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화. 이래도 되나? (1)
조걸이 핏발 선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윤종의 손이 그의 어깨를 꽉 누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에 무어라 소리를 내질렀을 테지만, 조걸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일을 크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앞을 응시하는 윤종의 눈이 더없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우드득.
윤종이 이 갈아붙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는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 기다려."
"...... "
조걸은 말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마을을 쏘아보았다.
"아, 아버님! 아버님!"
촌로의 뒤쪽에 서 있던 촌부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촌로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쩍 벌어진 가습에선 선지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아버니이이이임!"
마을 사람들 모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들 중 누구도 소리를 내어 항의하거나 욕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사내가 든 칼이 너무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 너 미쳤어?"
그런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항의해 준 것은 이곳에 함께 온 사내의 동료였다.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가 소매로 제 얼굴에 튄 피를 쓱 문질러 닦더니 피식 웃었다.
"미쳐 보이나?"
"......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은? 우리가 받은 명령은 곡식을 나눠 주고 련주의 은혜를 제대로 알리란 거였잖아."
"...... "
"그 다음에 어쩌란 말은 없었지. 그러니까 나는 명령을 어긴 게 아닌 셈이지."
"이 미친놈이...... 그걸 말이라고 해?"
문사풍 사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는 아냐, 악붕? 윗놈들이 이걸 알면 네가 무사할 것 같아?"
"어떻게 알 건데?"
"...... 뭐?"
"어떻게 알 거냐고."
악붕이라 불린 이가 히죽 웃었다.
"이 산간벽지에 있는 마을 하나가 없어지든 말든, 그걸 잘나신 윗분들이 어떻게 알 거냐고?"
"...... "
"임무는 수행했다니까. 그런데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우리 탓이 아니잖아?"
문사풍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 것이다.
"굳이...... "
"아니, 생각을 해 보라고. 여기가 산골에 처박혀 있는 작은 마을이니까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을 보낸 거잖아."
조무래기라는 말이 듣기 좋은 건 아니지만, 사실상 그렇게 틀린 말을 아니었다.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제대로 곡식을 나눠 줬는지 아닌지 윗놈들이 알게 뭔가?"
"빌어먹을, 곡식을 팔아먹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팔려고 마음만 먹으면야 어디든 못 팔아? 그리고 굳이 팔 필요도 없지. 지금 강남 땅이야 쌀이 돈보다 귀한 곳 아닌가? 그냥 곡식만 가져가도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을텐데."
"....... "
"우리가 목 좀 축인다고 뭐가 잘못된 것도 아니잖아? 잘못된 건 제대로 녹봉도 안 주면서 사람을 부려 처먹는 놈들이지."
문사풍 사내가 입맛을 다신다. 그의 얼굴은 그새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뒷감당이 되려나...... "
"답답한 소리 하기는. 입을 열 놈이 남아 있으면 윗놈들이 알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우리가 돌아가고 나서 우연히 마을에 일이 터질 수도 있잖아.
녹림 잔당 놈들이 마을을 덮쳤다든가, 호환이 닥쳤다든가. 안 그러냐, 얘들아?"
그 말에 수레 뒤에서 수행하던 이들의 눈이 스산해졌다.
"이 다음에 가는 곳이 형양이라며?"
"그런데?"
"형양이면 좀 큰 도시니 놀 곳도 있겠지. 적당히 처리하고, 곡식 챙겨서 기루도 좀 가고! 간만에 목 좀 축이자고, 목 좀!"
그 말이 결정타였던 모양이다. 뒤따르던 이들에게서 기이한 열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문사풍의 사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하...... 아무래도 불안한데......"
"불안은 지랄.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됐어? 만인방 소리만 들어도 오줌이나 지리고 자빠졌네."
"말 다 했냐?"
"만인방이 뭐? 우리는 흑귀보야! 그 마교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대부께서 그렇게 쉽게 당하셨을 것 같아?"
"...... "
"운 좋아서 사패련 새끼들이 떵떵거리는 걸 지켜만 보는 것도 속이 뒤집히는데, 말 잘 듣는 개새끼까지 되라는 거야?"
"쯧."
사내가 쓴 물을 삼킨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계속해서 물어붙이던 악붕이 말투를 슬쩍 바꾸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안 들키면 되는 일이지, 안 들키면. 안 그래?"
"......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큭큭. 그거야 내 전문이지."
의견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악붕이 소리를 높였다.
"얘들아! 기왕 이리된 것 조금 서둘러야겠다! 그래야 너희도 놀 시간이 생기지!"
대답조차 필요 없었다.
그 말만으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알았는지, 수레 뒤쪽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마을 사람들을 둥글게 포위했다. 한 사람도 달아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문사풍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안 어울리게 사람 수를 꼼꼼하게 세더라니."
"흐흐. 확실한 게 좋은 거지. 확실한 게."
그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본 조걸이 으르렁대며 짓씹듯 말했다.
"...... 사형."
"기다려라."
"사형."
"기다리라고 했다."
윤종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이 희게 질리다 못해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저들을 박살 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니고 강남이다.
그들이 생각없이 벌인 일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이의 목숨이 걸려 있을지 알 수 없다.
"나서지...... 마라."
"사형!"
조걸이 애타는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종의 눈은 이번에도 조걸에게로는 향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앞에 있는 백천의 등이었다.
'사숙.'
판단을 내리는 건 윤종이 아닌 백천이다.
숨을 죽인 와중에도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와 검을 만지작대는 소리가 어지럽게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아래에서 악붕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게, 어울리는 일을 시켰어야지. 차라리 민가 습격해서 적당히 떼먹을 것 떼먹고 남은 돈 가져오라고 했으면 누구보다 충실하게 해 드릴 용의가 있었는데 말이야.
개한테 풀을 뜯으라고 하면 쓰나."
그 말에는 문사풍의 사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이 적당히 녹봉을 받고, 수련하고 번을 서는 일에 만족하고 살 이들이었다면 사파에 투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기에 사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그들더러 정파인들처럼 살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건 상부가 잘못한 게 맞지.'
속으로 합리화를 마친 사내가 씹어뱉듯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칼 쓰지 마."
"응?"
"시신이 너무 없어도 이상하잖아. 손으로 뜯어. 산짐승이 습격한 것처럼 만들라고."
"큭큭. 하여간 잔머리는."
그 말을 들은 악붕이 낄낄 웃으면서 칼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조금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무공도 모르는 양민들 정도야 맨손으로도 찢어 죽일 수 있다.
"나,나으리들. 왜 이러십니까......"
달아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었다.
그리고 개중 눈치가 좀 있는 이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빠르게 알아챘다.
"사,살려 주십시오!"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린 그는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받았습니다! 저, 저희는 그 곡식을 받았습니다!"
"응?"
"나으리들께서는 저희에게 곡식을 주고 가셨지만, 저희가 멍청하여 그 곡식을 숨기려다가 분실했습니다!"
"호오?"
문사풍의 사내, 섭평이 두 눈에 이채를 띠며 엎드린 장년인을 빤히 보았다.
"그리 말하겠습니다! 누가 물어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 말을 하겠습니다! 그, 그럼 나으리들께서도 더 떳떳하실 수 있잖습니까?"
"재밌는 놈이군."
섭평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우린 벌써 저 늙은이에게 칼질을 해 버렸는데?"
"어차피 살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 하나 죽은 게 뭐 그리 대수입니까? 적당히 묻어 버리면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이야...... "
섭평이 놀랐다는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아니라면 절벽! 절벽에다 던져 버리겠습니다. 그럼 칼에 맞아 죽은 줄 아무도 모를 겁니다!"
섭평이 감탄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 사내가 하는 말대로라면 그들이 정말 편해질 수 있다.
"그럴 수 있겠느냐?"
"무,물론입니다. 나으리! 저희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저희 같은 무지렁이는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복수하고 싶지는 않고?"
"저, 저 늙은이 따위의 목숨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복수를 입에 담겠습니까?"
"...... 너희가 입을 떼면 우리가 귀찮아질 수 있는데."
"나, 나으리. 저희는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들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 나으리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저희가 어찌 목숨이 붙어 있겠습니까?"
"이런 산골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이군."
섭평이 혀를 내둘렀다.
이 일이 들킨다고 해도 이곳으로 온 이들 모두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만인방이 잔혹하다 해도, 지금 사패련은 사람이 부족하니까.
그리고 이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이 마을은 반드시 그 보복을 받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입을 다물어 버리겠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렇게만 해 준다면 우리야 편하지."
"그, 그럼...... "
"그런데 말이야."
섭평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봐도 너는 지나치게 똑똑하단 말이지."
"나, 나으리?"
섭평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나는 너 같은 놈을 살려 두고 찝찝해하느니, 조금 귀찮은 걸 감수하는 사람이거든. 너희를 다 죽이는 일이라고 해 봐야 내게는 조금 귀찮을 정도일 뿐이지."
"이...... 이 개 같은 놈들......!"
장년인의 두 눈에 원독이 차올랐다.
"지옥에서도 저주하겠다! 이 개보다도 못한 사파 놈들아!"
"오냐!"
두 눈에서 살심을 피워 낸 섭평이 땅을 박차며 단숨에 장년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의 양 손에서 시뻘건 경기가 치솟았다.
"안...... "
결국 윤종과 조걸, 그리고 남궁도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땅을 박찼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이 본 것은, 그들보다 더 빠르게 섭평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하는 백천의 모습이었다.
'사, 사숙!'
한편 앞으로 박차고 나간 백천의 두 눈은 안타깝게 뒤흔들렸다.
'아, 안 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망설인 탓에, 반보가 늦었다. 이대로라면 저 장년인이 참살당하는 걸 막아 낼 수 없다.
'빌어먹을!'
참든가 나서던가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망설인 끝에 둘 모두를 잃을 판이다. 백천이 터져 나오는 울분을 못 참고 노호성을 내지르려던 바로 그 순간!
"근데 이 사파 새끼가!"
콰아아아앙!
장년인에게 달려들던 섭평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 섭평은 땅에 처박히더니 이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백천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치솟은 먼지구름 속에선 사파보다 더 사파 같은 얼굴의 청명이 이를 갈아대고 있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진짜 뒈지려고."
...... 어,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못 참았는데, 네가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허허......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