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6화. 누가 왔다고? (1)
곽환소(郭歡騷)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해남의 제자, 그것도 진산제자만 들어올 수 있는 대해전(大海殿)에 지금 해남의 무복이 아닌 사가의 사복을 입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곽환소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진산제자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외인이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다. 저 사복을 입은 이들이 다름 아닌 이 해남의 진산제자들이기 때문이다.
“너희. 해남을 떠나기로 했다면서.”
곽환소가 입을 열자 몇몇 제자들이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어물어물 말했다.
“예⋯⋯. 사형.”
곽환소가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파문을 받겠다는 것이냐?”
평소 그가 이리 노한 얼굴로 물었다면 다들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곽환소가 해남의 이대제자 중 대제자이기도 하고, 성격이 워낙에 거침없고 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모두 곽환소를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습니까.”
지금은 평소 같으면 감히 대놓고 하지 못했을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그럼 저희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패련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고, 싸워서 이길 방법은 없는데.”
“너희는⋯⋯!”
“압니다. 알죠. 이럴 때는 같이 죽어야 한다는 거. 그런데⋯⋯ 죄송합니다, 사형. 저희는 사형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사제를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사형.”
곽환소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용기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곽환소는 말없이 끼어든 이를 바라봤다.
“저희는 출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해남의 제자들은 다들 가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방금 말을 한 고홍(高弘) 사제만 해도 집에 나이 드신 노모가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
“문파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도 좋지만, 저희가 죽어 버리면 남은 가족들은 어떡합니까?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도 진짜 용기는 아니잖습니까.”
곽환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정말 화가 났다는 의미임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사형께서는 가족이 없으시니, 저희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 못 하실 겁니다. 화를 내실 거면 내시고, 욕을 하실 거면 하십시오. 하지만 무도하다 하지는 마십시오. 문파에 지켜야 할 충의만큼이나 효도 중요한 겁니다.”
그 순간 곽환소의 뒤편을 말없이 지키고 있던 이자양(李子陽)이 피식 웃었다.
“내 유공(庾供) 사형에게 노모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는 좀 된 것 아니었습니까?”
“자양!”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래서 지금 문파를 떠나겠다는 사람들에겐 다들 노모가 있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겁니까? 누군 가족이 없고, 낳아 주신 부모도 없는 후레자식이랍니까?”
이자양의 얼굴엔 비웃음이 한껏 묻어 있었다.
“그냥 무서워서 도망가는 거면서 말은 왜 그리 많습니까? 욕을 할 거면 하고 화를 낼 거면 내라더니, 면전에서 듣기는 싫습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라!”
“사형.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는 지금 무척 말을 고르고 있는 겁니다. 진짜 함부로 말했으면 둘 중 하나는 검을 뽑았겠죠.”
“⋯⋯.”
“파문식인지 나발인지 빨리 좀 했으면 좋겠네요. 법도 지키느라 사형 같은 사람을 사형이라 불러야 하는 제 심정도 이해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공이 입술을 짓깨물며 이자양을 노려보았다. 이자양이 다시 한번 비아냥거리려는데 곽환소가 막았다.
“그만해라.”
“⋯⋯대사형. 저 인간이⋯⋯.”
“유공은 얼마 전에 혼인을 하지 않았더냐.”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아이가 이제 백일 되었다. 제 아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젖먹이다.”
그 말에 이자양이 잠깐 말을 잃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해라.”
곽환소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서 결정한 일이다. 문파가 허한 일을 두고 일개 제자가 옳고 그름을 논해서는 안 된다. 장문인께서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하신 일이지 않으냐?”
이자양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더 이상 유공이나 고홍을 힐난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평소라면 가장 큰 목소리로 저들을 꾸짖고 비난했을 곽환소가 어떤 심정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을지를 알기에 더 입을 뗄 수 없었다.
곽환소가 두 사람을 빤히 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내 말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모양인데, 나는 너희가 문파를 떠나는 것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럼⋯⋯.”
“하지만 사람 간에 그러하듯, 제자와 문파 사이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곽환소가 서늘한 눈으로 사복을 입은 이들을 바라본다.
“정식으로 파문을 받았더냐?”
“⋯⋯.”
“내 듣기로는 너희가 장문인께 파문식을 요청했고, 태풍이 멎으면 거행하기로 했다 들었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 일만은 그들도 죄스러운지 다들 슬슬 시선을 피했다.
“그 말인즉, 파문식이 거행되기 전까지는 너희가 여전히 해남의 제자라는 의미다. 그런데⋯⋯.”
곽환소의 눈길이 더없이 차가웠다.
“왜 너희 가슴에 있어야 할 삼파랑이 보이지 않느냐?”
삼파랑(三波浪). 해남 제자들의 의복 가슴팍에 새겨지는 세 갈래의 물결무늬. 이는 해남의 상징이자, 해남 제자들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사복으로 갈아입은 이들의 가슴에는 당연히 삼파랑의 문양이 없었다.
“이곳은 해남의 진산제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그걸 너희가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여전히 자신을 해남의 제자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그런 복장으로 나타났더냐?”
“저희는⋯⋯.”
곽환소가 씹어뱉듯 말했다.
“입장은 이해한다. 문파를 떠나겠다는 결정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옥쇄를 각오한 이들에게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야지. 그게 지금껏 한 지붕 아래서 같은 뜻으로 동고동락했던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문파에 대한 예의가 아니냐?”
사복을 입은 이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파문을 받고 문파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해남을 떠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번 벗어 버린 도복을 다시 입기도 어색했다.
하지만 곽환소가 말한 것처럼, 그리 생각했다면 적어도 이 대해전에는 발을 들여선 안 됐다. 이곳은 오직 해남의 진산제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만이 입전할 수 있으니까.
“해남의 무복을 다시 입지 못하겠거든, 그 가슴에 다시 삼파랑을 새길 생각이 없거든, 적어도 지금 여기서 나가라. 이곳은 해남의 제자들을 위한 곳이다.”
무언가 항변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이들도 곽환소의 얼굴을 본 후에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하나둘 말없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곽환소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복을 입은 이들이 빠져나가자 대전이 굉장히 비어 보였다.
‘이게 다가 아니겠지.’
지금까지는 눈치만 보고 있던 이들도, 파문식이 거행되고 나면 슬그머니 그 행렬에 합류해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아니면 어느 날 아침이 되면 사라지고 없거나.
몇이나 남을 것인가? 내일은 이곳에 몇이 남을 것이고, 모레는 또 몇이 될 것인가?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이 중에서 절반은 남아 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생각해 뭐 하겠어.’
모두 함께 같은 꿈을 꾸던 시절도 있었다. 해남을 천하제일의 문파로 만들겠다는 꿈을. 남해의 촌놈들이라며 무시하는 중원의 문파들에게 해남이 얼마나 강하고 대단한 곳인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는 원대한 꿈을.
하지만 이제 그 꿈은 백사장에 모래로 지어 낸 전각처럼 부질없이 휩쓸려 나갔다. 남은 건 이미 무너진 꿈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멍청이들뿐.
“자양. 삼대제자들은?”
“⋯⋯안 간다고 울어 대는 걸 엉덩이 때려 가며 내보낼 준비를 마쳤습니다. 걔들이야 멋모르는 어린놈들이니 내보내야죠.”
“그래. 잘했다.”
이자양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스쳤다.
“그 어린놈들도 해남과 함께 죽겠다고 하는 판에, 해남에서 녹이란 녹은 다 받아먹으며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놈들은 저 살겠다고 도망이나 간다니.”
“⋯⋯.”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사형.”
“됐다.”
이번에도 곽환소가 고개를 내젓자 이자양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좋은 사람인 척하기 있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사형이 제일 화를 냈을 거면서.”
“화내서 달라질 게 없는데 무엇 하러.”
“화가 너무 나서 그런 건 아니고요?”
곽환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갈 사람은 가면 그만이다.”
“⋯⋯.”
“나는 해남의 대제자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해남의 제자들이지, 해남의 제자이길 거부하는 이들에게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이냐?”
이자양이 피식 웃었다.
“그럼 사형이 신경 쓸 사람은, 해남도에서 제일 멍청한 놈들뿐이겠네요. 제 살길 버리고 죽겠다는 놈들이니.”
“그러니 신경을 써야지. 멍청하니까.”
곽환소는 작게 웃었다.
말 그대로다. 마지막까지 남을 이들은 이 넓은 해남도에서도 가장 멍청하고 생각 없는 놈들이다. 계란으로 어떻게든 바위를 들이받아 보겠다는 이들이니까.
“그래도 하나는 얻어 가지 않습니까?”
이자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쉽게도 해남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훗날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놈들이 모여 있던 문파로 평가받을 수는 있겠죠.”
“그걸 말이라고⋯⋯.”
“아무것도 못 남기는 것보다야 뭐라도 남기는 게 낫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자양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구릿빛 얼굴을 본 곽환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천하를 다 뒤져 봐도 우리만큼 멍청한 놈들은 없을 테니까.”
“그렇죠. 뭐라도 최고가 되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미미한 자조와 어색한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였다.
쾅!
“사형! 대사형!”
전각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고, 비에 홀딱 젖은 해남의 제자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곽환소가 놀라 소리쳤다.
“뭐냐! 무슨 일이냐?”
“와, 왔습니다!”
“누구? 설마 사패⋯⋯!”
“지금 화산이 왔답니다!”
“⋯⋯누가 왔다고?”
“화산! 화산이요!”
“⋯⋯누가?”
“아이참! 지금 화산이 왔다니까요! 산문에 도착했답니다!”
순간 곽환소의 눈길이 열린 문 사이로 향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여길 왔다고?”
이자양 역시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미친놈들인가?”
그 말에 곽환소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가자!”
그는 지체 없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 사형! 같이 갑시다!”
이자양과 다른 제자들이 그런 그의 뒤로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파아아아아!
내리치는 폭우가 바늘처럼 따갑게 얼굴을 때려 댔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기울일 여유 따윈 없었다.
‘여길 왔다고?’
이 태풍을 뚫고, 언제 사패련과 전쟁을 치를지 모르는 이 해남으로?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정도면 멍청한 게 아니라 미친 거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 순간, 과거에 마주쳤던 화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무대회에서 보았던, 허여멀겋긴 했지만 어쨌든 당당했던 얼굴들이.
그리고 그가 들어 온 화산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파아앗!
전력을 다해 달린 곽환소의 눈에 산문 앞 광경이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해남의 제자들과 그 앞에 선 십여 명의 사람들이.
‘지, 진짜⋯⋯.’
실로 억수 같은 비였다.
얼마나 쏟아지는지, 시야가 뿌예져 제대로 앞을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산문에 도달한 곽환소는 천천히 발을 멈추었다. 그 앞에 실로 당당히 선 십여 명을 바라보⋯⋯.
“⋯⋯춥다고!”
“여기 남해야!”
“그래도 추운 걸 어떻게 합니까! 빌어먹을, 잘도 살아서 여기까지 왔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내가 다시 남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밥. 누가 밥 좀⋯⋯.”
⋯⋯아니. 물에 빠진 생쥐인지, 아니면 몇 달 굶은 거지인지 구분도 안 될 몰골로 온갖 짜증을 부리는 괴상한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대놓고 짜증을 부리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리더니 곽환소를 보았다.
“어?”
“어?”
“그때 그 기생오라⋯⋯.”
“그때 그 무식한 촌놈!”
“누가 촌놈이야, 이 새끼야!”
곽환소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쳐 버렸다.
기생오라비 같은 허여멀건 놈이 미역처럼 들러붙은 앞머리를 옆으로 젖히더니 한 발 내디뎠다. 그러더니 당당히 포권 했다.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입니다. 이곳에는 천우맹의 특사 자격으로 왔습니다. 귀문의 장문을 뵙게 해 주십시오!”
콰르르르르릉!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이 번쩍거리며 무섭게 울었다. 백천은 슬쩍 하늘을 보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벼락 맞기 전에 빨리⋯⋯.”
“⋯⋯.”
“어서.”
곽환소는 생각했다. 뭔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