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화. 저는 모르겠습니다. (2)
"그⋯⋯."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을 떼려고 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분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들을 모두 이끌고 강북으로 향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순 없다.
'이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임무가 아니야.'
그는 지금 천우맹의 일원들을 이끌고 해남을 구하러 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임무를 팽개치고 강북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그럼 모든 일이 꼬이고 말 것이다.
애초에 가장 위험한 육로를 선택한 이유도 해남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한시라도 더 줄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순간적인 인정에 이끌려 시간을 낭비해도 될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절망이 어린 형욱의 얼굴을 본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한다면 형욱이 말한 대로 그들이 입으로만 양민이 가장 중요하다 할 뿐, 실제로는 더 큰 것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방치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선택이 법정의 것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나는⋯⋯.'
고뇌로 백천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였다. 그의 표정이 변하니 형욱이 황급히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당혹한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흘러나왔다.
"쇠, 쇤네가 주제도 모르고 떠들었⋯⋯."
"⋯⋯."
"죄송합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공께 감히 드릴 말씀이 아니었는데도⋯⋯. 너무 답답한 마음에 헛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요, 용서해 주십⋯⋯."
"이러지 마십시오⋯⋯."
백천은 '제발'이라는 말을 억지로 누르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형욱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니 그는 겁먹은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이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해코지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저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하신 것이 너무도 와닿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무사님. 구명지은을 베풀어 주신 분들께 감히 드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무사님들이야 사실 저희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되든 그냥 눈 딱 감고 지나갔으면 편해지시는 것이었는데⋯⋯."
형욱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마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더니⋯⋯. 아무래도 제가 그 짐승인 모양입니다."
"⋯⋯."
"그냥 무식한 놈이 멋모르고 푸념을 늘어놓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찌 큰일을 하러 가시는 무사님들의 발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흔적을 지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백천의 속을 정말 쓰리게 하는 건, 형욱의 말에 딱히 가식이 어려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백천에게 겁을 먹어 제 마음을 꾹꾹 누르며 말하는 게 아니라, 형욱은 정말로 백천 같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찌할 바 모르고 형욱을 보던 백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일행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해답 따윈 가지지 않은 모양으로 암담해 보였다.
그들은 오히려 백천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무어라 답을 내어 줄지 모른단 희망의 눈빛을 보내왔다.
백천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지 않으면 금방 혼절해 버릴 것처럼 희게 질린 형욱과, 이쪽만을 바라보는 천우맹 일원들의 눈빛까지.
그 모든 압박을 이기지 못한 백천이 헛소리라도 늘어놓기 위해 입을 연 바로 그때였다.
"뭐, 분위기 왜 이래? 초상 났어?"
온갖 짜증이 실린 얼굴로 들어선 청명이 등에 짊어진 멧돼지 두 마리를 아무렇게나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아오, 빌어처먹을! 이 산에는 뭔 돼지 새끼 보기도 힘들어! 사형, 이거 가져다 사람들 먹여!"
"고기다! 굽자!"
"삶으라고! 고기 구경도 못 해 본 양반들 구워 먹였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 알았어!"
"하여간 생각이 없다니까!"
청명이 등장하는 순간, 질식할 것 같았던 분위기가 일시에 확 풀려 버렸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일순 느슨하게 풀렸다.
"근데 진짜 뭐야? 저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왜 또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야?"
"아⋯⋯ 그게⋯⋯."
백천이 형욱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청명이라면 뭔가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설령 답이 없다 하더라도 청명은 그처럼 우물쭈물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사실은⋯⋯."
백천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일의 전말에 대해 들은 청명이 형욱과 백천을 번갈아 보았다.
형욱은 혀라도 콱 깨물어 버리고 싶은 모양으로 송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백천은 청명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니⋯⋯."
"⋯⋯."
답을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 그 속에서 청명이 짜낸 어려운 대답이 그들의 가운데 툭 떨어졌다.
"사숙, 진짜로 등신이야?"
"청명아! 장문대리다!"
"사숙은 맞고, 등신도 맞지만 장문대리시잖냐!"
"걸아, 사숙한테 등신이라고 하면 안 된다."
"아, 맞다."
백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사람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청명에게 물었다.
"⋯⋯넌 답이 있다는 거냐?"
"아니⋯⋯. 옛날에는 재수는 좀 없어도 똘똘한 맛은 있었는데, 어떻게 인간이 가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냐? 이걸 고민하고 있다고? 이걸?"
"⋯⋯."
"그리고 너희들은 다들 그냥 여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저러고 있는데?"
청명이 도끼눈을 뜨고 다른 이들을 흘겼다. 모두가 움찔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뭔 생각으로 이런 것들을 데리고⋯⋯."
청명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푹 쉬었다.
"방법이 있는 거냐?"
"방법은 얼어 뒈질!"
청명이 눈을 부릅뜨고 형욱을 향해 외쳤다.
"어이, 아저씨!"
"예? 예, 예! 무사님!"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에요. 도와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아무리 답답하다고 해도 순진한 사람들 데리고 남은 것도 다 챙겨 달라고 하면 쓰나!"
"⋯⋯죄송합니다."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한번 겪고 나면, 사람이 사람을 돕기가 무서워지는 거예요. 아저씨가 한 말 하나 때문에 다음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도 그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말이야 바른말로, 사람 하나 돕는데 그 사람 인생까지 책임을 져야 하면 누가 겁나서 적선이라도 하겠어?"
"⋯⋯."
"막말로 거지들이 목구멍에 풀칠하고 사는 건, 적선 받은 돈에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이상을 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좋은 마음으로 돈 한 푼 줬다가 내 집까지 마련해 달라 소리 들으면 누가 거지를 도와주고 싶겠어? 그럼 개방 새끼들은 모조리 다 굶어 뒈지는 거야! 뭔 말인지 알아?"
형욱이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재촉 끝에 나온 본심이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후안무치하기는 했다.
"그리고!"
청명의 눈이 백천에게로 획 돌아갔다.
"도울 거면 돕고! 거절할 거면 확실하게 거절해야지! 뭐 한다고 우물쭈물하고 있어! 장문대리라는 양반이 그렇게 결단력이 없어서 뭘 어쩌려고? 적이 쳐들어오면 싸울지 화해할지 고민할 거야? 그럼 다 죽어, 이 인간아!"
백천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청명이 물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뭔지 알아?"
"⋯⋯모르겠다."
청명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숙이 화산의 장문대리가 어떤 자리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백천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대답해 주는 대신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제일 나쁜 새끼는 너야, 이 새끼야!"
"꺄악!"
청명의 발차기가 임소병의 턱주가리에 작렬했다. 임소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재밌냐? 어? 재밌어? 이 사파 새끼가 절벽 타느라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사람 취급해 줬더니! 자리 잠깐 비운 걸 못 참고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어? 오냐! 너 오늘 뒈져 봐라, 이 사파 새끼야!"
"악! 아악! 화산검협! 그게 아니고!"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임소병을 죽어라 걷어차는 청명을 보며 형욱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얻어맞는 쪽이 사파고, 때리는 쪽이 정파입니다."
"⋯⋯예?"
"진짭니다."
"⋯⋯."
물론 뭐⋯⋯ 겉으로 보기에는 때리는 쪽이 사파고, 맞는 쪽이 정파기는 하지. 임소병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디 귀한 집에서 나고 자란 문사니까⋯⋯.
"후욱! 후욱!"
늘씬하게 패 준 청명은 숨을 몰아쉬며 피떡이 된 임소병을 질질 끌어다 백천의 앞에 던져 놓았다.
"끄으⋯⋯."
"조용히 안 해?"
"⋯⋯."
"앉아!"
"넵!"
임소병이 바람처럼 몸을 일으켜 정좌했다. 청명이 짜증 어린 눈으로 말했다.
"녹채 새끼들도 여기로 오는 길 다 알지?"
"⋯⋯알죠."
"절벽 말고 다른 길 이용하면 사람 서른 정도 장강 너머로 빼내는 건 일도 아니고. 맞아?"
"그, 그렇습니다."
"생각하니 또 열받네. 근데 이 새끼가!"
청명이 손을 들어올리자 임소병이 황급히 머리를 감싸며 납작 엎드렸다.
"악! 때리지 마십쇼! 저 병자라고요!"
"그렇게까지 병자면 죽었어야지! 아직도 살아 있잖아, 이 새끼야!"
"⋯⋯."
"어휴."
임소병과 백천을 번갈아 노려보던 청명이 별안간 품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키이이이이이!
쥐 죽은 듯 있다가 붙들린 백아가 제 운명을 예감한 듯 비명을 질렀다.
"아, 조용히 안 해?"
⋯⋯.
청명은 시무룩해서 축 처진 백아를 임소병 앞에다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찰 써."
"⋯⋯뭐라고요."
"녹림 정예들 따로 징발해 보내. 목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강북으로 빼내는 것. 장원에 데리고 가면 장문인께서 알아서 정착하게 도와주실 테니까."
"⋯⋯힘든 일인데."
"못 해?"
"위험할 수도 있고⋯⋯. 아무리 화산검협이 하는 부탁이라지만⋯⋯."
임소병이 슬슬 엉덩이를 빼자 청명이 획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하고 있냐고 힐난하는 듯이.
그제야 장문대리 자리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단 청명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화산검협이 아니라, 화산 장문대리의 권한으로 요청드리는 일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들은 임소병이 즉각 몸을 바로 세우며 정좌했다. 지금껏 장난스러웠던 표정이 일변했고, 녹림왕다운 위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하는 요청이십니까?"
진지한 임소병의 물음에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이 곧장 화답했다.
"화산에서 보낸 요청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녹패의 정예들을 동원하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장강을 넘는 것이 조금 걸리나, 지금 장강수로채는 예전 같은 감시를 보여 주진 못하고 있으니 야음을 틈탄다면 가능합니다."
"그럼⋯⋯."
"다만!"
임소병이 백천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녹채의 정예는 본디 이런 일에 동원될 이들이 아닌 바, 명을 내리는 제 면이 깎이는 점 역시 고려해 주셔야 합니다."
"⋯⋯."
"그러니."
그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드리웠다.
"이 요청에 대한 대가는 언제고 반드시 치러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백천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임소병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때, 그의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스쳤다.
"아아. 물론 갚아야지, 빚은⋯⋯."
"⋯⋯."
"그 누군가가 강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야. 뒈진 놈한테 빚을 갚을 방법은 없잖아? 안 그래?
"⋯⋯."
"솔직히 강남에서 사파 새끼 하나 뒈지는 걸 누가 신경이나 쓰겠⋯⋯."
"무상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가 뼈저리게 실감했다.
의욕에 찬 협의는 계략을 이길 수 없고, 잘 짠 계략도 미친놈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