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8화 누가 왔다고(3)
“누가 왔다고?”
“화산이라잖습니까, 화산! 천우맹이 왔다니까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렇게 태풍이 몰아치는데?”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지금 객청에 와 있습니다! 속고만 살았습니까?”
“⋯⋯세상에.”
말을 들은 이가 손을 뻗어 창을 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가공한 속도로 몰아치는 비바람에 나무가 부러질 듯 휘청이고 있었다. 벌써 뿌리째 뽑혀 굴러다니는 나무도 몇 그루 보였다.
‘이걸 뚫고?’
바다고 나발이고, 이만한 태풍이면 산을 오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해의 바다에서 마주하는 태풍은 육지에서 맞는 태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태풍이 몰아치는 와중에 남해에 익숙하지도 않은 이들이⋯⋯.
“누, 누가 왔다더냐?”
“놀라지 마십시오! 오검이 직접 왔답니다, 오검이!”
“오검? 설마 화산오검?”
“예! 그 화산오검이요!”
“⋯⋯허허.”
화산오검이라는 말은 해남파의 제자들에게 굉장히 여러 가지 느낌을 준다.
‘그때 그들이구나.’
소림에서 열린 천하제일비무대회. 그곳에서 해남의 제자들은 화산의 제자들과 시비가 붙어 서로 주먹질을 해 댔다.
당시에는 소림의 중재로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화산오검의 등장을 천하에 알린 이들이 바로 해남파였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화산오검이라는 말을 듣는 해남의 제자들은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던 이들이 불과 몇 년 만에 후기지수 대표로 떠오르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이뤄내어 천하의 모든 명성을 휩쓸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 그럼 잠시만! 화산검협도 온 것이냐?”
“그렇답니다!”
“⋯⋯진짜구나. 진짜 왔어.”
말을 듣던 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산검협. 그 별호는 이제 화산을 넘어 천우맹의 상징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 그가 직접 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야 객청에⋯⋯. 사, 사형! 어디 가십니까? 사형!”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같이 갑시다! 사형! 아, 사형!”
천우맹의 특사가 해남에 당도했다는 소식은 강풍보다 빠르게 해남 내부로 퍼져 나갔다. 누군가는 그 사실에 당황했고, 또 누구는 감격했으며, 성질 급한 몇몇은 앞뒤 제쳐 놓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모든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천우맹의 일행들은⋯⋯.
“밥! 밥 좀 더 주십시오!”
“이야. 해남 닭도 맛있네.”
“그거 닭 아닙니다, 사형.”
“어째 여긴 밥알이 좀 길쭉하다?”
“모양이야 뭐 어떻습니까? 맛만 있으면 됐지!”
태풍으로 고립된 해남파의 식량 창고를 가공할 속도로 거덜 내는 중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패련의 특명을 받고 해남의 물자를 소진시키기 위해 파견된 이들로 착각할 만큼.
해남의 주방 숙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식탁을 망연히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먼 곳에서 해남을 방문한 이들을 위해 산해진미를 준비했겠으나, 느닷없이 객을 받은 해남에 그만한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급하게 내어놓은 음식이라 입에 맞지 않을까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보고 있으니 뭐랄까⋯⋯.
‘산해진미라는 게 의미가 있기나 했을까?’
그냥 씹어서 삼킬 수 있는 거면 다 쑤셔 넣는 수준인데⋯⋯ 저 입에 귀한 음식을 넣는 건 좀 낭비가 아닐⋯⋯.
“밥 더 없습니까?”
“⋯⋯방금 한 솥을 드셨는데.”
“없어요?”
“드, 드리겠습니다. 밥! 밥을 더 내오거라, 어서! 다른 음식들도 더 준비하고!”
숙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주방으로 도로 달려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남의 곳간을 힘껏 축낸 천우맹 일행들은 마침내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의자에 늘어졌다.
“⋯⋯살 것 같다.”
“그러게요.”
남궁도위는 불룩 솟아오른 제 배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말해, 한때는 그도 걸신들린 것처럼 밥을 퍼먹어 대는 화산 사람들을 보면서 참 교양도 없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교양이 없는 게 아니었어.’
살려면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저 화산검협이 시키는 수련과 그가 벌이는 일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 보면 아무리 내력을 수련해도 살이 쪽쪽 빠진다.
만일 남궁도위가 평소와 같은 식사량을 유지했다면 지금쯤은 피골이 상접하여 목내이 꼴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미친 듯이 먹어 젖히니 그나마 이 몸이라도 유지하는 것이다.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어쩌면 이미 죽은 게 아닐까요? 우리는 벌써 죽어서 바다 깊이 가라앉았고, 이건 그냥 꿈 같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라.”
당패가 얼굴을 구기며 핀잔했다.
남궁도위 저놈은 왜 날이 갈수록 이상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에는 좀 재수 없는 면이 있어도 진중한 사람이었는데.
“⋯⋯진짜 죽음 목전까지 다녀와서 그럽니다.”
“그건 공감한다.”
당패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채만 한 파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직 오금이 저렸다.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용케도.’
그들이 태풍을 맞이한 곳은 망망대해의 한복판이었다. 아무리 단련된 무인이라고 해도 웬만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야 정상이다.
임소병이 깊게 잠수하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중간쯤에 체력이 소진되어 무슨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결과가 좋으니 망정이지.”
“좋아요?”
“……결과가 최악은 아니니 망정이지.”
남궁도위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
물속으로 들어간 순간 알게 되었다. 수면에서는 그렇게 강렬하게 몰아치던 해류가 내부에선 순간 거짓말처럼 잔잔해진다는 것을.
물론 깊이 잠수하여 헤엄을 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중간중간 숨을 쉬기 위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긴 해야 했지만, 물 밖에서 헤엄을 치는 것에는 감히 비할 수도 없었다.
“근데 이 새끼가 어디 귀한 약재를!”
그 순간 청명이 약사발을 들고 있는 임소병을 걷어찼다. 임소병은 철푸덕 엎어지면서도 약사발을 어떻게든 지켜 내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쪽쪽 빨아 댔다.
“이리 안 내놔? 어디 사파 새끼가 귀한 약재를 낭비하고 있어!”
“아이참, 사형! 그러다 진짜 죽는다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너는 당가 출신이라는 게 사파 새끼한테 독은 못 쓸망정 약을 쓰고 있어? 저 비싼 걸?”
“⋯⋯사람은 살려야지. 그래도 내가 의원인데.”
남궁도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명도 임소병도 참⋯⋯ 여러모로 한결같았다. 그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당패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남궁도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정신이 없어 미처 몰랐는데, 어느새 제법 많은 인원이 창가에 붙어 기웃대고 있었다. 밖에 비바람이 저리 몰아치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눈에 어린 묘한 기대와 불안이 보였다. 남궁도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남파 문도들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사패련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압박 속에서 몇 년을 버텼으니.”
“그럼 조금 더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도 한 가지를 잊어버리고는 하는구나.”
“예?”
“해남을 완전히 배제하고 지금까지 내버려 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남궁도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물론 우리야 그건 구파일방의 역할이었다고 책임을 미룰 수 있겠지만, 저들은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겠지.”
남궁도위는 특히 이 말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남궁황이 죽고 그가 남궁세가의 적을 천우맹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남궁세가 역시 오대세가라는 이름하에, 구파일방과 함께 행동하던 입장이었으니까.
그 삼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해남을 외면했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건데.’
그러니 이곳에 그들은 구원자로 온 것이 아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외면했던 것을 사과하고, 이제라도 저들에게 천우맹이 바로 섰음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왔으니 당연히 좋은 뜻으로 받아 주어야 한다는 건 손을 내미는 이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에 우선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를 되돌아봐야지.”
그 말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겸손한 자세로 다가서야겠군.’
그게 해남을 푸는 열쇠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휘이이잉!
객청의 문이 활짝 열리며 맹렬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곽환소가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 저벅.
일직선으로 그들이 있는 식탁까지 다가온 곽환소는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 객들을 모심에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 지시하셨습니다. 혹여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어? 기억났다!”
바로 그때, 청명이 곽환소를 가리켰다.
“쟤 걔잖아, 사형! 걔!”
청명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좌우로 흔들리며 윤종이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
“아, 그때! 사숙한테 얻어맞은 놈. 소림에서!”
“아! 그때?”
“그래! 사숙한테 죽빵 맞고 울었던⋯⋯.”
“누가 울었어, 누가!”
곽환소가 버럭 고함을 쳤다. 맞긴 했지만 울진 않았다! 비록 한 방에 의식을 잃기는 했었지만!
“이야. 여기서 이렇게 보니 반갑네.”
“⋯⋯.”
“그런데 여기 그 손님 대접이 영 시원찮은데?”
“예?”
청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남해에서는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모양이지? 어떻게 술 한 병을 안 내올 수가 있어?”
곽환소가 피식 웃었다.
“아, 술 말씀이시군요. 물론 남해에도 좋은 술은 있습니다. 하지만 남해의 술은 워낙에 독주다 보니, 피곤하신 여러분께는 좀 과한 것 같아⋯⋯.”
“너희한테나 독주겠지.”
“⋯⋯.”
“사숙한테 한 대 맞고 기절하는 비리비리한 애들이 마시는 술인데, 뭐.”
곽환소의 뺨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말씀드렸지만, 남해의 술은 독합니다. 그리고 남해의 남자들은⋯⋯.”
“약골?”
“⋯⋯.”
그 순간 곽환소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빠드득 흘러나왔다.
“⋯⋯자양.”
“예, 사형.”
“가서 술 가져와라.”
“⋯⋯예?”
“있는 것 다 가져와. 당장!”
불호령에 해남의 제자들 몇이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더니 이내 커다란 술동이들을 지고 돌아왔다.
사람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술동이가 순식간에 객청에 들어찼다. 눈으로 대충 훑어만 봐도 열 개는 족히 넘어 보였다.
투둑.
곽환소는 술동이를 봉인하고 있던 천을 끌렀다. 그러자 독한 주향이 객청 가득 퍼져 나갔다.
“원하시는 대로 술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향만 느껴 봐도 아시겠지만, 이건 꽤 독한 술입니다. 그러니 괜히⋯⋯.”
“사숙, 향이 독해?”
“향긋하네.”
“거, 촌놈들이라 그런가. 허세가 좀 심하네.”
곽환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럼 술 잘 먹는 우리나 마실 테니까 술도 못 먹는 양반들은 가 보쇼. 잘 먹겠슴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곽환소가 술동이를 움켜잡고 콱 들어 올렸다. 당장에라도 집어 던져 버리겠다는 듯.
“사형!”
“사, 사형! 안 됩니다!”
쿠웅!
하지만 그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백천의 앞에 그걸 쾅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마주 보고 털썩 앉았다.
“⋯⋯먼 길 오신 객들이니 당연히 대작을 해 드리는 게 예의겠죠.”
“오?”
백천이 의미심장하게 히죽 웃으며 곽환소를 바라보았다. 곽환소가 입술을 뒤틀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이군요. 반반하고 허여멀건 낯짝을 지녔다 해도 술에 맛이 가 소변이라도 지리면 평생 따라다닐 추억이 될 텐데.”
백천은 그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래 봐야 한 대 맞아 거품 물고 뻗은 것보다 추하기야 하겠습니까?“
"뭐?”
“왜?”
두 사람의 눈에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붙어 볼 용의는 있고?”
“그때 겪고도 아직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화산은 시비를 먼저 거는 일은 없으나 걸어오는 싸움은 결코 피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뒤에서 수군댔다.
“시비를 안 거나?”
“걸 수 있는 데는 다 걸고 다니지 않나?”
“사숙도 거의 거짓말이 숨 쉬듯 나오네요. 황궁에 진출하셔도 될 듯.”
“양심이 없나?”
백천은 뒤에서 수군대는 놈들을 한번 죽일 듯 쏘아본 후 다시 곽환소와 눈을 마주쳤다.
곽환소가 얼굴을 씰룩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실 텐데?”
“후회?”
우둑. 우둑.
목을 좌우로 대차게 꺾은 백천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후회하게 해 보시든가.”
“저기요, 장문대리님?”
“체통 좀⋯⋯.”
“⋯⋯뭐, 내버려 둡시다. 벌써 눈 돌아간 것 같은데. 저러면 못 말려요. 이미 텄어.”
주위에서 누가 뭐라고 하건 오직 서로만 노려보던 둘은 동시에 사발을 턱 움켜잡았다.
“먼저 뻗는 놈이!”
“잘못한 거다!”
커다란 두 개의 술잔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맞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