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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44화 (1,245/1,567)

1244화. 고작 그게 전부요? (4)

사람이 진정으로 화를 내는 건,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눈앞에 들이밀었을 때다.

지금 이곳에 있는 해남인들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알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 보이지만 눈을 돌려 버리고 싶었던 일. 이 백천이라는 젊은 청년이 그들의 눈앞에 들이밀고 소리쳐 대는 게 바로 그 피하고 싶었던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사람이기에 터져 나오는 반응은 같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는 거요!”

“아무리 천우맹의 특사 자격으로 왔다고는 하나, 말씀이 너무 과하시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이까?”

하지만 백천은 그 격렬한 반응에 굳이 공들여 반박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쏟아지는 말들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격한 말을 토해 내는 이들을 하나하나 응시하면서.

그가 이토록 무심하게 반응하니 달아올랐던 분위기도 서서히 식어 갔다.

더는 입을 여는 이들이 없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 백천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차갑도록 담담한 목소리가 흥분한 이들 가운데로 툭 던져졌다.

“제가 이런 말을 한 연유를⋯⋯ 굳이 설명해 드려야 합니까?”

짤막하게 던져진 그 말은, 배려인 동시에 혀끝에 달린 칼이였다.

해남이 구파일방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들도 그나마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르는 온정에 기대는 것뿐이었고, 현실을 논하는 이들도 외면한 이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구파일방이 적극적으로 나서 해남을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이는 이곳에 단 한 명도 없다.

“협의를 논하고, 정도를 논하고.”

들끓는 심사를 어쩌지 못하는 이들의 귀에 백천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빙빙 돌려 가며 좋은 말로 논의를 해 나가는 것. 거창한 뜻을 내세워 저희가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 그리고 서로가 상처 입지 않고 점잖게 입장을 확인하고 물러나는 것.”

“⋯⋯.”

“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천의 시선이 슬쩍 뒤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을 통해 몰아치는 태풍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그 비바람 속에서도 밖을 지키는 해남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저희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해안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았소이까?”

“징발된 수많은 배들과 새로 건조되는 배를 봤습니다.”

그 말에 금양백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징발이라 하셨소?”

“예. 작은 고깃배 하나까지 남김없이 끌어갔더군요.”

대전에 든 모든 이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배를 징발했다면, 그 뒤에 이어질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침공.

굳이 진위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사패련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은 그들 역시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장문인.”

백천이 금양백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 태풍이 그치는 순간, 사패련은 해남으로 진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장문대리.”

“서로 점잔빼는 말들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저 저희의 입장을 전달해 드리려 합니다. 천우맹은 해남 역시 저희와 함께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허울뿐인 협의가 아니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에서 다시 한번 해남이라는 이름을 떨치시길 권해 드립니다.”

금양백은 수심에 잠겨 잠시 침묵했다. 그 틈을 견디지 못하고 안달이 난 장로들이 작게 속삭여 왔다.

“장문인.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구파일방에서 자진하여 탈퇴하다니요. 이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 해남이란 이름을 지켜 낸다 한들 그 뒷감당은 어찌할 것입니까? 저 소림이나 무당이 저희를 어찌 대하겠습니까?”

“세인들의 시선은 또 어쩌고요.”

반대의 입장도 물론 만만치 않았다.

“나중 일을 지금 끌고 와서 어쩌자는 겁니까? 해남이 망하고 나서도 그 나중이 있답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구파일방은 저 먼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장 도움을 주는 쪽과 손잡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구파일방을 나간다고 우리가 사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천우맹이라면 구파일방에 그리 뒤지는 곳도 아니잖습니까?”

금양백이 침묵하자 그들의 목소리는 차츰 더 커졌다. 말없이 눈을 감은 채 모두의 말을 듣던 금양백이 천천히 눈을 떠 백천을 응시했다.

“장문대리.”

“예.”

“⋯⋯구파일방에서 스스로 나오라는 것은 무척 과한 요구요. 그 사실은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 믿소.”

“물론입니다.”

“그만한 권유를 하는 건, 확고한 자신과 신념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소?”

“예. 그러합니다, 장문인.”

백천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천우맹과 함께하는 것이 해남에게 명분과 실리, 또한 미래를 가져다줄 선택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명분과 실리, 그리고⋯⋯ 미래라.”

금양백이 가라앉은 눈으로 백천과 그 일행을 가만히 살폈다. 확실히 저들에게는 미래가 있어 보였다.

‘젊군.’

지금 보니 각 문을 대표하는 이들의 나이가 하나같이 어리다. 누군가는 그게 해남을 무시한 처사라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양백은 새로운 것을 느꼈다.

천우맹은 다음 세대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해남은 이미 그 변화에 뒤처진 것이다.

그 역시 보고 싶었다. 저 젊은 무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 갈 천우맹이 훗날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저들 사이에 해남의 젊은 장문이 함께한다면 또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다만⋯⋯ 저들에게 있는 미래가 해남에도 존재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합니다만, 지금 해남의 상황은 명분과 미래를 논하기에는 너무 급박하외다.”

“자, 장문인.”

“조용.”

뒤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금양백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반발을 깔끔하게 잠재웠다.

“누군가는 장문대리께서 하는 말씀에 가슴이 떨릴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장문대리께서 그리는 미래에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내게는 그런 말들이 딱히 와닿지 않습니다.”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들을 논하기에는 지금 해남의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다.

“천우맹과의 미래를 논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화와 협의란 서로가 동등할 때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장문대리께서 준비해 놓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저희가⋯⋯.”

금양백이 백천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해남이 천우맹과 함께한다면 천우맹은 저희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백천이 짧게 심호흡한 후 말했다.

“저희는 딱히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

“약속해야 한다면 그저, 지금처럼 해남이 위기에 처해 백척간두에 몰렸을 때 결코 외면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금양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그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을 때는 어떤 말도 할 수 있고, 어떤 약조도 할 수 있습니다. 구파일방에 드실 때, 저들이 이런 상황에 해남을 돕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셨습니까?”

“⋯⋯물론 그건 아니오.”

“하지만 저희는 그런 약조 없이도 이리 달려왔습니다.”

“⋯⋯.”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 그리고 저희가 바라는 것 역시 그것뿐입니다. 천우맹의 우(友)는 이득이 아닌 신의로 함께하기 위해 존재하는 글자입니다.”백천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저희가 드릴 수 있는 건 그 신의입니다. 이득이 될 때만 함께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필요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금양백이 묘한 눈으로 백천을 보았다.순간 그들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백천의 뒤를 지키는 천우맹 일행도, 해남 장문인의 뒤를 지키는 장로들도 막 이상함을 느끼려던 찰나, 금양백이 입을 열었다.

“장문대리.”

“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이제 사패련과 마지막 싸움을 해야 하는 우리 해남을 위해서 천우맹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장로들이 깜짝 놀라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평소 알고 있던 장문인과 다르게, 지금 금양백이 꺼낸 말은 너무도 직설적이었기 때문이다. 해남을 돕기 위해 먼 길을 와 준 이에게 하기에는 지나치게 속물 같은 말이기도 했다.

그때 백천이 말했다.

“지금 해남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저희 천우맹이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모두의 시선이 백천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잠시 후, 모두의 귀에 백천의 목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한편으로는 섬뜩하게 들려왔다.

“⋯⋯없습니다.”

쏴아아아.

새삼 모두가 문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이나 싸늘한 정적이 대전 안에 퍼져 나갔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금양백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내일.”

“⋯⋯.”

“그 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문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금양백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막상 이번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백천이 눈을 감아 버렸다.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하고 싶은 말도 무수히 많다. 하지만 백천은 그 무엇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지금의 해남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사패련의 진격은 그들의 예상보다 너무 빨랐고, 그들은 사패련을 막아 낼 어떠한 대비도 하지 못한 채 해남에 당도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장문대리.”

금양백은 치밀어 오르는 숱한 감정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천우맹이 해남을 위해 보낸 이들이 이곳에 있는 열이 전부입니까? 아니면 혹 해남을 돕기 위한 방편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까?”

그 말에는 마지막까지도 끝내 떨치지 못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그런 그의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렸다.

“지금으로서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전부입니다, 장문인.”

아무리 천우맹의 힘이 강대하다고 해도, 당장 태풍 뒤에 들이닥칠 환란에서 당장 힘이 될 수 있는 이들은 이곳의 열 명뿐이다.

열 명. 적은 수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한 문파와 한 세력이 생존을 두고 싸우는 전장을 뒤바꾸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수다.

그래. 너무도 초라하다.

“고작⋯⋯.”

차마 말을 바로 잇지 못한 금양백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고작 그게 전부요?”

노기와 허탈함,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가 침묵에 빠진 대전 안에 서늘하게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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