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화. 저는 모르겠습니다. (1)
백천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인가? 그럴 리가.
분명 생각은 했다. 사패련 치하에 있는 강남의 주민들이 고초를 겪을 거라는 건. 그리고 그 고초가 상상 이상으로 힘들 거라는 점도.
하지만 생각한다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이해가 체감과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직접 이들의 삶을 눈으로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피부로 느끼기 전에는 이 모든 말들이 그저 막연하고 공허하게 뇌리에 떠돌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백천,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저 '힘겨움'이라는 한 단어로 적당히 얼버무려지던 것이 직접 겪는 이들에겐 피부에 닿는 위협이라는 것을.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짓누르고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만큼의 공포라는 것을.
임소병이 슬쩍 백천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뭐, 그게 장문대리의 탓이라는 건 아니지만⋯⋯."
"아닙니다."
백천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화산의 장문대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양민을 위해 검을 들었다고 자부하면서도 양민들이 실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건 분명 제 잘못입니다."
"⋯⋯왜 또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
임소병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강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결과적으로는 백천에게 협의에 대해 논한 모양새가 되어 민망해진 것이다.
"그⋯⋯ 내가 이런 말 할 주제가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 마음을 알아챈 듯 백천이 빙그레 웃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께서도 어린아이를 스승으로 삼아 부지런히 배우셨다 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 그 아이보다 못하셔서 아이에게 배움을 구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 삼자경(三字經)을 읽으셨습니까?"
임소병이 순간 반색했다. 이 무식한 화산 놈들의 입에서 공자의 고사가 나온 것을 보니 신기하고도 기뻤다.
백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께서도 아이에게 배우시는데, 제가 산적에게 배우지 못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뭐, 인마?"
순간 발끈한 녹림왕이 무어라 욕하려는데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려 형욱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자, 형욱이 화들짝 놀라 만류했다.
"무, 무사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무사님께서 대체 무슨 잘못을 하셨다고⋯⋯!"
백천은 자신이 한 잘못을 일일이 늘어놓지 않았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다짐 하나만을 전했다.
"길지 않을 겁니다."
"⋯⋯."
"사패련의 치세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언젠가는 새벽이 오는 법."
이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 새벽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불러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형욱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사님!"
"예. 저희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백천은 어떻게든 형욱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였다.
"쯧."
임소병이 심드렁하게 혀 차는 소리가 백천의 말을 끊었다.
의아해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임소병의 시선은 이미 백천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형욱을 빤히 바라보던 임소병이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이해를 잘못하신 모양인데."
"⋯⋯예?"
"나야 뭐 그런 인간이 아니지만, 여기 앞에 계신 이 신수 훤한 인간은 기분이 나쁘거나 수가 틀린다고 안면몰수 하는 양반이 아닙니다. 얼굴만 봐도 안 그렇습니까?"
"⋯⋯."
"그러니까 비위 맞출 생각 마시고, 본심을 말해 보십쇼. 그게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 양반이 대단한 양반이거든."
형욱은 조금 당황한 낯으로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그대로⋯⋯."
"혹시 압니까? 그쪽이 본심을 털어놓으면 이 상황이 하루라도 더 빨리 나아질지."
형욱이 슬쩍 백천의 눈치를 살폈다. 우물쭈물하던 그는 문밖을 슬쩍 보았다. 바쁘게 사람들에게 밥을 퍼 주고 있는 이들을 한참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순간 복잡 미묘해졌다.
뭔가 알아챈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는 그저 누군가를 도왔다는 기분만 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된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속엣말을 그대로 해 주십시오."
"아, 아니요. 제 본심이⋯⋯."
"부탁드립니다."
백천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형욱이 허겁지겁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어느새 도착한 조걸과 윤종, 그리고 남궁도위, 당패까지도 그 광경을 보고 차마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채 그저 눈치만 살폈다.
"⋯⋯본심이라고 해 봐야⋯⋯."
웅얼거리던 형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님."
"예."
"⋯⋯너무 기분 나쁘게는 듣지 말아 주십시오. 무사님께서 정말 좋은 분 같으셔서 쇤네같이 천한 것이 감히 한풀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형욱은 갈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얼굴로 잠시간 고민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믿겠습니까?"
"⋯⋯예?"
"저희가 무사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백천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건 이제껏 그가 느낀 것과 또 다른 충격이었다.
백천은 순간 멍한 얼굴로 형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무사님. 무사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욱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무사님⋯⋯. 저희가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 줄 혹시 아십니까?"
백천은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럽디다. 우리는 너희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우리는 너희를 진정으로 생각한다고."
형욱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어렸다.
"무관을 차리신 분들도, 관에서 오신 분들도 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요. 참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만⋯⋯. 그런데 왜 우리는 항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
"우릴 생각해 주신다는 분들은 다들 어디에 계십니까? 왜⋯⋯. 왜 그나마 살기 좋을 때는 그리 말씀하시다가, 사는 게 정말로 힘들어지면 다들 보이지 않습니까?"
형욱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지요?"
"⋯⋯예."
"무사님⋯⋯. 그 희망이라는 게 참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저희도 좋은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희망을 품었지요. 하지만⋯⋯ 그 희망이 실망이 될 때면 항상 느낍니다. 차라리 희망이라도 안 품었으면 나았을 것을. 그냥 원래 이런 것이다 생각하고 살았으면 그나마 덜 힘들었을 것을."
"⋯⋯."
"저희라고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믿었지요. 순진하게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세상은 이리되어 있고, 믿으라 하시던 분들은 다 저 강 건너에서 그냥 바라만 보십니다."
백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그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한 형욱의 표정이었다.
"참고 기다리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모자란 쇤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 쟁쟁하고 대단하신 분들께서⋯⋯ 왜 저 악적들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겁니까? 그렇게 우리를 생각한다고 하시던 분들께선 왜 저들과 싸워 주시지 않는 겁니까?"
"⋯⋯."
"이럴 때를 위해 없는 살림을 나눠 공양하고,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 다들 나 몰라라 발을 빼 버리고⋯⋯."
"그건⋯⋯."
백천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뗐다. 하지만 형욱이 그가 할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예, 압니다. 함부로 몇몇을 구하려다가는 대계를 그르칠 수도 있는 거겠지요. 윗분들의 깊은 생각을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무사님."
형욱의 시선이 의식 잃은 제 아비에게 가 닿았다.
"참 이상합니다. 무사님 같은 분들은 저희에게 항상 말씀하시거든요. 우리 같은 이들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같은 이들을 위해서 검을 들었다. 맞습니까?"
"⋯⋯예."
"그런데⋯⋯ 왜 항상 일이 생겼을 때는 우리가 가장 나중이 되는 겁니까? 왜 언제고 가장 마지막에 구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형욱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왜 우리는 죽어도 되는 사람이고, 고통받아도 되는 사람입니까? 왜 우리는 버러지처럼 빌어 대고 온갖 굴욕을 다 받으며 살아도 마지막에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 사람입니까?"
"⋯⋯."
"왜 우리는, 왜! 왜 우리는 그렇게 적선하듯 던져 준 작은 호의에 눈물 흘리며 감사해야 하고, 왜 그 뒷감당을 걱정하며 떨어야 하는 겁니까? 왜?"
점점 커져 가는 목소리 앞에,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희망을 가지라 하셨지요?"
"⋯⋯."
"무사님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무사님이 아니셨으면 저희는 이미 다들 산 사람이 아니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물에 빠진 걸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까지 탐내는 그런 후안무치한 놈들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 대해 무사님을 원망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지요."
형욱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하지만 무사님. 이 감사함 때문에 또다시 희망을 품기에는 저희가 본 것이⋯⋯. 그리고 겪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건⋯⋯. 예, 그건 너무 가혹한 말씀이십니다. 희망까지 품기엔 너무 버겁습니다⋯⋯."
백천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이라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제 아비조차 쓸모없는 늙은이라고 욕해야 했던 이에게 이 얼마나 안일한 말이었던가?
이해했다 생각했지만 이해하지 못했고, 알았다 생각했지만 알지 못했다.
백천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딱히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나, 그래도 무언가를 말해야 해서였다.
"저는⋯⋯ 그저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무책임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형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무사님."
"예."
"지금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바삐 어딘가로 가는 중이시지요?"
"⋯⋯."
"그리고 그건 정말 중요한 일일 겁니다. 그렇지요?"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 곧 떠나실 테지요. 여기서 할 일은 다 하셨으니까요."
그도 알아 버린 것이다. 형욱이 무슨 말을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무사님께서도 우리는 나중에 적당히 구해 줘도 되고, 이 정도만 해 주고 가면 되는 이들이라 생각하시는데, 더 중요한 이들은 따로 있다고 여기시는데⋯⋯. 다들 그렇게⋯⋯ 우리는 그사이 적당히 몇몇쯤은 죽어 나가도 되는 존재 정도로 취급하시는데."
"⋯⋯."
"저희가 무얼 믿고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건지⋯⋯.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