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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32화 (1,233/1,567)

1232화. 그렇다는데? (2)

"어떠냐?"

"아니⋯⋯."

터덜터덜 돌아온 윤종이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배는 고사하고 나무판자 하나 없습니다, 사숙."

"⋯⋯그래?"

백천이 의아하게 되물으며 눈쌀을 찌푸렸다.

"그쪽은 어땠습니까, 당 소가주님?"

"마찬가지입니다."

남궁도위와 조를 짜 움직였던 당패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선 배를 봐야 사람들과 접촉해 사들이든 할 터인데, 가까운 해안에는 배가 한 척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촌으로 보이는 곳에 고깃배조차 없더군요."

백천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물론 배가 부족할 수는 있다.

이곳이 해남으로 향하는 부두 역할을 하던 곳인 건 맞지만, 이미 해남과 강남이 왕래하지 않은 지는 몇 해가 지났다. 배를 그대로 놀릴 수는 없었을 테니, 쓸모가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너른 바다와 접하는 곳에 고깃배조차 없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일 아닌가?

"혹시 연유를 물어보거나⋯⋯."

남궁도위는 질문을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녹림왕이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배라도 봤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것도 아니니 함부로 말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임소병의 말대로라면 장일소는 의외로 광동에서만큼은 평판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학을 익힌 이들에게는 더없이 가차 없는 이가 장일소지만,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꽤 관대한 편이라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정파라 해도 양민들이 꼭 이쪽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혹여나 접촉한 이들의 가족이 만인방에 투신하기라도 했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확실히 강남은 쉽지 않은 땅이로군.'

평범한 양민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다니⋯⋯.

"⋯⋯상황이 조금 더 확실해지면 방법을 강구해 보겠지만, 섣불리 일을 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패의 말에 백천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설소백을 괴롭히고 있던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을 던졌다.

"그냥 헤어치자니까."

"⋯⋯좀 기다려 봐라."

"왜 자꾸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는지 모르겠네. 튼튼한 팔다리를 두고."

"⋯⋯우리 팔다리는 생각보다 연약하다."

"단련을 게을리해서 그런 거야, 단련을!"

"어휴."

백천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유이설과 당소소가 보였다. 두 사람의 표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다급했다.

"사형."

"무슨 일이야, 사매."

"사숙! 좀 가 보셔야겠어요!"

백천이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

웃통을 벗어젖힌 장정들이 커다란 통나무를 불에 그을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덥고 습한 남해의 날씨에 불의 열기까지 더해지니, 전신이 순식간에 땀방울로 뒤덮였다.

"서둘러라!"

"그쪽 작업은 어떻게 됐어?"

"순조롭습니다. 앞으로 사흘 정도면⋯⋯."

"늦다! 이틀 내로 끝내라! 군사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준비를 마치지 못한다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반드시 이틀 내로 끝내겠습니다!"

털북숭이 장한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커다랗게 고함쳤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라! 제때 준비를 마치지 못한다면 큰 벌이 떨어질 것이다!"

"예!"

장정들이 숨 고를 틈 없이 바삐 오갔다.

수풀에 몸을 숨긴 백천이 그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해안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왜 작은 고깃배 하나 찾을 수가 없는가 했더니, 저들이 이 주변의 배들을 모조리 징발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배를 더 만든다고?'

일단 대충 헤아려 봐도 다섯 척 남짓의 배가 더 건조되고 있다. 크기가 대단한 것은 아니나, 어쨌거나 저기서 배의 수를 더 늘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백천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함께 상황을 살피고 물러난 이들이 굳은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만인방이겠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저 배는⋯⋯."

당패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으로 향하는 배일 겁니다. 쓸데없이 배를 징발해 놓을 필요가 없었을 테니 최근에 끌어모은 걸 테고요."

백천이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조걸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형. 무슨 소립니까?"

"⋯⋯저 배가 이제 쓸모가 생겼다는 소리지. 해남으로 가려면 배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예?"

"사패련이 해남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는 중이라는 의미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조걸이 얼굴을 굳혔다. 슬그머니 수풀 쪽으로 다가가 해안가를 다시 살피더니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저 배가 전부요?"

"⋯⋯."

"아니, 대체 병력을 얼마나 보내려고⋯⋯."

조걸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육지에서야 단순히 수레의 숫자로 병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바다에선 다르다. 저 배의 수가 곧 해남으로 쳐들어갈 병력의 규모를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적당히 혼을 내는 수준은 아닌 것 같군."

가만 듣고 있던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다름아닌 장일 소 아닙니까. 나서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번 나서면 해남이라는 이름 조차도 세상에서 아예 지워 버리려고 할 겁니다. 애초에 장일소는 그런 인간이니까요."

"⋯⋯."

"그보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촉박해진 것 같은데⋯⋯."

임소병이 부채로 제 머리를 쿡쿡 찔러 댔다. 모두가 굳은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떨떠름한 어투로 말했다.

"사실 사패련의 입장에서는 이리 급하게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아직 내부 안정이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느긋하게 움직여도 될 텐데⋯⋯."

임소병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다면 둘 중 하나겠죠."

"그게 뭡니까?"

"사패련의 내부 정리가 우리의 예상 이상으로 빨리 끝났든가."

"⋯⋯."

"그게 아니면 해남파의 존재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장일소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거겠죠."

"장일소가 해남을 그렇게나 신경 쓸까요? 그래 봐야⋯⋯."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광동의 상황을 보고 나니 대충 이해가 갑니다. 장일소에게 있어서 광동은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사파인데도 민심을 얻었고, 후방에 있으니 적에게 침탈당할 위험이 없는 완벽한 본거지라고 할 수 있죠."

"⋯⋯그렇죠."

심지어 사패련과 정파의 전쟁이 정파의 승리로 끝난다고 해도,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는 게 아닌 이상은 이 광동까지 진격하기 어려울 겁니다. 왜일까요?"

"십만대산⋯⋯."

"정확합니다, 남궁 소가주."

남궁도위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들 역시 십만대산을 통과해 왔으니 알 수 있다. 저곳은 지형적으로나 상직적으로나 진격이 거의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다. 그런 십만대산을 끼고 있는 광동은 장일소에게 가장 안전한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해남이 등 뒤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해남을 사패련의 등에 겨눠진 칼 정도로 봤지만, 장일소에게는⋯⋯."

"제 정원을 언제 불태울지 모르는 악적이란 말이군요."

"예. 그러니 완벽하게 발본색원하고 싶겠죠. 혹여 문제가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광동만은 지킬 수 있게."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장일소가 정말 그렇게까지 뒤를 생각하는 이일까요? 제가 아는 그라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장문대리."

"⋯⋯어떤 오해 말씀이십니까?"

임소병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세인들이 보는 장일소는 연전연승을 거둬 지금의 자리에 오른 풍운아 정도겠으나, 장일소라고 해서 항상 이기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오히려 위태한 목숨을 겨우 부지하는 지경이었죠. 사파란 원래 그렇습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새싹은 미리 짓밟으려 하죠."

청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소는 수도 없이 자신을 노려 오는 마수들을 버텨 내며, 때로는 달아나고, 때로는 패하고, 때로는 크게 잃어 가면서 여기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그런 이를 단순히 전쟁에 미친 광인쯤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가 원하는 건 노든 걸 손에 넣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정도는 아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청명만큼이나 장일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이가 임소병이다. 그런 그가 내린 평가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임소병이 부채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음. 지금에 와서 저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연유를 헤아려 봐야 별 의미가 없겠군요. 중요한건⋯⋯ 곧 저 배들이 만인방 놈들을 가득 싣고 해남에 떨어지리라는 거죠."

"⋯⋯."

"달아날 곳 없는 그 섬에 말입니다."

남궁동위가 눈에 띄게 초조해진 얼굴로 물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글쎄요. 보아하니 배를 만들고 있는 쪽은 애초에 광동에 남아 있던 이들 같으니⋯⋯. 저 배에 오를 이들은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겠죠. 새로 건조하고 있는 배가 완성될 만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하면⋯⋯."

톡톡톡톡.

부채 끝으로 일정하게 어깨를 두드리던 임소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야 닷새. 그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백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예상대로라면 사패련이 움직이는 건 적어도 몇 달은 뒤여야 했다. 강북과 전쟁을 할 준비를 끝내는 순간 가장 먼저 해남을 노릴 거라 예상했으니까.

그러니 일단 소수를 이끌고 해남으로 온 것이다. 우선 해남파와 의견을 나누어 보기 위해서.

하지만 이대로라면 해남에게 천우맹에 가입하기를 권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당장 닷새 후면 문파가 없어질 판인데 천우맹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장문대리.”

“사숙⋯⋯ 어쩌실 겁니까?”

백천은 굳은 얼굴로 고심했다.방법은 두 가지다. 힘의 부족함을 빠르게 인정하고 이대로 물러나든가⋯⋯. 그게 아니면 한시라도 빨리 해남으로 들어가 이 상황을 알리고 함께 대책을 강구하는 것.

“⋯⋯길게 생각할 것도 없지.”

새삼 강남을 관통해 온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일하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채 반도 오기 전에 해남이 멸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우선은 해남으로 간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 한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몸을 빼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백천이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해남은 사패련이 이 시점에 공격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다. 최소한 그 정도는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 이는 있었다.

“하지만 해남까지는 어떻게 갑니까? 배는 모조리 저놈들이 다 징발해 갔는데. 야밤에 한 척 정도 탈취라도 해 볼까요?”

남궁도위의 물음에 백천이 대답 없이 슬그머니 한쪽을 바라보았다.

“⋯⋯장문대리?”

순간 불길함을 느낀 남궁도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다 저 먼 곳을 두 눈으로 바라본 백천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한 사람을 뚫어지게 보았다.

“⋯⋯되는 거지?”

“아, 된다니까 그러네.”

“진짜 되는 거지?”

“아, 거참 속고만 살았나.”

청명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기껏해야 오십 리밖에 안 된다니까? 그 정도면 슬슬 누워서 헤엄쳐도 반나절이면 도착해.”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을 보았다.

“그렇다는데?”

“⋯⋯.”

“⋯⋯.”

정적이 흘렀다.

남궁도위는 처음으로 백천의 저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찔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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