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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23화 (1,224/1,567)

1223화.  이래도 되나? (3)

"아버지! 눈 좀 떠 보세요, 아버지!"

백천은 오열하는 장년인의 등을 멍하니 보았다.

'아버지?'

저 촌로가, 저 사내의?

조금 전까지 저딴 늙은이의 목숨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했던 사내의 아버지라고?

"의,의원님! 의원님! 제발 저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지,진정하세요. 이러시면 방해돼요!"

당소소도 놀랬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처는 깊지 않아서 잘 버티면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선은 진정 좀 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사내가 땅에 연신 머리를 찧어 댔다.

"이분이......"

차마 묻기가 두렵다는 듯 한차례 망설이다 힘겹게 다음 말을 입 밖으로 밀어 냈다.

"...... 이분이 귀하늬 아버님 되십니까?"

사내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저딴 늙은이'를 입에 담으며 비굴하게 웃던 자의 얼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 예, 저의 부친이십니다."

"그,그런데 어떻게...... "

그런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제 아버지를 칼로 벤 악적 앞에서 아비를 비하하고 비굴하게 빌 수 있는가?

물어서는 안 될 말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백천은 도무지 묻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질문에 사내가 오열하며 대답했다.

"그럼...... 그럼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

사내가 울며 의식을 잃은 제 아비를 내려다보았다. 그 두 눈에 어린 죄악감이 백천의 가슴을 찔렀다.

"생각 같아서야 천 갈래, 아니, 만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지요! 당장 내 아비를 살려내라고 물어뜯기라도 하고 싶지요! 저도 사람인데 어떻게 안 그렇겠습니까!"

"...... "

"하지만 그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남은 이들마저 모두 죽어 나갈 뿐이잖습니까, 모두!"

사내가 제 아비의 손을 움켜잡았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야지요. 저도 힘이 있으면 참지 않습니다. 제가 힘이 있었으면 원수에게 비굴하게 빌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뭘 어떻게 합니까? 힘이 없는 것을.

힘이 없는 놈이 살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면 원수의 발이라도 핥아야지, 뭘! 뭘 어쩌겠습니까! 뭘!"

처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건 울분이고, 또 한이었다.

"무지렁이는 그렇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당해도 참고, 억울해도 삭이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안 그러면...... "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전까지 저 사내를 힐난했던 자신의 혀를 쥐어뜯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사내가 어떤 심정으로 원수에게 고개를 조아렸는지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대체 뭘 안다고 함부로 사람을 평가했단 말인가?

"크흡......"

한참 오열하던 사내가 소매로 제 얼굴을 벅벅 훔치더니, 백천을 향해 다시 깊게 절했다.

"감사합니다."

"이,이러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저들이 사패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희 같은 촌것들을 위해 나서 주셨는데, 제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덕문에......덕분에 이 질긴 목숨 조금이나마 더

연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백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당신들의 목숨값을 재고 있었다고 고함을 쳐 버리고 싶었다.

이곳에 있는 수십의 목숨과 그들에게 닥쳐올 위험 중 어느 것이 더 중한지 저울에 올려놓고 있었다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백천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사파 놈들을 묵사발 내 버린 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도 어깨 너머로 돌아가는 정황을 들었는지 표정이 무겁고 어두웠다.

"감히...... 제가 감히 은공들의 신분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

무언가를 말하려던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묻지 마십시오."

"...... "

"혹시 만에 하나라도 일이 생긴다면, 그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사내도 그 뜻을 이해했는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사내는 엎드린 채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백천은 차마 그 모습을 더 보기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그때 조금 심드렁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어떤데?"

"...... 조금 위중해요. 상처는 깊지 않은데, 워낙 고령이라 체력이 버틸지 걱정이에요."

"어이, 큰 당."

"......예?"

"요상단 있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하나 줘. 꼭 요상단 아끼는 놈들이 다 처먹지도 못하고 뒈지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다 쓸걸, 하면서."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당패가 작은 단환 하나를 꺼내 당소소에게 내밀었다.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상단을 받아 들었다.

당가의 비전으로 제조한 귀한 약이니, 촌로가 상처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

"예, 도장."

자신을 부르는 걸 알아챈 남궁도위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저 새끼들은?"

"......일단 제압해 뒀습니다."

죽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청명이 살짝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단전 부수고 사지 근맥 잘라. 살아나도 사람 구실 못 하게."

"......예?"

"왜? 못 하겠어?"

남궁도위는 청명을 물끄러미 보다 이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쓰러진 이들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입매를 굳혔다.

이게 그가 사파 놈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이유다.

사파 놈들이 저들끼리만 서로 죽여댔다면 청명은 사파를 나쁘게 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건 서로가 합의한 것이니까.

하지만 사파의 칼은 힘을 가진 이와 힘이 없는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통제없이 휘둘러지는 힘은 누군가에겐 손도 써 볼 수 없는 재앙이 되기도 한다.

더 큰 거악을 밀어 내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변명으로 방치된 작은 악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

무너진 이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또 누군가의 친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등신이 다 됐네.'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저 빌어먹을 놈이 노인을 베기 전에 튀어 나가 단숨에 목을 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깐 망설였고, 그 망설임이 이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변명? 물론 있다.

아무리 양민을 보호하는 것이 쳥명이 검을 익힌 사명이라고는 하나, 그가 보호해야 할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마저 망설인다면, 제 목숨과 지켜야 할 다른 모든 것을 위해 참아 버린다면, 이들의 목숨은 대체 누가 지켜 준단 말인가?

청명은 촌로를 바라보는 천우맹 일원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의로운 일을 했지만, 모두의 얼굴엔 오히려 뿌둣함이 아닌 무거운 감정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도 어쩌면 청명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자신에 대한 자괴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 새울 거야?"

청명의 말에 다들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치료할 사람은 치료하고, 남은 사람들은 여기 정리해. 낭비할 시간 없어."

"예, 도장."

"수레는 산 아래에 적당히 가져다 놓고, 바퀴 자국 전부 지워. 이 마을에 누가 들어왔었다는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마."

"예."

"저놈들은 어떻게 합니까?"

정신을 잃은 사파 놈들을 흘끗 본 청명이 살짝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장년인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동굴 같은 거 있어요?"

"도,동굴이라시면?"

"아무것도 없는 동굴이면 돼요."

"...... 동굴이야 넘쳐나지요. 여기는 산골이니...... "

"안내 해 줄 적당한 사람 하나 붙여 주세요. 사형들."

"그래."

"이 새끼들 동굴에 처넣고 입구 막아버려."

"그럼 죽을 거다."

"죽든지 말든지."

"...... 알았다."

윤종과 조걸이 다른 이들과 함께 수습을 위해 움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은 쓰러져 있는 촌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가의 요상단이 그새 효과를 발휘했는지, 창백하게 질렸던 안색이 조금이나마 제 빛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사숙."

"...... 그래."

"할 일은 해야지."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도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심정을 알고 있기에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도 화산을 떠나 양민들의 실상을 마주했을 때는 백천과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니까.

양민들을 도와야 한다. 협의란 힘없는 자를 위한 것이다.

수도 없이 듣고 배우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힘이 없기에 억울함을 감내해야 하는 양민들이 실상을 제대로 접하고 나서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웠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나의 작은 망설임과 주저함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거대한 절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혐의란 더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백천이 문득 시선을 돌리니, 아직 이쪽으로 차마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이 보였다. 상황이 여기까지 정리되었음에도 차마 천우맹 일행의 주변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흙 때 묻은 면면들에 어린 두려운이 훤히 보였다.

백천의 입에서 순간 탄식이 새어 나왔다.

협을 행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추앙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겨 왔다. 물론 그런 걸 바라서 협을 행하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히 따라오게 될 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명백한 협을 행했음에도 돌아오는 시선은 여전히 두려움과 우려로 가득했다.

불쾌한 게 아니다. 그저 안쓰러웠다.

악의가 없다는 걸 몰라서 저러는 게 아니다. 알고 있음에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기분에 따라 남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저들은 평생을 그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청명아."

"왜?"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

백천이 바지런히 흔적을 지우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이런저런 정황들을 다 따졌을 때는 큰 위험을 초래할 확률이야 크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나서지 않은 것에 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일로 인해서 이번 임무에 실패하거나,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상처 입는다면, 어쩌면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 "

"그런데 말이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걸 다 아는데도, 아마 같은 상황을 마주하면...... 그때도 나는 뛰쳐나갈거다."

청명이 씨익 웃었다.

"그래."

"...... "

"그거면 됐어."

사람이란 어쩌면 평생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고 싶지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흔들리지 않는 이정표다.

"그거면 충분해."

백천의 마음 속에 곧은 이정표가 분명하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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