래⋯⋯.”
금양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해남의 마지막을 본 이들이 그들이라 다행이구나.”
“구파일방은 제 치부를 숨기기 급급할 것이지만, 그들은 오히려 구파일방의 치부를 알리려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런 게 아니다.”
금양백이 초연한 얼굴로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마 앞으로도 협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우릴 돕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온 이들이니까.”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 해남에 대한 좋은 평이 나온다면, 세상 사람들 역시 해남을 좋게 기억해 주지 않겠느냐?”
임겸이 대꾸조차 못 하고 침묵하자 금양백이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준비하거라. 속히 파문식을 거행해야지.”
“굳이 장문인께서 직접 가실 필요는⋯⋯.”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이다. 큰마음을 먹고 사가로 떠나는 이들에게 굳이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 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하산해야 사패련의 마수를 피할 확률도 조금쯤은 높아지겠지.”
“알겠습니다, 장문인.”
금양백은 몸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입는 정복이로군.’
그리고 이 정복은 이제 그가 죽는 순간까지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 * *
해남 제자들의 얼굴에 진득한 긴장이 내려앉았다.
태풍이 멎은 걸 확인한 순간, 지금부터 언제라도 저 사패련이 해남도에 들이닥칠 수 있다는 실감이 든 것이다.
“⋯⋯이제 정말 전쟁이 나는 겁니까?”
“그렇지. 그때 들었잖아. 저 사패련이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고.”
“그, 그럼 그게 완성되면 온다는 거잖습니까. 얼마나 걸리죠?”
“⋯⋯배가 뭔지도 모르는 양반들이 보고 배라는 걸 딱 알 정도였으면 길어야 하루. 아니, 어쩌면 이미 완성되었을지도 모르지.”
“배에 소금물을 먹이려면 닷새는 더 있어야죠! 그게 상식 아닙니까, 사형!”
“⋯⋯그건 그 배를 계속 쓸 때의 이야기고, 그냥 해남을 오가는 정도로만 쓸 거면 물이 새든 말든 상관이 없지. 며칠만 버티면 되는 거니까.”
그 말을 들은 이들이 폐부를 비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삼켰다.
“어차피 해남이 정리되면 배를 탈 일이 없잖아. 사패련 놈들도 얼간이는 아니니, 그 정도는 생각하겠지.”
“그럼⋯⋯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사패련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소립니까?”
“⋯⋯그쪽이 서두른다면 그렇겠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 갈수록 긴장감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그⋯⋯.”
“응?”
“⋯⋯혹시 그⋯⋯.”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제자 하나가 제 옆에 있는 이에게 작게 물었다.
“파문⋯식에 참가할 인원은 확정이 끝났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이가 죽일 듯한 눈으로 말한 이를 노려보았다.
“왜? 지금이라도 장문인께 파문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게?”
“아, 아니요, 사형.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뼛속까지 해남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몰라도 다른 사형제 중에는 그걸 원하는 이들이 좀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그 역시 똑같은 유혹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파문만 당하면 일단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럼 그 뒤에는 뭐라도 해 볼 수 있다.
모두가 죽어 없어지면 해남이라는 문파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럴 바에는 거짓으로나마 파문을 당해 해남의 부활을 도모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소여립(昭與立)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히 살고 싶은 모양이구나.’
이런 개도 안 물어 갈 생각으로 파문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한숨을 쉬던 소여립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전각 밖으로 나가는 곽환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사형! 어디 가십니까?”
문밖으로 반쯤 발을 냈던 곽환소가 소여립을 돌아보았다.
“파문식을 준비하러 가십니까?”
“아니, 아직 아니다.”
“그럼⋯⋯.”
곽환소의 옆에 있던 이자양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 천우맹 놈들이 머물렀던 전각을 청소하러 가신다는구나!”
“⋯⋯예? 아니, 왜⋯⋯? 거긴 다시 쓸 일이 없잖습니까?”
소여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 전각이라면 객청을 말하는 것인데, 이제 와 그곳을 뭐 하러 청소한단 말인가? 이제 해남에 객이 들 일은 다시 없을 터인데.
하지만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곽환소는 그저 짧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나만 잠깐 다녀오면⋯⋯.”
“오히려 마지막이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신다, 마지막이라! 사람은 뭐든 마지막이 깔끔해야 하는데, 해남의 어느 곳이건 그런 모습으로 끝을 낼 수는 없다고 하시는구나!”
전각 안에 있던 모두가 곽환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중 몇몇, 파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들은 차마 곽환소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자양이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대단한 대제자 나셨지. 그놈의 전각 좀 더러우면 어떻다고.”
“⋯⋯그러니까 나 혼자 간다고 하지 않느냐.”
“됐습니다! 저를 대사형 청소시켜 놓고 뒤에서 놀고먹는 패륜아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갈 거면 가고, 안 갈 거면 그냥 말지. 어차피 갈 거면서 뭔 불만이 그렇게 많으냐?”
“답답해서 그럽니다, 답답해서! 원래 이렇게 꽉 막힌 분이 아니셨는데.”
“사람은 끝에 가면 본성이 나온다더니, 내 본성이 원래 이랬던 모양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됐으니 가자. 정 싫거든 너는 여기 있어라.”
곽환소가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자 이자양이 짜증을 확 내고는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자 전각 안에 있던 제자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사형!”
“저희가 하겠습니다.”
“사형은 여기 계십시오! 이런 건 당연히 저희가 해야지요! 아니, 말씀만 하시면 되는데⋯⋯.”
곽환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속이 답답해서 뭐라도 하려는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둬라.”
“속이 답답한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
곽환소는 줄을 지어 선 제자들을 물끄러미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꾸나. 다들 같이 가면 파문식 전에 끝낼 수 있겠지.”
“예.”
곽환소는 더 이상 가타부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이런 와중에 청소라니.
마지막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면 곽환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을 하니, 도무지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곳은 그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입문하여 그의 삶을 함께한 곳이다.
곧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전각이지만, 적어도 그 마지막을 정갈하게 만들어 두고 싶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그 정도가 전부니까.그래서 고마웠다. 이런 그의 꽉 막힌 생각에 동조해 주는 이들에게.
‘결국 문파가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제자뿐이구나.’
세상 누구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해남도의 주민들조차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후로는 해남파와 슬슬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하찮기 짝이 없는 전각 청소로 제 마지막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렇기에 문파고, 그렇기에 사형제이리라.
‘죽을 때는 이들과 함께다.’
객청 앞에 도착한 곽환소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사람이 떠난 객청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개미 발소리조차 들려올 듯 적막한 객청은 쓸쓸하다 못해 음산하게까지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으며 곽환소는 잠시 침묵했다.
“⋯⋯사형?”
“아무것도 아니다.”
함께 온 제자가 한차례 부른 후에야 곽환소가 애써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빨리 끝내자꾸나. 그 술병이며, 토해 댄 자국까지 치우려면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그거 자양 사형이 토한 겁니다.”
“누, 누가 그래?”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이, 이놈이 모함을⋯⋯.”
이자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곽환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네가 토한 건 네가 치워라.”
“아! 아니라니까요, 사형!”
“자! 다들 서두르자!”
“예!”
몇몇 제자들이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막 문고리를 움켜잡으려 할 때, 갑작스레 문이 벌컥 열렸다.
쿵!
“꿰엑!”
문에 얼굴을 찧은 제자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나자빠졌다.
“뭐야?”
“어?”
놀란 해남의 제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린 문을 보았다.
지금 막 일어났는지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눈이 퉁퉁 부은 청명이 한 손으로 배를 벅벅 긁으며 나오고 있었다.
“뭔 일인데 아침부터 다들 이렇게 몰려왔어?”
순간 말문이 막힌 곽환소가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인간이 왜 아직 여기에 있지?
“그⋯⋯.”
“어이, 너.”
자신을 부르는 청명의 목소리에 곽환소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예?”
“여기 식당은 어디냐? 왜 밥 안 줘?”
곽환소의 어처구니가 하늘 저 위로 승천해 버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