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3화. 고작 그게 전부요? (3)
“크, 크흠.”
금양백은 황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금양백 정도 되는 무인이 제 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사레든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저 말을 면전에서 듣고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뭐라 했더라?
“지금⋯⋯.”
호흡을 다시 한번 다듬은 금양백이 되물었다.
“구파일방을⋯⋯ 탈퇴하라 하셨습니까?”
“예.”
대답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더 황망했다.
금양백은 다시 말문이 막혀 백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실수를 저질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작자는 대체 뭘까?
대체 뭐 하는 인간이길래, 화산의 신물을 들고 와 그더러 구파일방을 탈퇴하라는 말을 당당히 지껄이는 걸까?
‘강호사를 통틀어 이런 말을 들어 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구파일방에 소속된 문파더러 제 발로 구파일방을 박차고 나오라니. 이건 제정신이 박힌 이라면 결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다.
심지어 중원을 침탈했던 마교, 혹은 한때 중원에 피바람에 몰고 왔던,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사파의 거대 문파들도 이런 말을 쉬이 입에 담지는 못했을 것이다.
구파일방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이해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특히나 해남이 그 구파일방에 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아니, 아니다!’
금양백은 순간 움찔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빠르게 지워 냈다.
순간적으로, 백천이 이 말을 꺼낸 이유가 혹여 해남이 꿰찬 자리가 원래 화산의 것이었단 데서 유래한 악감정 때문인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어찌 이런 망령된 생각을!’
이건 떠올리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생각이다.
사지나 다름없는 강남을 돌파해 이 먼 곳까지 와 준 이들이다. 단순히 악감정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천우맹과 화산에 대해 지금껏 들은 이야기들만 감안해 보아도 이건 소인배의 부끄러운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제 머리에 담았다는 것에 큰 수치를 느낀 금양백은 한껏 신중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 장문이 우둔하여⋯⋯ 장문대리께서 하신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백천은 그런 금양백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처음과 다름없이 단호하게 답했다.
“이제는 허울밖에 남지 않는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시고 저희 천우맹과 함께하기를 권해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말을⋯⋯.”
금양백의 주위를 지키고 있던 해남의 장로들이 거세게 웅성거렸다. 그들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백천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시오!”
“어찌 그런 말을 무례하게⋯⋯!”
“조용히.”
“하나, 장문인! 저건 도를⋯⋯.”
“조용히 하시게들.”
금양백이 딱 잘라 말하니 장로들이 헛기침하며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너무 황당한 마음에 끼어들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는 그들이 마음껏 함부로 입을 열어도 될 만한 자리가 아니기는 했다.
딸각.
금양백은 잠시 침묵을 고수하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가 식겠습니다. 해남의 고산에서 자라는 좋은 찻잎으로 만든 차이니 그 향을 한번 즐겨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백천이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을 드는 것부터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모습까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하고 부드러웠다.
“혹여 다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금양백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은 백천이 빙그레 웃었다.
“다도라는 것을 특별히 배울 정도로 여유롭지는 못했지만, 화산의 전 장문인이셨던 현종진인께서 워낙 차를 즐기시는 터라 어깨너머로 예를 배웠습니다.”
“아, 현종진인께⋯⋯. 예? 현종진인께서 장문인 자리에서 내려오셨습니까?”
“제가 그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했습니다. 전대 장문인께서는 화산의 현 장문인이신 운검진인께 장문인의 자리를 이양하셨습니다.”
“허⋯⋯.”
금양백은 이번에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호, 혹여 현종진인⋯⋯. 아니, 귀문의 태상장문께서⋯⋯?”
“그런 건 아닙니다. 장문인께서는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아⋯⋯.”
“그분의 깊은 뜻을 제가 모두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이제는 후학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투성이였다. 조금 전 구파일방에서 탈퇴하란 말도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이 말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제 발로 장문의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이런 시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지금 강호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파를 이끌던 이가 후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대체 자신이 키운 제자들을 얼마나 신뢰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금양백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사실 지금 화산의 기세는 저 소림마저 위협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가진 힘이야 아직 소림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강호에 미치는 영향력만 두고 봤을 땐 일정 부분 소림을 능가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화산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참으로 긴긴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을 터.
전신이 늪에 잠겨 드는 것 같은 고통을 버티고 또 버티다 이제야 겨우 광영을 맞았는데, 그 중심에 선 자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사람이 얼마나 욕심이 없어야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대단하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금양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입장이 완전히 반대가 되었구나.’
일전에 마주했을 때, 현종은 감히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뒤집혔다. 이젠 그가 감히 현종의 그림자조차 밟기 어려워졌다.
그는 해남을 멸문의 위기에 처하게 한 무능한 이가 되었지만, 현종은 그 삼류 문파에 불과했던 화산을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대문파로 키워 낸 이가 되지 않았는가?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밀려드는 숱한 감정을 애써 밀어 낸 금양백은 최대한 여유를 잃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대리께서 어찌 그런 제안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종진인처럼 세속에 초탈한 분을 장문으로 모시고 배운 분이시니, 구파일방이니 뭐니 하는 이름도 그저 허울에 불과해 보이겠지요.”
“⋯⋯.”
“하지만 장문대리. 세속에서 구파일방이 어떤 의미이고, 세인들이 구파일방을 어찌 생각하는지도 한번 고려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구파일방이란⋯⋯.”
“압니다, 장문인.”
금양백이 백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른 문파 장문인의 말을 중간에 끊어 버리는 것은 무례 중의 무례라 할 수 있지만, 지금 금양백은 그런 걸 두고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저 백천이 다음에 할 말이 더 궁금했다.
“안다고 하셨습니까?”
“예. 어쩌면 제가 장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문인께서는 구파가 된 해남을 이끄신 분이지만, 저희는 그 구파일방을 가장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기만 하던 이들이니까요.”
그 말에 금양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저 화산도 지금의 위치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분명 저들도 구파일방을 선망과 질시가 동시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구파일방에 복귀하는 날을 꿈꿨겠지.
“그런데도 저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까?”
“예.”
백천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굳이 돌려 말할 것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의 구파일방은 해남이 굳이 목을 맬 이유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장문대리.”
“지금 이곳에 온 게⋯⋯.”
말을 잠시 끊은 백천이 금양백의 뒤쪽에 자리한 장로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구파일방이 아닌 저희라는 점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금양백의 입에서 순간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긴 한숨 끝에 그는 조금 느릿해진 어조로 말했다.
“물론 멀고도 먼 이곳까지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는 어떤 감사도 부족할 것입니다. 해남파의 장문인으로서는 물론이고, 해남도의 사람으로서도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
“하지만 장문대리. 그것과 이건 별개입니다. 그 감사와⋯⋯.”
“본디.”
백천이 다시 한번 금양백의 말을 끊었다.
이번에는 금양백도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백천의 말이 그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이곳에 와야 할 이들은 저희가 아닌 구파일방이었을 것입니다.”
“⋯⋯.”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正)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은 상황이 어떻든 어려운 처지에 봉착한 이들을 도울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백천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렇기에 저희 천우맹 역시 이곳에 계신 분들께 사죄를 드리려 합니다.”
백천이 좌정한 그대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금양백이 당황하여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장문대리!”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습니다. 해남이 저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해남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아채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해⋯⋯. 아니, 그럴 수 있었음에도 반쯤은 외면해 버린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그게 어찌 천우맹의 과가 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장문대리! 어서 고개를 드십시오!”
백천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문인.”
“예, 장문대리.”
“외람되오나 천우맹의 과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천우맹은 본디 협의를 숭상한다는 가치 아래 깃발을 올린 곳. 또한 그로 인하여 많은 것을 얻은 곳입니다. 그런 천우맹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건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금양백은 순간적으로 백천에게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올곧다. 그저 올곧다.
올곧다는 게 때로는 앞뒤 꽉 막혀 답답하단 말이 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이 되기도 한다.
가진 무력, 세력, 명분, 그리고 서로의 상황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지금 백천이 내세운 것은 올곧음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금양백은 압도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묻고자 합니다.”
백천이 금양백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누구보다 먼저 그 협의를 지켜 내야 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장문대리⋯⋯.”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니. 인정하셔야 합니다, 장문인.”
백천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차게 일갈했다.
“구파일방은 해남을 버렸습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금양백의 심장을 난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