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6화. 그건 그거고. (1)
천우맹 일행이 빠져나간 대전, 남은 장로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은 원래 절망 속에 있을 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졌을 때 무너진다. 그리고 조금 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하아⋯⋯.”
침묵을 깨며 금양백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태풍이 그치는 대로 제자들에게 하산을 명하거라.”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미련이 남았던 게지. 현실이 눈앞에 닥치면 입장을 달리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다.”
금양백이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해남과 함께했다고 해서 꼭 그 마지막을 함께할 이유는 없다. 떠날 이들은 떠나거라.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몇몇 장로들이 툴툴거렸다.
“죽을 날 받아 놓은 것들이 가면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무공이 없으면 그물질도 못하는 것들이라 집에 돌아가 봐야 천덕꾸러기일 뿐입니다.”
“맞습니다, 장문인. 손주 놈들도 집안에 해남파 놈이 들어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 사패련의 불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걱정할 텐데, 무슨 염치로 사가로 돌아가겠습니까?”
금양백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미리 잘하지 그랬는가.”
“⋯⋯잘할 시간이나 주시고 그런 말씀을 하셔야지요.”
분위기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내세웠지만, 막상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단 생각이 들자 그 마음마저 모두 누그러진 것이다.
“파문을 청하는 이들의 무학은 어찌합니까?”
“⋯⋯폐해야겠지.”
“굳이⋯⋯.”
금양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아이들이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라, 걱정되기 때문이다. 사패련이, 저 장일소가 해남부터 치려는 이유는 등 뒤에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무학을 익힌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
“파문당해 무학을 잃은 이들이라면 장일소도 굳이 잡아 죽이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패악무도한 자지, 멍청한 자는 아니니까 일을 할 수 있는 장정의 가치를 알고 있겠지.”
장로들의 눈빛이 처연해졌다. 이치에는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되면 천하에는 정말 해남의 무학을 익힌 이들이 남지 않게 된다.
머릿속에 남은 지식이야 어찌해도 지우지 못하겠지만, 시연 한 번을 못 하고 제자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들이 죽은 뒤 해남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훤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미련을 남기지 말자꾸나.”
그런 장로들의 심정을 이해한 모양으로 금양백이 뇌까리듯 말했다.
“하늘이 보고 계신다면 어떻게든 명맥이야 이어 주시겠지. 혹시 아느냐? 화산이 그러했듯, 해남도 언젠가는 지금보다 더 큰 광영을 맞을 날이 올지 말이다.”
“그렇습니다, 장문인.”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장로들의 말을 들으며 금양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쿠르르르릉.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금양백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비바람이 여전히 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우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씁쓸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처연히 고개를 돌렸다.
* * *
“⋯⋯그래서 그냥 끝난 겁니까?”
흠뻑 젖은 제자들이 제 몸에 흐르는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곽환소를 보았다.
“아니, 대사형. 저 강북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아무런 대책도 없었답니까? 그럴 거면 대체 뭐 하러⋯⋯.”
“그걸 왜 대사형께 따지느냐?”
이자양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따지고 싶거든 천우맹 놈들에게 직접 가 따질 것이지. 그럴 용기는 없는 것들이 대사형은 뭐 하러 물고 늘어지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뻔히⋯⋯!”
“그만해라.”
곽환소가 이자양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만류했다.
“답답하니 하는 소리겠지.”
곽환소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천우맹에서도 사패련이 이리 빨리 쳐들어오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우리야 사패련과 해안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저 먼 강북에 있던 이들이 이곳의 사정을 잘 알기는 어려운 일 아니더냐?”
“⋯⋯.”
“아마 해안에 몰려든 사패련 무리를 보고 저들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와 줬으니 응당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거기까지 말한 곽환소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를 옹호하는 데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다른 때였다면 그가 가장 먼저 나서서 저들을 힐난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지금은 저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도리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하룻밤 나누었던 술잔이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우습네.’
그 시간이 뭐 얼마나 길었다고.
그도 결국 중원이 보이던 홀대에 지금껏 그만큼 가슴이 쓰렸다는 뜻이리라. 그러다 보니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이들에게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원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저들은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
“솔직히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찾아오지라도 말 것이지. 괜히 사람 들뜨게만 하고⋯⋯.”
“그렇게 말하지 말자꾸나.”
곽환소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네 아버지도 뱃사람이셨지.”
“⋯⋯예.”
“그럼 알 것 아니더냐? 제 아들에게 바다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배를 타고 나갔다가 태풍을 맞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는 걸.”
“알죠.”
“매정한 건 바다지, 아비가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선택이 부자의 목숨을 앗아 간 선택이 되었다고 해도, 그 아비를 어리석었다고 욕하고 손가락질할 수 있느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사형.”
갑갑한 마음에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사실 다른 해남의 제자들 역시 딱히 천우맹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진 않았다.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는 쪽에 가까웠다.
세 해에 달하도록 무관심과 냉대 속에 버려져 있던 그들을 찾아 준 건 그래도 저들이 유일했으니까.
함께하던 이들에게도 버림받은 해남을 향해 뜻을 같이하자고 말해 주었으니까.
천하의 누구도 해남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으니까.
“자양.”
“예.”
“태풍이 그치거든 튼튼한 배 한 척을 골라 준비해 둬라. 저들이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런 것까지 해야 합니까?”
툴툴대던 이자양이 지그시 바라봐 오는 곽환소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합니다, 해요. 하면 되잖습니까.”
“그래. 부탁 좀 하자꾸나.”
평소 같았으면 제일 볼멘소리를 늘어놓았을 사람이 저리 나오니 이자양도 계속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두어 척의 배를 따로 준비해 둬라.”
“예? 겨우 열이 타는데 뭔 배를 또 준비합니까?"
“그런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해남파의 이름을 버리고 해남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는 이들이.”
“⋯⋯사형.”
“준비만 해 둬라. 그럼 된다.”
이자양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거기까지 말한 곽환소가 눈을 감았다.
‘도망가고 싶은 이라⋯⋯.’
어쩌면 그건 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는 해남의 대제자니까. 누군가가 해남의 이름을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면 그건 바로 곽환소가 되어야 한다.
“다들 깊이 생각해라.”
“사형. 저희는⋯⋯.”
“후회할 말은 하지도 말고.”
곽환소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깊은 한숨과 함께 하나둘 자리를 떴다.
* * *
“⋯⋯정말 사형의 말대로네요.”
고홍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유공의 말이 정말 맞아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장문과 장로들조차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대단하십니다.”
마음속에 묘한 안도가 일었다. 이처럼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가 유공이다. 그런 이가 문파를 떠나겠다고 결심했으니, 고홍의 선택 역시 결코 틀린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연신 감탄하는 고홍과는 달리, 유공은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되었더냐?”
“예. 장문인께서 태풍이 그치면 문파를 떠날 이들을 정식으로 파문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신 무학은 폐해야 한다고요.”
“그게 맞는 처사지.”
“무학을 잃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죽는 것보다는 낫지요.”
유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애초에 각오한 일이었다. 무학을 익힌 채 사가로 내려가면 위험한 건 오히려 그들이다.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저 사패련이 굳이 추적하여 죽일 필요도 없는 무지렁이가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 쟁쟁한 이들이 왔는데, 설마 저리 대책 하나 없을 줄이야.”
“저들이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예?”
“사패련이 그만큼 빠르고 무서운 것이지.”
고홍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미 유공의 시선은 그를 살피고 있지 않았다. 유공은 그저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볼 뿐이었다.
그의 예상대로다. 단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리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분명 잘된 일이다. 쓸데없는 변수가 끼어들면 일이 꼬여 버릴 수 있으니까. 어설프게 병력이라도 끌고 왔으면 장문인이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제자들을 하산시키는 대신 모두를 동원하여 사패련과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상사 없이 예정대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모르겠군. 왜 이리 씁쓸한지.’
- 잘 버텼다, 애송아.
그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어린놈이 건방지게 내뱉었던 그 말이 이상하게도 자꾸 뇌리에 박힌 것처럼 빠져나가질 않았다.
“천우맹 놈들은 어쩌고 있느냐?”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도 염치가 없으니 뭘 어쩌겠습니까?”
“⋯⋯그렇겠지.”
유공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모든 게 예정대로 흘러가리라.
내일쯤 태풍이 그치면 저들은 떠날 것이고, 사패련은 해남을 짓밟을 것이다. 해남과 운명을 함께할 이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고, 유공과 고홍처럼 삶을 택한 이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을 외면한 채 제 길을 걸어갈 테지.
그걸로 해남파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멍청하게⋯⋯.”
“예?”
“아니다.”
유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리 채비해 두거라. 우리가 마음이 급하다 해서 장문인께서도 급하실지는 모를 일이다. 괜히 시간을 지체하다 횡액 맞닥뜨리는 일 없도록 파문식이 끝나면 바로 떠나야지.”
“예, 그⋯⋯ 형님.”
“⋯⋯아직은 사형이라 불러라.”
“아⋯⋯. 예, 그러겠습니다.”
고홍이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날 밤.
해남을 뒤덮은 태풍은 전날보다 더욱 강력하게 대지를 휩쓸었다. 마치 손톱으로 해남을 그러쥐고 떨어지지 않으려 발악을 해 대는 것처럼.
하지만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
“⋯⋯그쳤구나.”
맹렬하게 불어오던 바람과 억수 같은 비는 거짓말처럼 뚝 멎어 있었다. 냉정하고 무심한 바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