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41화 (1,242/1,567)

1241화. 고작 그게 전부요? (1)

“끄으……. 속이…….”

조걸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어제 마신 술이 과했는지, 속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남 애들도 진짜 무식하게 마시네요.”

“……아마 건너편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우리가 어디서 술로 뒤져 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그때 야수궁주님을 빼면…….”

“그분은 일단 사람에서 제외하자꾸나.”

야수궁주님과 대작하던 청명이 놈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끄응.”

조걸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주섬주섬 봇짐을 풀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혹여나 상할까 애지중지하며 곱게 싸 놓은 화산의 정복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뭔 회의를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합니까?”

“빠른 게 아니라 늦은 거다.”

“예?”

윤종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하룻밤 쉴 시간을 준 것만으로도 장문인께서 대단한 인내심을 보여 주신 게지. 너 같으면 이런 상황에 외인들이 찾아왔는데 입을 닫고 기다릴 수 있겠더냐?”

“……안 되겠죠.”

“그래.”

윤종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술을 마셔 대는 이들의 얼굴을 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먼 길을 온 우릴 배려해 주셨으니 감사하다 여겨야지. 쓸데없는 불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거라.”

“에이, 사형. 제가 어디 그런 거에 불만 가질 사람입니까? 불만인 게 아니라, 술이 덜 깬 것 같은데 괜히 낯빛 안 좋은 꼴 보일까 봐 그러죠.”

“……그건 나도 동감이다.”

윤종이 쓰게 웃었다. 사실 대체 어떻게 숙소에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들은 이곳이 숙소라는 것도 잘 몰랐으니, 제 발로 들어온 건 아니라고 봐야겠지.

추태라면 추태다. 중요한 회담을 위해 해남을 방문한 객이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닌 건 확실했다.

하지만 윤종도 그렇고 조걸도 그렇고, 딱히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술을 퍼먹였을까?”

“저희야 뭘 알겠습니까? 대충 분위기 보고 그래야 할 것 같으면 맞춰 주는 거지.”

“하…….”

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청명이 놈 곁에서 지낸 지가 삼 년이 넘어가면 이유나 당위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냥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적당히 눈치껏 장단을 맞추게 되어 버린다.

“늦겠다. 서둘러라.”

“자, 잠시만요. 바지만 좀…….”

“……빨리 좀 입어라.”

“다 입었습니다, 다!”

윤종이 한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여기저기서 문을 열고 나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간밤에 강녕하셨습니까, 남궁 소가주님?”

“윤종 소협께서도 잘……. 우웁……. 잘 주무셨습……. 웁…….”

윤종이 떨떠름한 눈으로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봐도 참 깎아 놓은 듯 잘생겼다 싶던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환자처럼 퀭하게 변해 있었다.

“……안 좋아 보이시는데…….”

“뭐, 뭔 놈의 술을 그렇게……. 아니, 뭔 사람이…….”

“아니, 그럼 적당히 끊으시지.”

“……그럼 지는 것 같잖습니까.”

“…….”

윤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이 양반도 이제 슬슬 맛이 가는 느낌이었다.

“죽겠다.”

“사고. 사고 똑바로 걸어야죠.”

“똑바로 걷고 있어.”

“사고! 그쪽 아니라 이쪽이에요. 아이참! 술 깨는 약을 드렸는데!”

소소야. 술 깨는 약은 대체 해남까지 왜 챙겨 왔니?

밖으로 나온 이들의 상태가 하나같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하기야 평소에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술을, 강행군을 펼친 몸에다 있는 대로 밀어 넣고 기절해 버렸는데 상태가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자, 잠깐만. 녹림왕은?”

“……못 일어났습니다. 회담실이 아니라 의약당으로 옮겨야 할 것 같던데요.”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상태라도 좀 봐야…….”

“아아.”

윤종이 임소병의 방 쪽으로 가려는 걸 남궁도위가 만류했다.

“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밥맛이 싹 달아나거든요.”

“…….”

“일단 폐는 안 끼쳐야 하니까 회담에서 돌아오는 대로 저 침구를 좀 빨아야 할 텐데.”

“…….”

윤종이 참담한 심정으로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래서야…….’

회의고 뭐고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럼 사숙께서는?”

“어, 그러게? 원래 늦으실 분이 아니…….”

바로 그때였다.

벌컥.

한쪽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백천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왔다.

촤락.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순백의 도포가 물결치듯 우아하게 흔들렸다.

티 한 점 묻지 않은 새하얀 도포와 완벽하게 정돈하여 빗어 넘긴 머리, 그 이마에 두른 하얀 영웅건이 분칠이라도 한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썩 잘 어울렸다.

다른 이들이야 반쯤 죽어 가든 말든, 백천의 모습은 평소와……. 아니, 평소보다도 몇 배는 더 정갈해 보였다.

저벅.

그린 듯한 걸음으로 복도에 나온 백천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모두를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나오셨습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진짜 병 아닙니까?”

“이쯤 되면 병이라도 인정해야지…….”

“저런 사람이어야 화산의 장문인이 되는 거죠.”

“……인정해.”

화산의 제자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문파의 문주들은 그 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사람인가…….”

특히나 남궁도위는 거의 치를 떨고 있었다. 분명 어제 백천이 마신 술이 그가 마신 것보다 많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저리 멀쩡한 신색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무공의 고하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객이자 특사로 타문의 장문을 뵙는 일입니다. 그러니 다들 몸가짐에 소홀함이 없…….”

말을 하던 백천이 말끝을 흐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눈빛이 쏟아지자 숙연한 반응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사숙.”

“잘생기지 못해 송구합니다.”

“미안.”

“저희는 나름 노력했어요.”

“쯧.”

백천은 사제들의 추레한 낯빛과 몰골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으로 혀를 찼다. 물론 내심으로야 억울했지만, 백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 밖으로 나오려던 불만도 목구멍 안으로 숨어 버렸다.

“청명이는?”

“글쎄요? 안 보이는데? 이놈이 술에 취해서 못 일어났을 리는 없고.”

“방에 없어?”

“없던데요?”

“그럼 어디…….”

백천이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가자꾸나.”

“청명이는요?”

“알아서 올 거다.”

백천이 앞에 있는 이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곳에 계신 분들 하나하나가 천우맹에 있는 모든 이들을 대표합니다.”

“…….”

“말 한마디를 하실 때도 한 번 더 고민하시고,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항상 유념하십시오.”

“……그거 모두한테 하시는 말씀 맞죠?”

“가시죠.”

“사숙? 아니, 그런데 말씀하실 때, 왜 눈을 저한테만 두시고……. 사숙?”

조걸의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한 백천이 복도를 걸었다. 남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내 그의 입에서도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짝 긴장이 어려 있었다.

화산의 장문대리가 되어 이행하는 첫 번째 임무다.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서 화산의 장문이자, 천우맹의 특사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는 굳은 얼굴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낄낄낄낄. 이 새끼 얼굴색 보소!”

“……아, 좀 가시라고.”

“그러게, 술도 못 먹는 게 뭐 한다고 객기를 부려서는…….”

“술을 못 먹는다니! 내 별명이 남해 술고랜데!”

“이 동네 고래는 뭐, 피라미만 한가 보지?”

“아니, 근데 진짜!”

“아이고오. 나는 내 입으로 한 판 붙자고 했다가 처발렸으면 혀 깨물고 죽었겠다. 잘도 고개 들고 나왔네.”

“지다니! 비긴 거요, 비긴 거!”

“기다리던 놈이 먼 길 온 놈이랑 붙어 비겼으면 사실상 진 거지.”

“끄으으응.”

곽환소의 시커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신나게 놀려먹던 청명은 인기척이 들리자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계단을 내려오는 백천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봐라. 우리 장문대리는 저렇게 멀쩡하시잖냐. 다 죽어 가는 누구랑은 다르게.”

“……진짜네.”

“우와. 저 양반 어제 나보다 더 먹었는데.”

“대사형. 인정하십시다. 이건 우리가 졌어요.”

“……우리 대사형도 좀 저렇게 생기지.”

“방금 마지막 누구야? 어떤 새끼야?”

아예 해남 제자들과 편을 먹고 곽환소를 골려 먹는 청명을 보며 백천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원래라면 이곳의 분위기는 더없이 심각했어야 한다. 해남의 미래와 천우맹의 미래가 결정되는 날이고, 이곳에 있는 제자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제 있었던 술자리와 이곳에 먼저 나타나 버린 청명의 너스레가 분위기를 한껏 풀어 버렸다.

백천의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빠졌다. 뭔가 말하려 살짝 입술을 뗐던 그는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청명아.”

“응?”

“……쪽팔리니까 이리 와라.”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제발 좀, 닥쳐.”

“거 사람 억울하게!”

백천이 턱짓하자 윤종과 조걸이 달려가 청명의 양팔을 움켜잡고 뒤쪽으로 연행해 갔다.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저 새끼가 시비는 먼저 걸었다니까? 왜 나한테만! 읍! 읍읍!”

당소소가 능숙하게 청명의 입에 천을 물리고 싸매 버리자 백천이 한숨을 푹 쉬고는 곽환소에게 포권 했다.

“죄송합니다. 그…… 익히 아시겠지만…… 애초에 그런 놈이라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말로 하려면 사흘도 부족하지요.”

거기까지 말한 백천이 묘한 눈으로 곽환소를 보다 말했다.

“한데, 낯빛이 나빠 보이십니다?”

“……원래 까만 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혹여 숙취라도?”

“아, 원래 까만 거라니까. 해남 사람은 햇빛 때문에 원래 까맣소!”

“아아, 그럼 다행입니다. 겨우 그 정도 드시고 건강을 해치셨나 싶어 놀랐는데. 역시 그럴 일은 없겠지요?”

“……가다가 엎어져라.”

“예?”

“아니, 아닙니다.”

백천이 빙그레 웃자 곽환소가 쿡쿡 웃더니 몸을 바로 하고 마주 포권 했다.

“해남의 대제자 곽환소입니다. 장문인께서 귀하들을 뵙고자 하시니, 저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씻은 듯 장난기를 지운 곽환소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해남의 제자들도 무사의 기운을 뿜으며 천우맹 주변을 호위했다.

“아직 태풍이 다 잦아들질 않아서 가는 길이 궂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면 무인이 아니지요. 괘념치 마십시오.”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곽환소가 씨익 웃었다.

“열어라.”

“예!”

전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백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여전히 태풍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해남의 제자들은 그 거센 비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걸어갈 길의 좌우로 도열해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말씀 마십시오.”

곽환소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봐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과시하고 위협하는 것도 아닙니다.”

“…….”

“지금부터 장문인과 나눌 대화의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누구도 찾아 주지 않은 이 해남까지 목숨을 걸고 와 주신 분들에게 우리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는 것뿐입니다.”

백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니 가시지요.”

곽환소가 비바람 속으로 앞서갔다. 백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참 전부터 서 있었는지 의복이 흠뻑 젖은 해남의 제자들이 장문청으로 향하는 천우맹의 일행들을 향해 일제히 검을 뽑아 치켜들며 말없이 예를 표했다.

들리는 건 빗소리뿐이다. 우렁찬 함성 하나 없는 침묵의 예.

그 예를 받으며 걷는 천우맹 일행의 눈에 고풍스레 선 전각과 그 앞에 나와 그들을 맞이하는 금양백의 모습이 들어왔다.

백천은 손바닥에 고여든 빗물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