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화. 그렇다는데? (1)
순간 마음 한편에서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 짓뭉개진 매화 문양을 두 눈으로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스운 일이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의 목숨 가치가 서로 다를 리는 없다. 화산의 이름 아래서 싸웠건, 다른 이름을 걸고 싸웠건, 죽은 이들은 모두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니 딱히 화산이라는 이름을, 이곳에 매화검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여길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저 매화 문양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아직 청명 역시 초연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리라.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일행들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청명은 짧게 말했다.
"묻어."
"⋯⋯청명아."
"쯧. 시간 없다는데도."
결국 윤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드러난 무기들과 인골을 구덩이의 중앙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봉분이라도 하나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청명도 이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이 하나둘 나서서 말 없이 윤종을 돕기 시작했다.
혼자 서있기 뭐한지, 임소병마저도 슬그머니 윤종의 근처로 다가가 애꿏은 흙더미를 툭툭 다져 대었다.
청명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첨예하게 솟은 십만대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사형.'
이곳에는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청문마저 묻혀 있다. 심지어 청명은 그들이 어디쯤에서 고혼이 되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다른 이들에게는 백 년 전 일이겠으나, 청명에게만큼은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저 산을 올라 청문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딱 하루, 고작 하루의 시간만 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청명은 자신을 말리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의미 없는 일이지.'
죽은 이는 죽은 이일 뿐이다. 죽은 이를 챙겨 위안을 얻는 건 그저 살아 있는 이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아는 청문이라면 청명이 그런 식으로 위안을 얻는 걸 달가워할 리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살려 내지 못했다고 호통을 칠 사람이었다.
청명은 멍하니 그 모습을 그려 보다 피식 웃었다.
이곳에는 더 이상 과거처럼 그를 구박할 사람이 없다. 귀에 못박이도록 잔소리를 해대던 청진도, 대쪽같이 곧게 그를 바라보며 바른길로 가길 원하던 청문도, 항상 안 어울리게 우는소리나 해 대던 당보 놈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기억은, 그들이 남긴 의미는 족쇄보다 강하게 청명의 전신을 옥죄고 이싿.
'가혹하다, 정말.'
나직이 한숨을 쉰 청명은 봉분을 만드는 이들을 일별했다. 봉분을 만드는 손길에 꽤나 정성이 묻어 있다.
"호사스러운 무덤이네⋯⋯."
화산의 장문대리와 남궁의 소가주, 그리고 당가의 소가주, 북해빙궁 궁주, 녹림왕⋯⋯.
대단하지 않은 이들이 없다. 그런 이들이 손수 봉분을 만들어 주고 있으니, 황송한 일이 아닌가"
'영광인 줄 알아라, 망할 놈들아. 내 시체도 저기 어디쯤 널브러져 있을 텐데.'
청명이 쓰게 입맛을 다시는 와중에 윤종이 봉분 위 빈 곳에 마지막으로 풀을 덮고는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고 손을 모은 그의 입에서 도경 외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경건하게 울리는 도경과 혜연이 함께 외는 불경이 고요한 산에 나직하게 퍼져 나갔다.
짧은 도경이 끝날 때까지, 청명은 저 멀리 구름에 가린 드높은 봉우리를 그저 한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
"⋯⋯보인다."
"정말⋯⋯."
"드디어⋯⋯."
상거지 꼴이 된 천우맹 일행이 하나같이 감격을 어쩌지 못하는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눈앞이 드넓고도 푸르렀다.
"바다다!"
"으아아아아! 도착했다!"
"바다라는 게 정말 있는 거구나!"
모두 감격에 겨워 한마디씩 던졌다.
"⋯⋯장강보다 더 넓네."
"겨우 그 정도가 아니잖습니까? 진짜로 끝이 안 보이는데요?"
"쯧쯧. 바다는 원래 그런 거다."
"어? 사형은 예전에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이번이 처음인데?"
바닷바람을 맞는 이들의 감회는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걸렸지?"
"칠 일쯤 걸렸죠."
"생각보다는 일찍 도착했네."
"그러게요."
마침내 해남으로 향하는 바다에 도달한 지금, 모두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냥 우회할걸⋯⋯."
"내 말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모두 우울한 얼굴로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강남을 관통하는 게 나쁜 선택이었느냐 하면, 결과만 놓고 봤을 땐 결코 아니었다.
어쨌거나 별다른 희생 없이 불과 칠 주야 만에 해안에 도착했으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경이로운 성과라고 봐야 하낟.
하지만 그건 외부에서 본 시선일 뿐이다. 막상 그 길을 뚫고 온 이들은 그리 마음 편히 평가할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어떻게 십만대산에서 심장마비로 안 죽었는지 아직도 신기하다."
"사형도 많이 쫄렸습니까?"
"솔직히 중간쯤에는 차라리 뒤로 돌아가자고 청명이 붙들고 울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전 사실 조금 빌어 봤습니다."
"⋯⋯뭐라던?"
"내 손에 뒈질래, 마교 손에 뒈질래? 그러더라고요."
"그럼 마교 손에 뒈지는 게 낫지."
그 새끼들이 조금 덜 잔인할 테니까.
"⋯⋯고생했다."
윤종과 조걸의 대화를 듣던 백천이 조용히 그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심장 떨려 뒈지는 줄 알았지.'
오는 동안 십만대산은 내내 고요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보다 안전한 길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일행이 마교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단 점이다.
"생각해 보니 갑자기 열받네?"
윤종이 다짜고짜 조걸을 걷어찼다.
"악! 갑자기 왜 때립니까!"
"네가 그 이름만 안 꺼냈어도 편하게 왔을 거 아냐!"
"⋯⋯생각이 나는 걸 어떡합니까?"
모든 문제는 바로 저 망령된 조동아리에서 시작되었다. 십만대산을 가로지르던 중 조걸이 놈이 뜬금없이 '그런데 그때 봤던 마교의 잔당들 말입니다. 그 천살인가 뭔가 하는 새끼. 그 새끼가 혹시 여기에 있으면 어떡합니까?'라고 지껄이고 만 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지만, 이미 머리에 틀어박혀 버린 말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십만대산이 '과거 마교의 본거지였던 빈 산'이 아니라 '중원에 들어왔던 마교도와 천살이 은신해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마굴'로 돌변해 버렸다.
덕분에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섰고, 쫓기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십만대산을 빠져나올 즈음에는 거의 인사불성이 될 만큼 기진맥진해버렸다.
여기서 끝났으면 윤종도 그리 화가 치밀진 않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후로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지역이 만인방의 본거지인 광동이었단 점이다.
물론 지금은 만인방의 주력이 장강에 몰려가 있어 거의 빈 땅이나 다름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광동은 광동이 아닌가?
"⋯⋯잘도 살아서 도착했네."
"어느 새끼가 강남 땅 뚫고 가자고 했냐?"
"사파 새끼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 소가주님."
모두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탄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아무튼 뭐⋯⋯."
백천이 정리하듯 입을 열었다.
"광동을 지나면서 중간중간 죽을 위기가 한 대여섯 번은 있었던 것 같지만⋯⋯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결과만 좋으면 다 괜찮은 걸까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숙."
"결과도 조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
"아니, 그건 맞는데⋯⋯."
백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천운이 따랐지. 물론 사패련이라 해도 이 넓은 강남 땅에서 사람이 오갈 만한 길을 모조리 통제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광동에서는 적과 한 번쯤 맞닥뜨릴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천지신명께서 도우셨⋯⋯."
"크흐으으음!"
"도우셨⋯⋯."
"크흐으으으으으음!"
윤종과, 백천, 남궁도위는 자꾸만 헛기침하는 이를 향해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다. 피로에 찌들어 반쪽이 된 임소병이 세상에서 가장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결국 윤종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천지신명이 도우셨다기보다는 녹림왕이 길을 잘 선정해 주신 거죠."
"하하하핫! 굳이 알아주실 필요는 없는데! 저야 뭐 여러분들을 위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헌신할 뿐이지요. 하하하하핫!"
기분 좋게 부채를 펄럭대는 임소병을 보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윤종아. 나는 한 번씩 네가 정말 도인이라는 걸 실감한다."
"예?"
"저 표정을 보면서 그 말을 해 줄 수 있다니 말이다. 나는 죽어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데."
"동감입니다, 장문대리."
"끄응."
솔직히 임소병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십만대산까지 이어지는 산길에서도 그랬지만, 광동에서도 임소병의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몇 번은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참 사파로 태어난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예? 당연히 불행 아닙니까?"
남궁도위가 무슨 헛소리를 하느냔ㄴ 듯 묻자 백천이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양반이 마교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산적으로 태어난 게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렇죠?"
천하를 위해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백천은 고개를 들어 드넓은 바다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잘 도착했군.'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보긴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여기까지 별 탈 없이 잘 도착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숙."
"응?"
"섬까지는 어떻게 건너가죠?"
"그야 당연히⋯⋯."
"헤엄쳐야지!"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짝다리를 짚고 선 청명이 '뭘 그런 걸 새삼스레 물어보지?' 하고 묻는 듯이 삐딱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물 건너는 데 다른 방법이 또 있어?"
"⋯⋯청명아. 섬이야, 섬."
"섬이면 왜? 섬은 뭐 떠내려가기라도 한대? 어차피 거기에 있는 건데 계속 헤엄치다보면 언젠간 도착할 거 아냐."
남궁도위가 힘없이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논리적으로 뭐라고 반박 좀 해 보십쇼, 녹림왕."
"⋯⋯이건 저도 어렵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요."
"아니, 그래도⋯⋯."
"뭔 말이 통해야 싸워라도 보지⋯⋯."
망연해진 임소병을 보며 남궁도위는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때,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배를 수배해 보자."
"아니, 뭐 하러⋯⋯."
"됐다."
백천이 청명의 말을 단박에 끊어 버린 것이다.
"설령 일이 터져서 중간부터는 헤엄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최대한 체력을 아끼는 쪽이 좋다. 인원이 적으니 커다란 배도 필요 없고, 작은 고깃배 정도라면 수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니 배부터 구한다."
청명이 입을 툭 내밀었다. 하지만 그래도 장문대리의 결정이라 여겼는지 그 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좋아. 그럼 흩어져서 배를 찾아봅시다. 대신 신분은 최대한 숨겨야 합니다."
"예!"
서로 눈빛을 교환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남은 백천은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작은 땅에 시선을 못 박았다.
'해남이라⋯⋯.'
우선은 저곳에 도착하는 것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