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7화 누가 왔다고 (2)
“갈아입을 옷!”
“아니, 나는 씻을 물부터!”
“아니! 다 필요 없고 비 안 맞는 잘 곳! 처마만 있으면 어디든지!”
“밥.”
“사고, 아까 먹었잖아요.”
“밥!”
“⋯⋯.”
곽환소는 닦달을 해 대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가운 비가 얼굴을 연신 때리고 몰아치는 강풍이 몸을 밀어 내는 와중에도 그저 멍하기만 했다.
‘대체 이 인간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아니, 아니지.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지.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눈물을 쏙 뺄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야 하는데⋯⋯.
몰아치는 태풍을 헤치고, 백척간두에 몰린 해남을 찾아온 이들인데⋯⋯.
“아, 뭘 구경만 하고 있어!”
“하여튼 누가 따뜻한 남쪽에 사는 인간 아니랄까 봐! 느려 터져 가지고는!”
“와, 손님이 비를 쫄딱 맞고 있는데!”
“여기가 화산이었으면 벌써 한 놈 죽빵 날아갔다!”
그런데 이 새끼들은 왜 이러는 걸까?
그냥 주둥이만 좀 다물고 있어도 비장함이나 거룩함, 뭐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길 것 같은데 왜 굳이 저렇게 악을 써 대서 그걸 다 날려 먹냐고⋯⋯. 왜⋯⋯.
“아니! 계속 기다려야 됩니까!”
무엇보다 곽환소를 가장 황망하게 하는 것은 지금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떼어 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인간이 화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거⋯⋯ 남궁도위 맞지?’
아무리 해남에 산다고는 하지만, 단악검(斷岳劍) 남궁도위를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비무대회에서 마주쳤던 그의 헌앙한 자태는 곽환소에게도 강렬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가 화산검협에게 고간을 얻어맞기 전까지는 말이지.’
어쨌든, 그때 봤던 남궁도위는 말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명문의 자제였는데⋯⋯.
“⋯⋯여기는 손님이 십 년에 한 번 찾아옵니까? 안내하는 법을 몰라요? 예?”
“도위야, 일단 진정 좀 해라.”
“아니, 형님! 이 양반들이⋯⋯.”
하지만 다행히 곽환소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곧 해남의 장문인 금양백이 몰아치는 비바람을 헤치며, 말 그대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왔기 때문이다.
맹세컨대 곽환소는 장문인이 그렇게 빨리 달리는 걸 난생처음 보았다.
“화, 화산에서 왔다고 하셨소?”
급격하게 멈춰 선(빗물에 반쯤 미끄러질 뻔하긴 했지만) 금양백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산문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곽환소는 곧 자신과 같은 황망함에 빠져들 금양백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순간.
“혹 해남의 장문인 되시는지 여쭈어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쏜살같이 의관을 정제한 백천이 말끔해진 모습으로 금양백을 향해 정중히 포권 했다. 금양백이 황급히 화답했다.
“내, 내 정신 좀 보게. 내, 내가 해남의 장문인 금양백이오!”
“화산의 백천입니다. 미력하나 현재 화산 장문인의 의사를 대리하는 장문대리의 직에 올라 있습니다.”
빼고 더할 것도 없는 완벽한, 말 그대로 그린 것 같은 포권이었다. 그의 뒤쪽에서 온갖 짜증을 부리던 것들도 어느새 말끔히 의복을 고쳐 입고는 더없이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저, 저⋯⋯.”
순간 넋이 나간 곽환소가 손가락질을 했다. ‘패악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처음부터 이랬습니다만?’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들을 보니 속에서 일순 천불이 치밀었다.
“저, 저 사기꾼 같⋯⋯.”
그 순간 금양백이 곽환소를 획 돌아보며 엄히 일갈했다.
“이놈! 해남까지 방문해 주신 객들을 앞에 두고 그 무슨 망발이더냐! 바람에 정신이 날아가 버리기라도 했단 말이냐?”
“자, 장문인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뭐란 말이더냐!”
“저, 저자들이 조금 전까지는 분명⋯⋯.”
“저자? 이놈이 정말 정신이 나가 버렸느냐?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와⋯⋯.”
속이 터질 것 같은 억울함에 곽환소는 경기를 일으키며 옆을 획 돌아보았다. 분명 아까 그 모습을 똑똑히 본 증인들이 더 있⋯⋯.
‘없네.’
옆에 선 이들은 모조리 곽환소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괜히 거들었다가 장문인에게 불벼락을 맞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며 말이다.
‘나쁜 새끼들⋯⋯.’
곽환소의 두 눈에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거 꾸중 좀 듣기 싫다고 동고동락하던 대사형을 버리고⋯⋯.
세상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곽환소를 노려보던 금양백이 고개를 획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실례했소이다. 아이들이 당황하여⋯⋯.”
“괘념치 마십시오.”
백천이 환하게 웃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더없는 온기를 담은 얼굴로 말이다.
“워낙 큰일을 겪고 있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연통부터 드린 후 찾아뵈었어야 하는 것인데, 해남의 사정을 잘 몰라 무턱대고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양백은 오히려 백천의 사려 깊음에 더없이 감탄했다.
“어찌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신단 말이오. 이 태풍 속에 산문을 두드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노릇인 것을.”
“⋯⋯장문인. 속고 계신⋯⋯.”
“⋯⋯.”
눈빛만으로 곽환소를 뭉개 버린 금양백이 재빨리 표정을 풀고 백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보다⋯⋯.”
말을 꺼내고도 그는 살짝 머뭇거렸다.사실 눈앞의 백천은 하대를 해도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나이로 보이지만, 조금 전 들은 말 중 하나가 턱 걸렸다. 결국 금양백은 말투를 슬쩍 바꾸어 물었다.
“장문⋯⋯대리라고 하셨습니까?”
“예.”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되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여 저는 화산의 장문인께 전권을 위임받은 장문대리이자, 천우맹의 특사 자격으로 장문인께 회담을 요청 드리러 왔습니다.”
차가운 비가 내려서일까, 금양백의 등에 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장문대리라니.’
웬만해서는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보통 장문대리라는 자리는 장문인이 정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차기 장문인이 될 이가 임시로 장문인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황궁에서나 사가에서야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만, 강호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권력자의 노환이나 병환으로 인한 일시적 권력의 공백이 사가나 황궁과는 달리 강호에서만큼은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면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게 강호인인데, ‘대리’라는 게 왜 필요하겠는가?
그럼에도 장문대리라는 자리를 만들어 임명하고 해남으로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손끝이 절로 떨려 왔다. 그러고 보니 백천의 뒤에 서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럼 다른 분들께서도⋯⋯.”
다들 화산 사람들이냐는 의미다.
백천이 슬쩍 눈치를 주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포권을 해 예를 표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도위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선친을 대신하여 남궁세가의 임시 가주직을 맡고 있습니다.”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패입니다. 가주님을 대신하여 왔습니다.”
“북해빙궁의 궁주인 설소백입니다!”
순간 충격에 휩싸인 금양백이 눈을 부릅떴다.
‘화산에 남궁에 사천당가, 심지어 북해빙궁?’
하나하나의 이름이 결코 해남보다 못하지 않다. 이들 중 누가 단독으로 해남을 방문했다 해도 대접에 감히 소홀함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한 위명과 직위를 가진 이들이 한꺼번에 해남을 방문한 것이다. 그것도 이 몰아치는 태풍을 뚫고.
금양백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추위 때문은 아니다. 아무리 비가 차갑다 해도 무학을 익힌 그의 몸을 이 정도의 한기가 침습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해남에⋯⋯.”
금양백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우선은 가장 온당한 말부터 꺼냈다.
“해남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려는 찰나였다. 그들의 뒤쪽에서 다 죽어 가는 음성이 들렸다.
“그⋯⋯ 분위기 잡으시는 건 좋은데⋯⋯. 쿨럭! 초상 치르기 전에 비 피할 곳 좀⋯⋯.”
“입 좀 닥치고 있어, 사파 놈아.”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진짜⋯⋯. 쿨럭! 쿨럭!”
“괜찮아, 괜찮아. 사파 새끼 하나 뒈진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어.”
“⋯⋯사람이냐?”
임소병이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으로 노려보다 피를 뿜었다. 답도 없다는 얼굴로 잠시 그를 본 백천이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우선 비를 피할 곳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바다를 헤엄쳐 건너오느라 다들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금양백이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이런 결례를!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해남에 방문하신 객들을 객청으로 모셔라! 어서!”
“예!”
금양백이 깊게 포권 했다.
“자세한 말씀은 조금 뒤에 나누시지요. 우선은 조금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감히 실례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자양이 눈치 좋게 앞으로 튀어 나가 방문객들을 안내했다.
멍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해남의 제자들 역시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호위하듯 뒤따랐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사람, 금양백과 곽환소가 홀린 듯한 얼굴로 객청으로 향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곽환소가 제 뺨을 툭툭 쳐 보았다. 하지만 굳이 스스로 때려 가며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빗물과 느껴지는 한기만으로도 이게 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지금 이 해남에 천우맹의 특사들이 방문한 건가?’
그것도 저리 쟁쟁한 이들이?
해남에⋯⋯. 태풍이 몰아치는 이 해남에⋯⋯. 어?
“⋯⋯장문인.”
“음?”
곽환소가 멍한 얼굴로 중얼중얼 말했다.
“그⋯⋯ 조금 전에 말입니다.”
“말하거라.”
“조금 전에 그⋯⋯ 저 백천 도장⋯⋯. 아니, 그 장문대리께서 바다를 헤엄쳐 건너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던 것 같구나.”
“지금요?”
쿠르르르르릉!
곽환소와 금양백이 동시에 먼 하늘을 내다봤다. 강하게 몰아치는 태풍과 쏟아지는 벼락이 똑똑히 보였다.
순간 둘 사이에 깊은 정적이 고였다.
그들은 바다를 잘 안다. 이만한 태풍이 몰아칠 때 바다가 어떤 꼴이 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을 게 분명한 바다를 잠깐 떠올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잘못 들은 것 같구나.”
“그, 그렇겠죠? 하하⋯⋯.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하하⋯⋯.”
“⋯⋯.”
바다 건너 먼 곳에서부터 숱하게 들려오던 말이 떠올랐다.
화산은 뒤가 없는 문파다.
두 사람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