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2화. 고작 그게 전부요? (2)
전각의 처마 아래에 서 있던 금양백이 절도 있게 걸어 나와 선두에 있는 백천을 향해 깊이 포권 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남의 장문인 금양백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묘한 감회를 느껴야 했다.
해남의 장문인. 지금이야 그 이름에 딱히 큰 울림을 느끼지는 않는다. 해남의 장문인이라는 이름에 눌리기에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거물들을 겪었으니까.
당장 소림의 장문인과 언성을 높이고 논쟁하는 처지에, 해남의 장문이라 해서 뭐 그리 특별할 게 있겠는가?
하지만 그건 지금 화산의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해남의 장문인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떠안기는 이였다.
화산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은 원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승천하는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부러움의 대상.
그런 이가 지금 제 발로 처마를 벗어나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백천을 맞이한 것이다.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입니다. 간밤에 장문인의 배려로 지친 몸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연통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객을 내치지 않으시고 온정을 베풀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백천이 공손히 포권 하며 금양백의 예를 받았다.
그 모습에 윤종의 가슴이 절로 떨려 왔다.
알고 있다.
지금 금양백이 보이는 예의는 백천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백천이 가진 ‘장문대리’라는 직위에 보이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천우맹의 ‘특사’라는 입장에게 전하는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몇 해 전 금양백은 화산이라는 문파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젊은 제자들이야 그 치기를 숨기지 못했지만, 금양백은 화산을 경원시하지도 멸시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화산이 해남에게 위협조차 되지 않는 문파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금양백이 제 발로 비바람을 맞으며 백천을 환대하고 있다. 이미 한번 본 이에게 제대로 된 예를 다시 갖추어서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화산의 위상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될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장문인.”
금양백이 활짝 열린 대전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천우맹 일행에게 들고 있던 면포를 내밀었다.
“이게 뭔⋯⋯.”
“쉿.”
당황한 조걸이 뭐라 말하려 하자 윤종이 그의 옆구리를 툭 치고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건 남궁도위였다. 남궁도위는 자연스레 면포를 받아 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고 있었다.
조걸도 눈치껏 그를 따라 빗물을 닦아 냈다.
“명문가 공자님이 한 분 있으니 참 좋네요."
“그러니까. 우리끼리 왔으면 어쩌라는 거지 하고 멀뚱멀뚱했을 것 아니냐?”
“역시 소가주님.”
당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도 명문가 소가주입니다.”
“아. 그랬죠. 그런데⋯⋯ 왜 그렇게 안 느껴지지? 이상하네. 너무 친근해서 그런가?”
“얼굴이요.”
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마지막 말을 꺼낸 이를 돌아보았다.
“왜요?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
당소소가 왜 그렇게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시죠.”
“예.”
당패의 어깨가 축 처졌고, 윤종은 그저 고개를 돌려 주는 것으로 그를 배려했다.
“앉으시지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금양백이 손짓하자 백천이 미리 준비된 방석에 앉았다. 그제야 금양백을 비롯한 해남의 장로들이 앞쪽에 일렬로 착석했다.
모두의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무섭게 해남의 제자들이 차와 간단한 주전부리가 담긴 다탁을 들고 와 화산의 제자들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윤종의 이마에 살짝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더워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사실 그동안 화산의 제자라는 자부심을 키워 오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다른 문파에서 이렇게 정식으로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화산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는 건 그들이 아니라 장문인과 장로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장문인에게 가야 할 대접이 이쪽으로 오는 순간, 지금 화산과 천우맹을 대표하여 왔다는 실감이 절절하게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살짝 숨이 막혀 오는 느낌이었지만, 윤종은 오히려 어깨를 더욱 쫙 폈다. 화산과 천우맹을 대표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 분위기에 눌렸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될 테니까.
“먼 곳에서 험한 길을 넘어 객이 찾아오셨는데, 대접도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지금 해남의 상황이 워낙 급박하여 이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라지도 않던 환대에 황송하던 참에 그런 말씀까지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누가 해남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보았겠습니까? 제 입장을 떠나, 한 개인으로서는 평생을 자랑할 일일 것입니다.”
상대를 치켜세워 주는 말들이 잠시 오갔다. 평소 같았으면 백천의 혀가 능수능란하게 잘 돌아간다고 낄낄댔을 화산의 제자들도 지금만큼은 이 분위기에 눌렸는지 입을 다물고 둘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여⋯⋯.”
그때, 금양백이 살짝 헛기침하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실례가 되는 질문이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귀하께서는 화산의 장문인을 대리하는 입장으로, 또한 천우맹의 특사로서 이곳에 방문했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러합니다.”
“사람의 말에 의심을 가지는 것은 군자의 덕이 아니나, 이곳은 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소식이 빠르지 않습니다.”
백천이 빙그레 웃고는 제 허리춤에 찬 자하신검을 풀어 냈다. 금양백은 말없이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스르르릉.
검을 가로로 들어 올린 백천이 천천히 자하신검을 뽑았다. 백색을 띤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보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산의 신물, 자하신검입니다. 화산의 장문인께서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제게 신물을 들려 보내셨습니다.”
백천은 이내 살짝 곤란한 어투로 말했다.
“다만, 이 검이 화산의 신물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문대리.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다.”
금양백은 이 순간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점 의심까지 모두 지워 냈다.
백천이 화산의 장문대리로 왔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백천 역시 화산오검으로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친 자. 자문의 장문에 관한 일을 지어내거나 거짓으로 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백천이 그런 악의를 품었다 해도, 함께 온 화산의 제자들이나 다른 문파의 소문주들이 그 상황을 보고만 있을 리 없으니까.
다만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 ‘장문대리’라는 직위에 어느 정도의 권한이 실려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신물이란 장문인의 부재 시 그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때로는 장문인 자체보다 더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일문의 신물이다.
저 자하신검이 화산의 신물이라면, 백천은 화산의 모든 권한을 그 손에 들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금양백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아차 하며 재빨리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내가 긴장하고 있었구나.’
아직 그는 저들에게서 어떠한 말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저 화산의 장문대리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백천이 저 화산의 장문대리라고는 하나, 그의 반도 살지 않은 어린 청년이 아니던가? 해남의 장문인인 금양백이 백천이라는 이를 대하며 긴장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긴장을 완전히 늦출 수 없는 까닭은, 저 백색의 장포와 그 가슴팍에 새겨진 매화 문양 때문이다.
문파를 상징하는 그 두 가지가 긴장을 준다는 건, 화산파가 그들이 보기에도 이젠 더없이 거대한 곳이 되었단 의미이리라.
금양백이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고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장문대리. 대체 이곳까지는 어찌 오신 겁니까?”
긴장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작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금양백은 백천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너스레를 떨어 받을 준비를 하며 말을 이었다.
“이 시기에 도착하시려면 진즉에 출발하셨을 텐데, 어찌 미리 연락 한번 주지 않으시고요. 그럼 저희가 바다로 마중을 나갔을 터인데, 괜히 저희가 예를 모르는 이들이 된 것 같아 조금 민망합니다. 하하.”
하지만 이어진 백천의 대답은 금양백의 의도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강남을 뚫고 왔습니다.”
“⋯⋯예?”
“육로를 통해 강남을 직선으로 뚫고 왔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힌 금양백이 백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남? 지금 강남이라고 했나?
“⋯⋯장문대리. 지금 말씀하시는 강남이⋯⋯.”
“호북에서 출발하여 광동을 거쳐 왔습니다.”
금양백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과, 광동?”
“예.”
백천이 싱긋 웃으며 선선히 답했다. 금양백은 순간 장문인으로서의 체면도 잊고 멍하니 되물었다.
“장강을 넘어오셨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마, 만인방의 본거지인 광동을 통해서?”
“예.”
“아, 아니,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금양백은 물론이고 장로들조차도 순간 제 위치를 잊고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황당해했고, 또 누군가는 불신했다.
하지만 백천은 그저 담담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대답할 뿐이었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금양백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젊은 청년은 담대한 것인지 뻔뻔한 것인지, 그런 반응 속에서도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사실 금양백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제정신인가?’
하지만 이곳은 하고픈 말을 마음껏 내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말을 정제하고 순화했다.
“그, 그러다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물론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잘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백천은 굳이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천이 금양백과 그 뒤에 있는 장로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위험한 건 저희뿐만이 아니었잖습니까. 해남이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처지에 처해 있었지요.”
모두가 그런 백천을 마주 보았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했다.
“위험에 처한 이를 도우러 가는 길에 스스로 안위를 살피기에 급급하다면, 그게 어찌 제대로 된 도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백천이 담담하게, 하지만 더없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화산의 방식도, 천우맹의 방식도 아닙니다.”
모두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금양백은 직감했다. 그가 얻어 오려 했던 대화의 주도권이 이 순간 백천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말이다.
저 젊은 청년은 화산의 힘과 권위에 기대지 않고 그저 제 뜻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를 완전히 압도한 것이다.
“그러니 장문인.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편견 없이 들어 주십시오.”
보통 이런 말 뒤에는 한차례 쉬어 가는 말이 이어지니, 금양백 역시 그리 짐작하여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해남파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 저희 천우맹은 귀 해남파에 구파일방을 탈퇴하고 천우맹에 합류하실 것을 권해 드리는 바입니다.”
“쿨럭!”
순간 사레들어 버린 금양백이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로, 단 한 번의 에둘러 가는 시늉조차 없이 명치에 전력으로 쑤셔 박히는 직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