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25화 (1,226/1,567)

1225화.  이래도 되나? (5)

"다 됐어?"

"네. 이제 뜸만 들이면 돼요."

"음."

당소소가 싱긋 웃으며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유이설은 평소 사람을 재촉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뒤에서 알짱거리며 몇 번이나 물어오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애타시나 보네.'

당소소는 유이설이 은근슬쩍 마을 아이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제 어머니의 치마 뒤에 숨어서 이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애들이 배가 고플까 봐 그러시는 거에요?"

당소소가 묻자 유이설이 조금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힘들어."

"네?"

"배가 고픈 건."

"...... "

"어릴 때는 특히."

당소소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면 유이설도 어린 시절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루하루를 버티곤 했을 것이다.

당소소는 공감할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다 됐어요. 얼른 나눠 줄게요."

"응."

"그러니까 보고 계시지만 말고 그릇도 좀 가져오세요."

"그래."

접시를 가지러 쪼르르 달려가는 유이설을 보며 당소소가 작게 웃었다.

원래는 그들이 굳이 이런 일까지 할 건 아니었다. 목숨이야 구해 줬으니,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된다.

문제는 수레에 실린 곡식을 처리하는데 있었다. 사파 놈들이 수레에 실린 곡식을 들고 탈주한 것으로 위장하려면 이 곡식을 없애야 하는데,

적당히 먹어서 치우라고 해도 마을 사람 중 누구 하나 선뜻 이 곡식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사패련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조사할 만큼 한가하지 않단 걸 알면서도 본능적인 두려움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당소소가 팔을 걷어봍이고 나섰다. 평소 같으면 당소소같은 귀한 의원(?)이 아닌 조걸이 밥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조걸도 다른 일을 하는 중이니까.

슬쩍 해를 바라본 당소소가 곁눈질로 솥을 확인했다. 해야 하는 일이라지만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수레의 흔적을 지우고 나선 이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끝내지 못하면, 괜한 짓이 될 뿐이니까.

"됐어요! 다들 와서 드세요!"

"...... "

"어서요!"

마을 사람들이 그래도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솥을 연 당소소가 주걱으로 밥을 크게 일구었다. 그러고는 유이설이 가져온 그릇에 푸짐하게 퍼 담았다.

"여기 있어요! 얼른!"

"...... "

그래도 차마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을 빤히 바라보던 유이설이 손을 뻗어 당소소가 푼 밥을 한 움큼 집었다. 그리고 제 입에 쿡 쑤셔 넣었다.

"사, 사고."

볼이 터지도록 밥을 넣고 우물우물 씹은 유이설이 꿀꺽 밥을 삼켰다. 슬쩍 마을 사람들을 본 그녀는 다시 밥을 커다랗게 움켜 쥐었다.

"저, 저희도...... "

그제야 마음이 급해진 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이설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겁을 먹은 이들을 당소소가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자, 자! 어서 오세요! 저희 사고가 생각보다 많이 먹거든요. 얼른 가져가시지 않으면 사고가 다 먹을 거에요."

"가, 감사...합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 당소소가 퍼 주는 밥을 받아 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찬도 없는 맨밥에 불과했지만, 허기가 지독했는지 밥을 먹는 움직임이 다급했다.

너덜너덜한 옷자락 사이로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났다. 이를 본 당소소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곡식은 얼마든지 있으니 더 드세요! 제가 가져온 곡식은 아니지만요."

"가,감사합니다!"

당소소는 기운찬 얼굴로 빠르게 밥을 퍼 담기 시작했다.

촌장의 집에 있던 백천이 문밖의 상황을 보다 입을 열었다.

"...... 상황이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그러자 자신을 형욱이라 소개한 장년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드리는 게...... 조금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이렇게라도 곡식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 "

조금 전 사패련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걸 감안하면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추 감이 왔다.

"한 달....... 아니, 보름만 더 주렸으면, 칼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 굶주려 죽을 판이었습니다."

"화전에 잘 안 되었습니까?"

형욱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실 지 모르겠지만, 화전으롷 먹고 사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화전도 일구면서 산에서 나는 여러가지를 캐어 산 아래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곡식을 사오지요."

"예. 그렇죠."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곡식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당연히 곡식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나중에는 그 곡식조차 장에 나오지를 않으니 아무리 약초를 캐 가도 사주는 사람도 없고,

사 주는 이가 있어도 그 돈으로는 곡식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 "

몇 해 전이라고 하면 뻔하다.

강남불침. 강남을 사파가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래도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텼지만...... 이제는 정말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

안색을 굳힌 백천이 다시 물었다.

"이곳이 산이라 더한 겁니까?"

그 말에 형욱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무사님. 저희는 차라리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 예?"

"그래도 저희는 산간벽지에 있는 이들이라,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이들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큰 곳에 하는 이들은 정말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백천이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걸신들린 듯 밥을 먹어대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앙상한 몰골을 보고 있자니 가엾다 못해 마음이 비참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상황이 오히려 나은 편이라고?

그럼 대체 다른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 행패라는 게 ...... 혹 사패련의 행패 말입니까?"

사내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운 모양이었다.

"한 번씩...... "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장에 가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 시신이 그냥 널려 있습니다. 반쯤 썩은 시신들이요."

"...... "

"사람이 굶어 죽었는데, 그걸 치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거지요."

"어떻게 그런...... "

"본인들도 기력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치워 봐야 어차피 또 누군가가 죽을 테고요."

백천이 멍한 얼굴로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임소병은 어깨를 으쓱했다.

"뭘 새삼스레. 짐작하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장일소는...... 장일소의 목적은 강북을 집어삼키는 것이잖습니까. 그런 놈이 어째서...... 이건, 이런 건 아무런 도움도...... "

"예. 맞습니다. 장일소는 그렇죠."

그 말에 백천이 입을 다문다. 임소병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패련의 다른 부련주들은 그렇지 않지요. 그들은 애초에 강북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정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적당히 수탈하던 곳이 제 손에 완전히 떨어졌다는 게 더 중요하지요."

"이해가...... 안 갑니다."

백천은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사파라고는 하지만...... 도리도 모르고, 지켜야 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사파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세력의 우두머리가 된 이라면 멍청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자신들이 속한 곳을 수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애초에 무인이란 평범한 이들에게 들러붙은 기생충이나 다름없다. 검만 휘두르고 무학만 익히는 이들이 무슨 수로 먹고 살겠는가?

정파는 제 지역에 있는 이들이 주는 후원금과 그들이 이용해 주는 상점에서 돈을 벌어 본산을 운영한다.

그런데 그 지역의 사람이 씨가 말라 버린다면 대체 어디서 돈을 벌어 본산을 유지하겠는가?

"저들이라고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녹림도 사파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수탈하지는 않지요."

산을 오가는 이들이 줄어들면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는 쪽은 녹림이다. 그렇기에 녹림도들은 웬만해서는 산을 오가는 이들을 상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그 도리를 어기는 쪽을 단죄하는 건 관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녹림이었다. 산적이라는 것들이 어디서나 사람을 죽여 대고, 크게 재물을 털어 다른 산으로 달아나는 일이 반복되면 녹림은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산을 두고 서로 싸워 대는 산적들의 내분으로 망해버릴 테니까.

"분명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이번에는 경우가 달랐죠. 잊으셨습니까? 사패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 "

"확실히 제 기반이 사라지면 사파고 정파고 존속이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그런 걸 고려할 상황이 아닙니다. 어차피 패해서 적에게 먹히면 기반이고 뭐고 다 뺏기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그제야 이해가 간다.

흑귀보에 하오문, 심지어 저 수로채마저 언젠가는 자기들끼리 승부를 벌여 사패련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수장 자리를 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뒤를 보지 않고 있는 대로 자금을 끌어들이고, 군량을 비축한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행패를 부리는 건요?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잖습니까?"

"도장. 잊으시는 모양인데, 사파는 원래 그런 것들입니다. 멀쩡하게 지킬 걸 지키며 사는 이들이 사파에 투신하겠습니까?"

"...... "

"평시라면 윗놈들도 적당히 자제시켰겠죠. 하지만 곧 전쟁이 벌어질 판인데, 아랫놈들을 억지로 통제해 사기를 줄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다른 곳이 더 낫다고 판단한 놈들이 이탈해 버리면 손해뿐인데."

"아니...... "

"만인방 정도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통제가 가능하겠지만, 다른 신주오패는 불가능합니다."

백천은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되는 듯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해는 하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보며 임소병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 "

"강북에 그만한 혼란이 있었으면, 강남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 못 하셨을 분들이 아닐 텐데요. 이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강북으로 밀려난 놈들조차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더 독한 놈들을 상대로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재라도 집어삼킨 듯 속이 쓰려 왔다.

그들은 그저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다.

강남불침 조약 후, 강북으로 쫓겨 왔던 이들 때문에 그토록 민심이 흉흉해진 걸 봤으니,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거늘......

강남으로 향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해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우려는 조금도 없었다. 그 사실이 백천을 더없이 부끄럽게 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실 건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지긴 할 겁니다. 도장의 말대로 장일소는 멍청이가 아니고, 사패련 내부에선 이미 세력 정리가 끝난 상황이니까요.

아마 이제는 적당히 관리를 시작하겠죠. 이번에 곡식을 뿌려 댄 것처럼 말입니다."

"...... "

"하지만."

임소병의 차분한 목소리가 더없이 날카롭게 백천의 귀를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짧은 변덕만으로도 내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공포, 힘이 없으니 무슨 일을 당해도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두려움, 그로 인한 무력감과 절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사패련의 치세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