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화. 저는 모르겠습니다. (5)
'적?'
혹여 천우맹 일행을 본 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민이라면 좋게 좋게 입단속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사패련이거나 마교의 잔당이라면?
'멸구(滅口)!'
기필코 죽여 없애야 할 것이다. 절로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뭘 보라고?"
"저기 말입니다, 저기."
"⋯⋯뭐?"
"아!"
조걸이 답답하다는 듯이 후다닥 한쪽으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삐죽이 솟은 것을 가리켰다.
"이거요, 이거! 안 보이십니까?"
"야, 이⋯⋯."
긴장감이 어려 있던 윤종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간 떨어질 뻔했잖아!"
조걸이 발견했던 건 사람이 아니라, 땅에 파묻힌 채 손잡이만 삐죽 드러난 검이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백 년은 지났을 텐데, 아직 검이 남아 있네요."
조걸이 땅에 박힌 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뽑히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뭐에 걸렸나, 이게⋯⋯. 끄응차!"
"야, 그러다 부러진다!"
"아니, 조금만 더 하면 뽑힐 것 같⋯⋯."
조걸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콱 준 순간, 그 주변의 땅거죽이 통째로 들썩이더니 땅에서 큼지막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
"⋯⋯이게 뭐야?"
순간 모두가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딱히 대단한 건 아니었다. 우연히 귀한 보물을 찾아낸 게 아니었단 뜻이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저 녹이 슬 대로 슨 쇳덩어리들이었다. 한때는 검이었고, 한때는 도였으며, 혹은 창이었을지 모르는 쇳덩어리.
그것들이 구절편(九節鞭: 쇳조각을 여럿 이어 채찍처럼 만든 무기)에 뒤엉켜 있다가 한 번에 뽑혀 나온 것이다.
색이 바래 버린 무기들은 날이 한껏 무뎌진 데다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녹이 심하게 슬어서 더는 병기로서의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뭔 무기가 이렇게⋯⋯."
조걸은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면 이곳에 보관되었다가 잊힌 무기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얼핏 한 조걸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무기가 뽑혀 나온 구덩이를 본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
윤종이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또!"
"⋯⋯사형, 여기⋯⋯."
"뭐가?"
다가간 윤종이 조걸을 따라 땅에 흉하게 생겨난 구덩이 쪽을 내려다보았다. 윤종이 보인 반응 역시 조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거⋯⋯."
앓는 듯 목소리를 흘린 윤종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구덩이 주변을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했다.
아래로 깊이가 아니라, 주변으로 넓게.
그가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영문을 몰라 지켜보던 이들 역시 이내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구덩이가 넓어질수록,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세월이 쌓은 흙먼지로 묻혀 있던 병기들, 그리고 그 주위에 널린 인골 조각들이 말이다.
아무리 넓게 파고 또 파도, 새로운 무기들과 인골은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
당소소가 희미하게 손을 떨자 유이설이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주변을 파내던 윤종의 손이 결국 멈추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파도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파내야 이곳에 있는 인골들을 모두 찾을 수 있는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윤종은 멍한 얼굴로 자신이 파낸 곳을 둘러보았다.
사람 열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너른 구덩이에 병기와 인골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여긴⋯⋯."
눈앞의 광경이 제대로 인식되자마자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푸른 들판과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교의 본거지였다는 것만 몰랐어도, 어쩌면 더없이 평화롭고 고즈넉한 곳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흙과 무심하도록 푸른 풀 아래로 무슨 광경이 숨어 있었는지 알았으니, 이젠 이곳을 조금 전과 같은 감상으로 바라볼 순 없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얼마나 죽은 것일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서로를 죽여 댄 것일까?
"대체 여기서⋯⋯."
"전투가 있었겠지."
망연히 인골을 바라보는 그들의 귓가에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정확히는 그런 곳 중 하나일 테고.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 여기는 십만대산이니까."
그 짧은 말이 모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십만대산. 최후의 격전이 있었던 곳. 정파와 마교 간의 모든 것을 건 승부가 있었던 곳. 그리고 천마의 목을 베기 위한 최후의 결사대가 산화한 곳.
그래. 바로 십만대산이다.
"아무리 그래도⋯⋯."
모두가 숙연해진 와중, 윤종이 침묵을 깨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수습이라도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
"여기 묻힌 건 마교도뿐만이 아니잖느냐⋯⋯. 이분들은⋯⋯ 이분들은 천하를 지키기 위해 싸우셨던⋯⋯."
"누가?"
"⋯⋯뭐?"
"누가 수습할 건데?"
하지만 청명의 말투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당장 내일 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죽어 나자빠진 놈 시신이나 수습하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어. 내일은 내가 그 위에 누울지도 모르는 판에."
"그렇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라도⋯⋯."
"몇천, 몇만 구나 되는 시신을 일일이 수습해서 강북까지 가져간다고?"
"⋯⋯."
"그럴 정신이 있었으면 그 난리도 안 쳤겠지. 잊어버린 모양인데, 마교는 박멸된 게 아냐. 천마를 잃어 물러난 거지. 그 남은 놈들을 모조리 박멸하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강호가 망했을 거야. 천마가 죽자마자 발을 빼고 물러난 쪽은 강호였으니까."
"⋯⋯그럼 뒤늦게라도⋯⋯."
"글쎄."
청명이 피식 조소했다.
"그럴 형편이 됐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대충 짐작은 갔다.
천마가 죽은 직후에는 십만대산으로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이 있는 대로 오른 마교도들이 미쳐 날뛰었을 테니까. 심지어 그놈들은 그 여세를 몰아 섬서까지 진출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화산처럼 아주 망해 자빠진 건 아니라고 해도, 다른 문파들 역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재정비하는 데도 정신이 없는데, 다시 강남까지 사람을 보내서 시신을 수습하는 게 쉬울 리 없었겠지.
급한 일부터 해 나가며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시신은 썩어 들어갔을 것이고, 나중에는 수습하려야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을 터.
"아무리 그래도⋯⋯."
"말 같은 소리를 해."
청명이 지겹다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딱 잘랐다.
"십만대산, 십만대산 하지만, 십만대산은 그냥 산 하나가 아니야. 광동의 동쪽부터 광서의 서쪽까지, 그 위의 귀주까지 포함한 오백 리에 달하는 거대한 산맥이지."
"⋯⋯."
"그리고 그 긴 전쟁 중에 이 산맥 전체에서 전투가 벌어졌어. 아니, 산맥뿐 아니라 천하의 모든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지. 그런데 시신 몇 구 수습해 보겠다고 이 산맥을 통째로 뒤지고 다녀? 아직도 마교의 잔당이 버티고 있을지 모를 산맥을?"
윤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청명이 물었다.
"가능해?"
결국 윤종도 어렵사리 한숨과 함께 답했다.
"⋯⋯어렵겠지."
청명이 무십하게 덧붙였다.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이 뒤에서 이래야 한다, 이랬어야 했다 말하는 건 쉽지. 그런데 막상 겪었던 이들이라고 손을 놓고 싶어서 놓은 건 아니야.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지."
윤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일 순 없어서였다.
그는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화산의 선조들, 그들의 시신 중 뒤늦게나마 화산으로 돌아온 것은 고작 한 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이들의 시신은 이 머나먼 땅에 이토록 무심하게 묻혀 있었던 것이다.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로.
이 일을 두고 감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당장 화산부터도 선조들의 유해를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아니, 애초에 그래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는데.
이제 와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그럼 이분들이라도⋯⋯."
최소한 제라도 지내 드리자는 말을 하려는데, 청명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툭 내던지듯 말했다.
"다시 묻어."
순간 당황한 윤종이 눈을 부릅뜨며 청명을 보았다. 눈빛에 적지 않은 노기가 실려 있었다.
산을 모조리 뒤져 남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파낸 시신들이라도 수습해 주는 게 사람으로서의 도리 아닌가.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시선 앞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시체는 그냥 시체일 뿐이야. 죽어 자빠진 몸뚱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
"죽은 사람 뼛조각 수습하겠답시고 산 사람이 죽으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 아냐? 그럴 시간 없으니 대충 다시 묻어. 빨리 해남으로 가야 해."
"청명아!"
"사형."
그때 청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우습게 보지 마."
"⋯⋯."
"여기에서 죽은 이들은 자신이 이렇게 되리란 걸 모르고 왔을까?"
윤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알았던 이들이야. 그럼에도 싸웠던 거고. 여기에서 죽은 이들이 뭐 대단한 취급이라도 받을 줄 알고 싸웠을 것 같아?"
청명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입 안에 희미한 피 맛이 맴돌았다.
그때는 그랬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도 흙조차 덮어 주지 못했다. 산짐승에 뜯기고, 비바람에 썩어 들어갈 걸 알아도 그저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동료가 쓰러진 자리에 머지않아 나 역시 쓰러질 테고, 똑같이 썩어 갈 테니까.
그러니 미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쓸데없이.'
청명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과거를 생각하면 감상에 빠지게 된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나 버린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었다.
죽어 간 이들을 가여워해선 안 된다.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잠들었으니까. 오히려 가엾단 시선을 받아야 할 쪽은 제 몫의 역할을 끝냈음에도 다시금 이 지옥에 끌려들어 가고 있는 청명 쪽이었다.
그러니⋯⋯.
"이런 데서 낭비할 시간 없어."
청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감상은 적당히 해 둬. 정말 이런 꼴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다시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청명이 다시 무심하게 흙을 덮으려는 그때였다.
"처, 청명아⋯⋯."
조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은 직감했다. 이다음에 이어질 말은 차라리 듣지 않는 쪽이 나을 거란 사실을.
하지만 조걸의 목소리는 여지없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여기⋯⋯."
청명이 시선을 돌렸다. 조걸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그는 보고 말았다.
비스듬하게 꽂힌, 녹슬어 버린 검.
더는 검이라 부르기도 힘들 만큼 낡은 그것의 손잡이 끝에 새겨진⋯⋯.
"매화검이다⋯⋯."
작은 매화 문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