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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40화 (1,241/1,567)

1240화. 누가 왔다고? (5)

쪼르르륵.

잔에 술이 가득 채워진다.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채워진 잔을 바라보는 유공의 귀에 취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마셔?”

“⋯⋯.”

유공이 고개를 들어 히죽 웃고 있는 청명을 일별하고는 손에 들린 잔을 입가로 가져가 단숨에 들이켰다.

“오. 잘 먹는데? 좋아.”

목을 태우는 듯한 화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유공은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잔에 담긴 술을 모조리 목으로 넘겼다.

탁.

그리고는 깨끗하게 비워진 잔을 내려놓는다.

“자, 한 잔 더 마셔야지.”

청명이 낄낄 웃어 대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유공은 술을 따르는 청명을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술이 가득 찬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린 유공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놀랐습니다.”

“응?”

청명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유공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본디 저희 해남인들은 육지인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흐음?”

“물론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조금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요. 해남은 명실상부한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문파니까요.”

“⋯⋯.”

“하지만 아무리 해남의 명성이 높아졌다고 한들, 천한 섬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그 역사가 덮이는 것은 아닙니다.”

청명이 말없이 유공을 바라본다.

“거기에⋯⋯. 장강불침의 조약이 벌어지며 그 감정은 더욱 심해졌죠.”

유공이 피식 웃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내심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섬사람이 아니라 중원인이었다면, 강남불침으로 고립된 문파가 해남이 아닌 다른 구파일방이었다면, 정말 이토록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유공이 슬쩍 고개를 돌려 널브러져 있는 이들을 본다.

“그렇듯 육지인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오늘 도착한 외인들과 뒤섞여 술을 퍼먹다가 모두 저리 뻗어 버렸군요.”

“⋯⋯.”

“화산이 속가적인 성향이 강한 문파이긴 하지만, 따져 보면 저 무당보다 오히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정통 도관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런 도술을 부리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유공의 눈빛이 탐색하듯 청명을 살핀다.

“아니⋯⋯.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묻고 싶은데, 화산의 도술이 고매한 것입니까? 아니면 화산검협의 용인술이 대단한 것입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유공도 최대한 그 웃음과 맞춰 미소를 지으려 했다.

다음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이.”

“예?”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마셔. 세 잔이야. 이제 한 잔 마셨잖아.”

“⋯⋯.”

“마셔.”

유공이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손에 든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이전의 잔과 마찬가지로 가득 찬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내공 쓰다 걸리면 아까운 술값 뱉어 내게 할 테니까 알아서 해.”

“⋯⋯.”

“자, 한 잔 더.”

청명이 히죽히죽 웃으며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차오르는 술을 본 유공의 낯빛이 살짝 질렸다.

기세에서 밀리기 싫어서 들이켜 대고는 있지만, 원래 해남의 술은 이런 잔에 따라 마시는 탁주가 아니라 작은 잔에 따라 조심스레 마셔야 하는 독주였다.

아무리 그가 무인이라지만, 내공도 쓰지 못하는 와중에 이런 독주를 연거푸 마셔 대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

“⋯⋯예?”

“그럼 마셔. 세 잔 마시고 나면 상대해 주지.”

“⋯⋯.”

그 말을 들은 유공이 살짝 얼굴을 굳히고 청명을 바라보다 세 번째 잔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오. 잘 마시는데?”

벌컥! 벌컥!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참아 내고 술을 억지로 마저 밀어 넣은 유공이 잔을 던지듯 입에서 떼어 낸다.

“큭!”

비명 같은 탄성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입을 열 때마다 입안에서 독한 주향이 격하게 흘러나오고, 뱃속은 용암을 삼킨 것처럼 뜨거웠다. 전신의 피가 달아올라 두 배는 더 빠르게 도는 느낌이다.

“좋네.”

청명이 피식 웃고는 제 잔에 술을 콸콸 따른다. 그러고는 술이 다 차오르기 무섭게 잔을 낚아채 벌컥벌컥 마셔 댔다.

“크으으으으!”

타악!

잔이라기보다는 사발로 불러야 할 술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놓였다.

소매로 입가를 쓱 훔친 청명이 급격하게 밀려오는 취기를 다스리고 있던 유공을 보며 말한다.

“그래서.”

“예?”

“뭐가 궁금하다고 하셨더라?”

“그게⋯⋯. 어⋯⋯.”

유공이 순간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히죽 웃는다.

“생각 날 리가 없겠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걸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은 걸 테니까.”

유공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혹감을 어쩔 수 없기 때문인지.

“그래도 대답은 해 드리지. 난 딱히 한 게 없어.”

청명이 고개를 돌려 널브러진 이들을 바라본다.

“그냥 술을 가져오라고 하고, 내가 술을 마셨을 뿐이야. 남은 놈들은 알아서 그냥 저들이 퍼먹어 대다 저렇게 된 거고.”

“⋯⋯.”

유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해남의 제자들이 단순한 면이 있고, 나아가 그걸 나름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도착한 객 앞에서 저런 추태를 보일 만큼 멍청한 이들은 아닙니다. 보나 마나 화산검협께서 뭔가를 하신 거겠지요.”

“근데 이 양반은 속고만 살았나. 나는 한 게 없다니까 그러네.”

“네. 그럴 수도 있겠죠.”

유공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따져 보면 그게 더 대단한 것이지요. 본인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주변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달라졌다는⋯⋯.”

“어이.”

제 말을 끊어 내는 청명의 목소리에 유공이 살짝 눈을 찌푸린다.

“나는 잔 비웠어. 한 잔 더 하지?”

“⋯⋯저는 그만⋯⋯.”

“왜? 취해서 하면 안 될 말이라도 있어?”

“⋯⋯.”

“마셔.”

청명이 다시 유공의 잔에 술을 따른다.

유공이 복잡한 얼굴로 청명과 술잔을 번갈아 바라본다. 잔에 술을 다 채운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뭐. 오해는 하지 마. 나는 술 먹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먹이는 걸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아까운 술을 왜 싫다는 놈한테 먹여. 나 먹을 것도 부족한데.”

“그럼⋯⋯.”

“술 안 먹는 건 자유. 그런데 안 먹을 거면 비켜 줬으면 좋겠네. 나는 여기서 대작을 하는 거지,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니까.”

“⋯⋯.”

“어쩔래? 원하는 게 대작이야? 아니면 대화야?”

그 말에 유공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술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청명이 씨익 웃는다.

“그래도 말은 좀 통하네.”

“크.”

유공이 잔을 내려놓는다.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길이 살짝 떨려 왔다. 얼굴이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불이 날 것 같다.

“어허. 내공 쓰지 말라니까. 술 아깝게.”

청명이 끌끌 혀를 차고는 제 잔에 술을 가득 따라 꼴꼴 마셔 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순배의 술이 돌자 청명이 대화를 이어 갔다.

“내가 대단해?”

청명이 피식 웃는다.

“이해를 못 하네. 나는 정말 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럼.”

“이건 내가 대단해서 벌어진 광경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예?”

청명이 턱짓으로 쓰러진 이들을 가리킨다.

“어때 보여?”

“⋯⋯추해 보입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적어도 저건 객을 받은 이가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다.

해남을 떠날 그에게 비난할 자격은 없을지라도, 평은 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

청명이 피식 웃으며 제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유공과는 반대되는 평을 내놓았다.

“내 눈에는 대단해 보인다.”

“⋯⋯.”

유공이 입을 다물었다. 취기가 올라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명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말한 대로, 얘들이 아무리 어리고 단순하다고 해도 오늘 해남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 앞에서 술에 취해 쓰러질 만큼 생각 없는 놈들은 아니었겠지.”

유공이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그런 것 같아? 내가 능수능란하게 잘 긁어 줘서?”

“⋯⋯.”

“아니야. 나는 정말 한 게 없어. 그냥 모두가 이미 몰릴 대로 몰려 있었던 거지. 당장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을 한계까지 꾹꾹 눌러 가며 버텨 온 거야. 당장 내일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압박 속에서.”

술에 곯아떨어진 이들을 바라보는 청명의 눈이 가라앉았다.

쓰러진 이들의 모습에 그가 아는 광경들이 겹쳐졌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면 과할 정도로 술을 찾아 대고,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던 이들.

오늘 죽어 간 이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죄악감과 안도감,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또 전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공포감에 어떻게든 제 의식을 끊어 놓기 위해 발작적으로 술을 들이켜던 이들의 모습이 말이다.

그래. 그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들은 적어도 자신을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과거 그가 아는 이들에 비해서 아직은 너무 어리다.

그러니.

“여기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거야.”

“⋯⋯.”

“버티고 버티는 이를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작디작은 안도감이야. 더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늘 밤만은, 적어도 몇 시진 만은 안전할지도 모르겠다는 하찮은 안도감.”

“⋯⋯.”

“내가 저들에게 준 건 그게 전부야.”

유공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가 이내 고개를 숙인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공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버틴 게 아닙니다.”

“응?”

“달아날 곳이 없었을 뿐이죠. 세상 어디에도.”

청명이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그래. 그거.”

알지.

지독하게 알고 있지.

“그러니까 내버려 둬. 사람이란 건 때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내일 일어나면 머리를 싸매고 후회하겠지만, 때로는 그게 내일을 버틸 힘이 되어 주기도 하거든.”

유공의 눈길이 곯아떨어진 곽환소의 얼굴로 향한다. 최근 들어 언제나 바위처럼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간만에 조금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청명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한 답과 목표 같은 것보다, 그저 오늘 하루 생각 없이 잠들 수 있는 여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저들은 그럴 수 있지만, 그는⋯⋯.

“마셔.”

청명이 유공의 얼굴 앞에 술잔을 불쑥 내민다.

“⋯⋯.”

유공이 술잔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네가 무슨 입장이건, 무슨 사연이 있건.”

“⋯⋯.”

“당장 내일부터 아군이 될지, 아니면 적이 될지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어쨌건 너도 저들처럼 지금까지 버텨 온 건 마찬가지야.”

“⋯⋯.”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보니, 내일 아침이 되면 하고 싶은 말이라고 다 할 순 없겠지. 그러니 미리 말해 두지.”

청명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담는다. 그리고는 유공을 보며 조금은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잘 버텼다. 애송아.”

“⋯⋯.”

유공의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지독하게도 건방진 말이다. 그리고 지독하게도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유공은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마셔. 그리고 기절해. 뒷감당 같은 건, 내일부터 해도 충분하니까.”

유공이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안 마셔?”

“⋯⋯.”

살짝 떨리는 손이 술잔을 받아든다. 두 손으로 술을 받은 유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잔에 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좋네.”

청명이 제 잔에 천천히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유공과 대작하듯 술을 입가에 가져갔다.

지금까지의 술은 이들을 위한 것, 하지만 지금 이 술만은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다.

‘모두.’

아무렇지 않은 듯 스쳐 지나온 십만대산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다.

‘너무 나무라지 마라. 언젠가는 나도 갈 테니까.’

독한 술이 목으로 넘어간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과거의 기억이 청명이 억지로 삼켜 낸 술에 씻겨 저 깊은 곳으로 침전해 들어간다.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주향만은 사라지지 않고 청명의 주위를 맴돌았다.

오랜 과거의 그 날들처럼.

- 2022.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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