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5화. 고작 그게 전부요? (5)
장로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열 명이라고?”
“이,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란 말인가?”
“어찌 이런⋯⋯.”
백천의 뒤를 지키는 천우맹 일행은 오히려 그 반응에 당황했다.
“⋯⋯사형. 다들 왜 이러는 거예요?”
조걸이 속삭이듯 묻자 윤종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저 선발대였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선발대요?”
“이 먼 해남까지 고작 열 명이서 올 리가 없으니⋯⋯ 더 많은 이들을 이끌고 와서 우리만 먼저 바다를 건넜다고 생각한 것 같구나.”
“어⋯⋯.”
조걸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해남의 장로들을 보았다.
물론 조걸은 적잖이 황당할지 모르나, 사실 저들로서는 이게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우맹의 입장에서야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명성이 높은 이들과 각 문파의 수장들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해남의 입장에서 봤을 땐 그 정도 되는 이들이 수행원도 없이 단독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세상 어느 문파의 문주가 제 문파를 내버려 두고 홀로 적진을 가로지른단 말인가? 이건 강호의 상식은 물론이거니와, 세간의 상식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함께 온 이들이 따로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상황을 자세히 따져 물을 수 없기에 생겨난 오해였다.
“그럼 대체 이곳까지 뭐 하러 왔단 말입니까!”
“구파일방을 버리고 천우맹에 들라? 어차피 망할 문파, 마지막 이름까지 써먹겠다는 건가?”
“이런 후안무치한!”
들불처럼 타오른 장로들의 분노가 일행들에게 쏟아졌다.
그 격한 반응에 몇몇이 놀라 눈을 크게 치떴다. 그리고 또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백척간두에 몰린 상황이라지만, 그래도 저들을 생각하여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좀 아니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만⋯⋯.”
“장문인! 이게 병든 범의 모피마저 벗겨 가겠다는 소리와 뭐가 다릅니까!”
“도움은 주지 않겠지만, 그 이름을 가져가겠다는 수작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대접을⋯⋯.”
“그만!”
순간 금양백의 목소리가 맹수의 포효처럼 터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장로들이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장로로서 오래도록 곁을 지키면서도 그가 저토록 진노한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남해의 사내라는 것들이⋯⋯.”
금양백이 싸늘한 눈으로 쏘아보자 장로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설령 저분들께서 행한 일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해도, 해남을 돕기 위해 사지를 뚫고 달려오신 분들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아니더냐?”
“장문인⋯⋯.”
“정작 우리를 도와야 할 이들은 따로 있는데, 그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마음이라도 써 준 분들에게는 더 많은 걸 내놓지 않는다고 삿대질해 대는구나.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지만, 이게 진정 해남의 장로라는 것들이 보일 추태더냐?”
장로들은 차마 금양백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깊게 고개를 더 숙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던 금양백의 입에서 이내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천을 다시 보며 말했다.
“추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다들 절박한 터라⋯⋯.”
“아닙니다, 장문인. 저희가 더 많은 것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그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외다.”
금양백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의 미소에는 확연한 그늘이 져 있었다.
“장문대리께서 하신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장문인, 아직⋯⋯.”
“아니요.”
금양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도울 이들을 함께 데려오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괜한 기대를 한 것뿐이지요.”
“⋯⋯.”
“못난 장로들의 말대로 천우맹에서 저희의 이름만을 이용하려 오셨다 해도⋯⋯.”
“아, 그건⋯⋯!”
“예, 압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제가 해남의 장문인이기는 하지만, 해남의 이름이 여기 계신 분들을 모두 움직일 만큼 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금양백이 자조하듯 웃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의도로 오셨다면, 그 노력을 봐서라도 이용을 당해 드리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한 대접입니다.”
금양백은 초탈해 버리기라도 한 듯 초연했다. 백천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금양백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장문대리. 죄송한 말씀이지만, 천우맹의 그 권유는 거절하겠습니다.”
“⋯⋯장문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금양백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장에 향해 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아마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해남은 구파일방에 속해 있지만, 진짜 구파일방일 수는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저 화산이 빠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밀어 넣은 곳일 뿐.”
자조적인 말이지만, 그 어투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같은 구파일방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암묵적인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차별의 기저에는 남해의 섬사람인 우리에 대한 멸시도 존재했겠지요.”
“그건⋯⋯.”
“섬사람은 믿을 수 없다. 섬사람은 신의가 없다. 섬사람들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바다처럼 시시각각 태도를 바꾼다.”
금양백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도 내지인인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기 힘든 감정일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빙궁주께서도 이해하시기 어려운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차별받는 이들이 차별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을 감내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백천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금양백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장문인.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장문인께서 말씀하셨듯 아무리 해남이 애를 쓴다고 해도 진정한 구파일방의 일원이 되기란 요원합니다. 하지만 천우맹은 맹에 속한 문파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녹림마저 맹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을 하던 백천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런 권유를 다시 하는 게 하등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금양백이 빙그레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금양백이 말했다.
“장문대리께서는 신의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예?”
“말 그대로입니다. 신의가 무엇입니까?”
백천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신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하는 건 너무도 쉽겠으나, 지금 금양백이 묻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닐 테니까.
백천이 답을 하지 않자 금양백이 말했다.
“저는 신의란, 마지막에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장문대리. 해남은 오랜 기간 저들에게 끝까지 신뢰하기 어려운 문파였고, 언젠가는 돌아설지도 모르는 문파였습니다. 아무리 협의를 목놓아 부르짖고, 그렇지 않다고 변명해도 저들의 뿌리 깊은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
“단순히 강호의 일만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남은 힘이라도 있지만, 힘이 없는 해남도의 사람들은 피부의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육지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차별을 받고 편견에 시달립니다.”
“장문인⋯⋯.”
“그런데 우리가, 우리 해남파가 마지막 순간에 장문대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구파일방을 저버리고 천우맹의 손을 잡는다면 과연 저들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금양백이 굳이 백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
“역시나 믿을 수 없는 섬 놈들이었구나.”
잠시 말을 멈추었던 금양백이 고개를 저었다.
“장문대리. 우리는 바보가 아닙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중원의 문파들이 해남을 이미 버렸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장문인. 먼저 신의를 저버린 것은 저들입니다.”
“그렇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결국 남는 건 해남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뿐일 텐데.”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가 마지막에 천우맹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천하에 구파일방의 신의 없음을 알려 그들의 면을 상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남은 이들에게 가해지는 멸시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사람이란 제 큰 잘못보다는 타인의 작은 흠을 더욱 크게 보는 법이 아닙니까?”
이건 백천조차도 반박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장문대리. 어떤 연유에서건, 이 먼 땅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주신 것에는 감사를 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금양백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백천은 얼른 그를 만류하려다 반쯤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금양백이 그 상태로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남의 입장상, 그 제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해남파는 이대로 끝이 날지 모르지만, 해남도의 사람들은 그 뒤에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점마저 고려해야 하는 해남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백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는 어쩌실 셈입니까?”
“글쎄요.”
고개를 든 금양백이 초연하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백천의 권유 덕분에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떠날 것이고, 누군가는 항복할 것이고, 남은 이들은 맞서서 증명하겠지요. 그리고 제가 할 일은, 맞서 증명하려는 이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
“살길이 보였다고 생각했을 때는 평생을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으니 한 번쯤은 먼저 입장을 달리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마지막이 정해진 것이라면 해남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끝을 맺어야겠지요.”
백천은 무거운 마음으로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렇기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한들, 그건 해남에 대한 모욕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태풍은 곧 그칠 것입니다. 오랫동안 섬에 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지요.”
금양백은 백천과 그 뒤에 좌정한 이들을 두루 보며 말했다.
“태풍이 그치거든 섬을 떠나십시오. 저희야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떠난다면 몰라도, 작은 배 한 척이 섬을 빠져나가는 정도로야 굳이 뒤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걸은 저도 모르게 제 허벅지를 콱 움켜잡았다. 저 담담한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찔러 와서였다.
“그러니⋯⋯ 중원으로 돌아가시거든 그저 한 가지만 전해 주십시오. 해남은 중원과 구파일방에 대한 신의를 지켰고, 정파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말입니다.”
눈을 감은 금양백이 가만히 말했다.
“그저 그것이면 족합니다.”
금양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백천이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돌려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시선을 받은 이는 감정 없는 눈빛을 돌려줄 뿐이었다.
백천은 짧게 탄식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금양백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 했다.
“장문인의 뜻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금양백 역시 몸을 일으켜 백천에게 마주 포권 했다.
“귀 맹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겠습니다.”
더없이 쓰디쓴 회담의 끝, 그 결과는 완전한 결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