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화. 이래도 되나? (2)
움찔. 움찔.
섭평은 땅에 얼굴을 처박은 채 기이하게 경련했다. 사패련의 무사들은 순간 당황하여 그런 섭평의 등짝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눈으로는 보았으되, 그 상황을 머리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릴 때. 너무도 급격한 상황의 변화를 머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때가 말이다.
물론 그들에겐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이 인적 드문 산골 한복판에서 갑자기 난입한 이가 다짜고짜 섭평을 걷어차 날려 버렸으니 얼이 빠지지 않으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니 원래는 천우맹 쪽에서 뭔가 말을 해 줘야 하겠으나, 문제는 지금 천우맹 쪽도 뭐라고 입을 뗄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까지 참지 못하고 땅을 박찬 순간, 적어도 조걸이나, 윤종, 백천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백천은 입을 열어 버렸다.
"그...... 어...... "
그는 경련을 일으키는 섭평과 으르렁대고 있는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래도...... 되나?"
"...... "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대답하면 안 될 사람이 대답했다.
"뭘?"
너무 태연한 청명의 답에 백천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거나 헷갈리고 있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아, 아니. 내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건 아는데...... 그래도 ...... 여기 강남인데."
"뭐가 문제야. 저 새끼들이 다 설명해 줬는데."
"응?"
청명이 쓰러진 이를 가리켰다.
"여긴 산골벽지고."
"어."
"소식이 퍼지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테고."
"...... "
"우리는 적어도 사흘 내로는 해남에 도착할 건데."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때 가서 사파 새끼들이 알면 뭘 어쩔 건데?"
......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고......
"그래도 쫓아오기라도 하면...... "
"아이고, 사숙."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사파 새끼들이 무슨 대단한 의리가 있다고 이런 조무래기 새끼들 복수를 한답시고 해남까지 쫓아오겠어. 그럴 의리가 있으면 사파 새끼가 아니지."
"...... "
"그리고 쫓아오려면 그러라고 해. 모조리 바다에 처넣어 수장시켜 버리면 그만이야!"
아...... 너 그게 본심이구나. 이해했다.
그때 조걸이 히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 뭐...... 일이 이렇게 돼 버렸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사숙?"
그리고 윤종 역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검을 뽑아 들었다.
"이왕 벌어진 일, 수습이라도 잘할 수밖에요."
백천은 멍하니 앞으로 나선 두 사람을 보았다. 둘은 마치 백천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태연하게 대화했다.
"뭘 어떻게 해야 잘 수습하는 걸까요, 사형?"
"멍청한 질문이구나. 생각해 봐라. 저들 중 누군가가 돌아가 우리에 대해 말을 늘어놓는다면 상황이 아주 많이 곤란해지겠지."
"호오. 그건 확실히 안 될 일이죠."
"그러니 별수 없는 일 아니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게 깔끔하게 정리하는 수밖에."
"그거 조금 잔인한 말씀 같은데?"
"악을 단죄하기를 두려워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협의란 내 작은 양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조걸이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들의 몇 걸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도위가 사패련 잔당들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 이왕이면 이들이 여기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숨길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의 얼굴에 대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은 음산한 표정이 스쳤다.
"흔적조차 없이 증발한다면 곡식에 욕심을 내서 단체로 탈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당패는 고개를 슬그머니 남궁도위의 반대쪽에서 사파인들을 포위해 들어갔다.
"...... 옳은 말이로군. 걱정하지 마라. 흔적을 지우는 건 우리 가문의 특기니까.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당패가 소매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들고 빙그레 웃었다. 얼핏 보기에는 더없이 사람 좋은 얼굴이었지만, 그가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절대 그리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 물론 그 약병의 정체를 모르는 이들이라고 해서 무작정 좋게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포위당한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는 꼴을 보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급적 깔끔하게 처리해서 흔적을 없애야 한다는 거로군."
"최대한 조용하게 말이죠."
"이왕이면 마을 사람들한테 피해가 안 가게, 죽는 게 아니라 실종으로 처리하는 게 좋은 거고?"
"뭐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사악한 정파인들이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연약한 사파인들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기세에 질려버린 사파인들은 당혹한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경계했다.
"너, 너희는 누구냐!"
"우리?"
"가, 감히 사패련의 행사를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
"저 새끼 진짜로 등신인가? 이미 방해는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더 확실하게 묻으려고 하겠지. 지금 상황 판단이 안 서나?"
"쯧쯧. 걸아. 머리가 있는 놈이 사파를 왜 하겠느냐?"
"그럼 녹림왕은요?"
"...... 그 분은 예외로 하자꾸나."
분명 사패련의 이름을 들어 협박하는 건 천하의 어느 곳에서도 통할 만한 방법이었다.
안타까운 건. 이들이 만난 게 하필 그 사패련 이름을 앞세운 협박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천하의 몇 안 되는 인간들이란 점이었다.
"그럼 뭐...... 결론은 난 것 같은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
결국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백천이 대충 턱짓으로 악붕을 가리켰다.
"조지십쇼."
"예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레를 포위한 악적(?)들이 연약한 이들을 향해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었다.
백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지켜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망설이다 조금 늦은 것뿐이지, 애초에 여기 있는 이들은 저런 사패련의 일개 조무래기들을 상대하기에는 과해도 너무 과한 전력이다.
한 사람만 나서도 모두를 쓸어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텐데, 그런 이들이 열이나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수레에서 눈을 뗀 백천이 고개를 돌려 쓰러진 촌로를 바라본다. 이미 당소소가 달라붙어 상처를 지혈하는 중이었다. 낯빛을 살짝 굳힌 백천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좀 어떠하냐?"
"...... 상처가 예상만큼 그리 깊지는 않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워낙에 연로해서......"
"아버님. 저희 아버님을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촌로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던 아낙이 그 말에 반쯤 경기를 일으켰다. 백천이 한숨을 내쉬며 위로하려 할 때였다.
"저기......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슬쩍 돌아보았다.
조금 전 사패련 놈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실대던 장년인이 이번엔 백천을 향해 굽실대고 있었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 사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깟 늙은이의 목숨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했던가?'
물론 이해는 한다. 강도가 칼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바른말을 하는게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제 목숨 하나 구하자고 함께 살아가던 마을 사람을 그런 식으로 까내렸던 모습을 어찌 좋게 보겠는가?
"나,나으리. 시,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으리들께서 어떤 분들이신지 소인이 가,감히 여쭤도 되겠습...니까?"
"지금 치료 중이라......"
"나,나으리. 저희 같은 무지렁이를 뭐하러 그렇게...... 그 귀한 손으로 하실만한 일이 아닙니다요."
...... 그게 지금 부상 입은 이웃을 두고 입에 담을 만한 말인가. 어떻게든 비위를 맞추려 용을 쓰는 모습에 살짝 짜증이 치민 백천이 저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답했다.
"저희도 저런 놈들일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십니까?"
"하,하이고, 나으리!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소,소인은 그저 못 배우고 무식해서...... 귀인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금방이라도 이마를 박고 넙죽 엎드릴 것 같은 그 한심한 모습에 한마디 쏘아붙일까 했던 백천은 이내 나직이 한숨만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백주 대낮에 칼을 차고 다니며 사람을 향해 휘둘러 대는 무인들이 잘못한 것이지.
"신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나쁜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그럼 혹시......"
사내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렸다. 그러더니 정말 무서운 말을 꺼내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혹시 강북에서...... "
백천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자 장년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그럼 지금...... "
백천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천우맹 일행은 분명 이들을 도왔다. 이들이야 알기 어렵겠지만, 이 결정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한 것이던가?
그런데 이들은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혹시나 닥쳐올지 모르는 사패련의 보복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미 차디찬 고혼이 되었을 이들이.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해도, 일단은 고맙다는 한마디를 먼저 하는 게 도리이고 예의가 아닌가. 아니면 하다못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이웃의 상태를 먼저 살피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뭐라 말하기 어려운 환멸이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버럭 고함을 쳐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화를 내는 대신에 최대한 정중히 설명했다.
"...... 마을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희가 최대한 뒷마무리를 잘하겠습니다."
"예?"
"수레를 적당히 옮겨 산 아래에다 내려놓고 사람의 흔적만 없앤다면 사패련도 이들이 재물을 들고 달아났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에게 당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너,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
"당연히 그리해 드릴 것입니다."
"아이고, 나으리! 너무 감사합니다. 그,그럼 저희가 그 대가로 뭘 드려야......"
"......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예?"
백천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딴 말을 늘어놓을 시간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촌로의 상태나 한 번 더 살피는 게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겨우 다시 내려갔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 놓으십시오. 저곳에 있는 곡식도 마음대로 드시면 됩니다. 단, 사패련 놈들이 나중에 확인할 수도 있으니 조심은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제 됐습니까?"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돌려 수레 쪽의 상황을 살폈다.
달려든 오검과 문주들이 사파인들을 쥐잡듯 때려잡는 모습까지 확인하고서야 그는 쓰러져 있는 촌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칼에 베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느냐고 백천이 한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아...... "
사내의 입을 벌어졌고, 얼굴이 삽시간에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일그러졌다. 그는 이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촌로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으아아아아! 아버지이이이이!"
백천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