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39화 (1,240/1,567)

1239화. 누가 왔다고? (4)

“어떻게 합니까, 사형?”

“…….”

“사형.”

고홍이 절박한 눈으로 유공을 바라보았다.

“⋯⋯지원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침몰하는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

“그런데 갑자기 저리 사람이 와 버리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는 유공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고홍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 정말 저들이 지원으로 사패련을 막아 내기라도 한다면, 저희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유공이 눈을 부라렸다.

“사패련이 어디 뉘 집 개 이름이더냐? 사람 몇이 왔다고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저들도 생각이 있을 테고, 아무 대책 없이 이리 해남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게다가 천우맹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구파일방마저 위협한다는 소문이 해남까지 전해지는 판인데⋯⋯.”

“쓸데없는 소리.”

유공은 고홍의 우려 섞인 말을 대번에 잘라 버렸다.

“구파일방을 위협한다 해서,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냐? 이곳은 해남도다. 저 소림조차도 닿지 않는 땅이라는 말이야. 그런데 천우맹이 대체 뭘 할 수 있겠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신경 쓸 것 없다. 그래 봐야 그냥 얼굴이나 비추고 돌아가는 수준일 테니까.”

“굳이 그런 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까요?”

“안 한 것보다야 배는 낫겠지.”

“하긴⋯⋯.”

유공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상황이 더럽게 되었네.’

시기가 너무도 공교로웠다. 만일 저들이 딱 하루만 일찍 도달했다면, 상황을 보고 결정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풍이 잦아든 다음 도착했다면 미리 파문하여 발을 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발이 묶인 와중에 도착해 버린 바람에, 누구도 원치 않았던 불편한 동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왜 하필 지금이냐.’

파문제자들은 그렇잖아도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제 발로 문파를 떠나겠다고 하는 와중에, 이역만리에서 해남을 찾아온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자연히 파문식을 요구한 제자들을 바라보는 눈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지금까지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들조차도 냉랭한 시선을 던져 왔다.

하기야 왜 안 그렇겠는가?

당장 유공만 해도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손가락질하며 비난했을 것이다. 타문 의 사람들도 의리를 아는데, 해남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그 은혜를 모른다고 짐승 같은 것들이라 욕지거리를 퍼부었을 터.

“그, 사형⋯⋯.”

“왜.”

“정말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 말입니다.”

고홍이 살짝 겁을 먹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만약에 해남이⋯⋯. 아니, 본문이 저들의 지원을 받아 사패련을 막아 내는 사태가 만에 하나라도 벌어진다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말에는 유공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찌 되냐고? 그게 어디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던가?

그런 일이 벌어지는 순간, 파문을 요청했던 제자들은 모두가 배신자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다. 사패련을 막아 내고 입지가 한껏 치솟은 해남에서 대놓고 배척당할 것이다.

해남파에서 배척된다는 건 이 해남도에 발붙이고 살아가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 해남도 내에서의 해남파는 저 사천에서의 당가나 안휘에서의 남궁세가 이상의 입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형. 차라리 지금이라도 파문을 취소하는 게 어떻⋯⋯.”

“멍청한 소리 작작 해라!”

유공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깟 놈들 몇 왔다고 저 사패련을 어찌 막아 낸단 말이냐!”

“⋯⋯.”

“이런 상황에서는 저들이 아니라, 백 년 전 마교도들을 막아 냈다는 척마오걸이 직접 와도 사패련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리고! 파문을 취소하면? 뭐라도 달라질 것 같으냐? 이미 강을 건넌 것이다. 그래 봐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배알 없는 놈 취급이나 당할 뿐이겠지.”

고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그도 알고는 있다. 지금에 와 입장을 바꾼다 해도 그들에게 새겨진 낙인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문파를 떠나겠다는 말을 한번 입에 올린 이상, 그들은 두 번 다시 진정한 해남의 문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

“⋯⋯.”

“예정대로 태풍이 그치면 파문식을 거행하고 하산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남은 생은 해남 같은 건 잊고 살아야지.”

고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유공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홍.”

“⋯⋯예, 사형.”

“집에 계신 노모를 생각하거라. 안 그래도 병약한 분이신데, 네가 비명횡사라도 하면 어찌 사시겠느냐?”

“⋯⋯예.”

“나는 몰라도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본산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낳아 주신 부모만큼 중요하겠느냐?”

“사형도 아이가 있잖습니까?”

“⋯⋯나는 그저 무서운 거지.”

유공이 쓰게 웃었다.

“내가 아비 없이 자라서 그런지, 내 자식이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고 자라는 게 무섭더구나.”

“사형⋯⋯.”

유공은 고개를 돌려 몰아치는 비바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해남은 태풍을 자주 겪는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풍에 익숙한 곳은 아니다. 겪고 또 겪어도 두려운 게 태풍이다. 급작스러운 남해의 태풍은 잔잔한 바다를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지옥 같은 바다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앗아 갔는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 자식만은 번듯하게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게끔은 안 하고 싶었지.”

“이해합니다. 아니, 다들 이해할 겁니다.”

“⋯⋯이해는 무슨.”

유공이 피식 웃었다.

“그저 핑계에 불과한 거지. 그저 나는 죽을 용기가 없는 거란다.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 죽는 건 다 무서운 거지.”

“⋯⋯.”

“그러니 떠날 거라면 미련 남기지 말자꾸나.”

“예, 사형.”

고홍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유공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다. 특히나 마음에 걸리는 건 고홍이 던진 질문이었다.

정말 해남이 기적적으로 사패련을 막아 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곽환소?

아니, 대사형은 절대 보복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워낙 화가 많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만큼 대범한 양반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위기에 처한 문파를 버리고 저 살자고 도망간 이들이 이 해남 땅에서 고개 들고 살아가는 걸 용납할까? 아무리 곽환소가 저지한다 해도 어떻게든 눈치를 주지 않을까?

자신에게 쏟아질 핍박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아니,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의 자식이 두고두고 받을 설움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슬슬 마음이 불안해진 유공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외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더냐?”

“우선은 객청에 짐을 푼 모양입니다. 지금 시간이 워낙 늦지 않았습니까? 장문인과의 공식적인 회담은 내일 아침에나 하겠지요.”

“그래?”

유공은 잠시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보자.”

“⋯⋯예?”

“왜 왔는지 살펴라도 봐야지. 여기 우리끼리 있어 봐야 속만 끓일 게 아니냐.”

“하, 하지만 사형. 거기엔 다른 이들도⋯⋯.”

“어차피 팔린 낯짝이다. 그렇다고 태풍이 그칠 때까지 방 안에서 숨어 지내기라도 할 것이냐?”

“⋯⋯.”

“가 보자.”

“예.”

유공이 문을 열어젖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이 없는 놈들이라고 해도, 지금 해남의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테니 당장 뭔가 해 보려 들진 않겠지. 그럼 분명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점잔을 빼고 있을 것이다.’

유공이 생각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만일 저 방문객들의 의도가 그의 예상대로라면, 저들 역시 해남이 멸문한 뒤에도 천우맹의 호의에 대해 증언해 줄 이가 필요할 터.

‘잘하면 손을 잡을 수도 있겠어.’

굳은 결심을 한 유공이 거침없이 발을 뗐다.

“⋯⋯사형.”

“⋯⋯.”

“저기, 사형?”

유공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객청만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상식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하핫!”

호쾌하게 술을 들이켠 이가 쾅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뭐야! 여기는 술을 뭐 물로 담그나? 밍밍하네! 밍밍해!”

“⋯⋯청명아. 술은 원래 물로 담근다.”

“아, 그래?”

사람이 마구 널브러져 있다. 그들 중에서는 유공이 처음 보는 이도 있었고, 유공이 잘 아는 이도 있었다.그러니까⋯⋯.

“끄으으으⋯⋯. 죽⋯는⋯⋯.”

‘저놈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그를 가장 충격에 빠트린 것은 평소 워낙 성격이 날카로운 탓에 곽환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거리를 두는 이자양이 거의 인사불성으로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해남을 방문한 외인들은 물론이고, 해남의 제자들까지도 다들 인사불성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처참하게 속이 비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동이들만 봐도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술을 마셨다고?”

아니, 술이야 먹을 수 있다. 객이 방문하면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니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손님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쉬어야 할 객청에서 왜 해남의 제자들이 굴러다니고 있냐는 것이다.

“허여멀⋯건 놈이⋯⋯ 술은 좀⋯⋯ 하네⋯⋯.”

“꼬인 혀⋯⋯나 풀고 말⋯하시지.”

그리고 그렇게 인사불성으로 굴러다니는 놈들 중간에선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휘청거리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잔을 잡고 있었다.

“⋯⋯대사형?”

“저, 저 사람 전에 소림에서 봤던 화산의 장문제자 같은데요? 둘이 왜⋯⋯.”

곽환소와 백천, 두 사람이 풀린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술잔을 뚫어지게 봤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저, 저거⋯⋯. 저⋯⋯.”

대접만 한 술잔에 담긴 술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내던지듯 떨어뜨렸다.

“⋯⋯내가.”

“이겼⋯⋯.”

쿵!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이 옆으로 쓰러졌다.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끙끙대는 소리까지 괴이한 불협화음을 이루며 객청 안을 메웠다.

‘이게 대체 뭔 일이냐?’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날카로웠던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리 풀려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처음 해남을 방문한 객들과 어울려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 지경까지 되었을지 유공이 어떻게든 추측을 해 보려던 그때였다.

“뭐야? 다 뻗었어? 애들이 뭔 술이 이렇게 약해. 쯧!”

벽에 기대앉아 술을 홀짝이던 누군가가 풀린 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오.”

그러더니 문 앞에 서 있는 유공과 고홍을 발견하고는 히죽 웃었다.

“너희도 한잔할래?”

유공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때 고홍이 재빠르게 속삭였다.

“사형. 화, 화산검협입니다. 제가 똑똑히 기억합니다.”

“⋯⋯화산검협?”

저놈이?

“점잔빼지 말고 와서 한잔해. 대작할 사람 없어 적적하니까. 손님 대접은 해야지?”

“⋯⋯.”

“사형⋯⋯?”

안색을 굳힌 유공이 안으로 들어가 화산검협의 앞에 마주 앉았다.

“유공입니다.”

“청명.”

청명이 히죽 웃으며 술동이를 들었다.

“늦게 왔으니 일단 세 잔 받고 시작하자고.”

유공이 말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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