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화. 누가 돕겠는가? (5)
좁다란 소로를 통해 위태하게 움직이는 수레를 지켜보던 이들이 최대한 속삭이며 말했다.
"...... 수레에 뭐가 실린 것 같은데?"
"곡식 같습니다."
"사패련이 왜 곡식을 싣고 가지?"
"징발한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징말한 것이라면 반대쪽으로 가야지."
"...... 그렇네요?"
모두의 눈에 의문이 담긴다. 하지만 그 의문은 그리 오래지 않아 풀렸다. 수레를 끌고 가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수레 앞쪽에 타고 있던 인상 험악한 이가 한껏 짜증 실린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우리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 건지!"
그러자 뒤를 따르던 문사풍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시키면 해야지. 별수 있나?"
"납득 가능한 일을 시켜야 할 것 아니냐고! 내 살다 살다 저 무지렁이들을 터는 일도 아니고, 되레 곡식을 나눠 주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나 원 황당해서."
그 순간 천우맹의 일원들은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곡식을 나눠 준다고?'
'사패련이?'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그들이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대화가 이어졌다.
"장일소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쉿!"
험악한 사내가 흥분하여 선을 넘자 옆에 있던 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주변을 획획 돌아보았다.
제풀에 놀란 천우맹 일행이 덩달아 바짝 몸을 낮추며 기척을 한층 더 철저히 감췄다.
"이놈이 미쳤나!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딴 말을 입에 담아!"
"무슨 꼴을 당하기는 무슨 꼴을 당해! 여기에 우리 말고 누가 있다고!"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그런 식으로 지껄여 대다가는 한 달도 지나기 전에 목이 내걸릴 거야!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알고."
"...... 빌어먹을."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이를 뿌득뿌득 갈아붙였다.
"우리가 먹고 죽을 것도 모자란데, 이 귀한 곡식을 저 무지렁이들에게 퍼부어 주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윗분들이 나름 생각이 있으시겠지."
"생각? 그럼 만금대부께서는 생각이 없으셨다는 말인가?"
"어허! 그 이름은 또 왜 꺼내!"
만금대부라는 말이 나오자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겁이 난다는 듯이 두 눈이 바빴다.
하지만 험악한 얼굴의 사내는 되레 큰 소리를 쳤다.
"왜? 이름도 꺼내면 안 되나?"
"아니...... "
"말이야 바른말로, 만금대부가 살아 계셨을 때만 해도 우리가 어디 술 마실 돈이 없어서 빌빌댈 일이 있었어? 그때는 세상에 겁날 게 없었는데!
그 빌어먹을 만인방 놈들이 사패련을 차지하고 나서는...... "
"이놈이, 진짜 입 좀 닥치라고! 정말 무슨 꼴을 당하려고!"
"나 먹을 것도 모자란데, 이걸 도움도 안 되는 것들에게 가져다 바치려니 속이 터져서 그러지! 속이 터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화산의 제자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흑귀보 놈들인 모양인데요?"
"...... 그런 모양이네."
"장일소가 엄청 쪼아대는가 보네......"
임소병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그냥 흔히 늘어놓는 푸념처럼 들리지만, 그 대화 속에 담긴 정보는 생각보다 꽤 크고 중요했다.
우선은 지금 저 수레에 실린 곡식이 장일소의 명으로 양민들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아무리 장일소의 명이라고는 하지만, 내부에서는 그 명령에 대한 반응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
'그렇겠지......'
아마 장일소는 강북과의 전쟁에 대비해 물자를 어마어마하게 비축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사패련이 흑귀보를 통째로 집어삼키며 막대한 자금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전쟁을 대비하는 동시에 수하들이 만족할 만한 녹봉을 지급하기란 어려웠을터.
그런 와중에 손에 넣은 물자들을 양민들에게 베푼다고 하니 좋은 말이 나오기 어려운 건 당연지사였다.
"막말로 사패련이 생겨서 우리한테 좋았던 게 뭐가 있어? 기껏 잘 살던 곳에서 끌려와 저 망할 장강에서 번이나 서고, 이제 겨우 풀려났다 싶었더니 수레나 끌어 대고 있는데!"
"그거야...... "
"강북정벌은 얼어 죽을. 그거 한다고 내가 좋을 건 또 뭐가 있냐고! 어차피 윗놈들이나 좋은 거지. 나야 그냥 적당히 돈 벌고, 오늘 저녁 술이나 푸지게 마시면 그게 좋은거지! 안그러냐?"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동조를 바라는 듯 뒤따르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앞장서는 둘보다 직위가 낮은지 함부로 입을 열어 대답하는 이는 없었지만, 눈빛들은 확실히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한 말에 동조하는 듯했다.
"아서라. 누가 그걸 몰라서 입을 다물고 살아? 그딴 말 함부로 입 밖에 자꾸 내다가는 정말 산 채로 껍데기가 벗겨질 거다. 신주오패니 같은 사파니 해댔지만......저 만인방 새끼들은 진짜 사람 새끼가 아니야."
"...... "
"저번에 련주에 대해 험담했던 놈이 만인방에 걸려서 어떻게 됐는지 잊었어? 세상에...... 내가 사파 소리 들은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 봤다."
험악한 얼굴의 사내도 그 말에는 공감하는지 별 대꾸 없이 콧김을 내뿜었다.
"마교 새끼들이 잔인하다고는 하지만, 그놈들도 만인방 놈들을 보면 학을 뗄 걸세. 련주까지 갈 것도 없이 그놈들 귀에만 들어가도 우리는 곱게 못 죽는단 말이야!"
"에이, 빌어처먹을!"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돼서는......"
"쯧쯧. 그걸 탓해서 뭐 하나. 그래도 우리는 상황이 나은 편이지. 당장 장강 쪽에 징발된 놈들과 해남 쪽에 징발된 놈들보다야 나은 편이지. 눈치 볼 일도 없고."
"차라리 그게 낫지. 이게 칼 차고 할 짓이야?"
"거참, 성질 좀 죽이래도."
"이럴 바에야 차라리 속 시원하게 칼질이나 하고 죽었으면 좋겠군.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
말을 하던 사내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 지금 우리가 가는 마을까지 얼마나 남았지?"
"곧 도착할거다."
"여기가 마지막이었던가?"
"여기만 들렀다가 형양으로 가면 된다."
"형양이라...... "
험상궂은 이가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깊은 산중에 있는 마을이로군. 그럼 빨리 가야지."
"...... "
"서둘러라. 해 지기 전에는 도착해야지!"
"예!"
수레가 다시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무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몸을 숨기고 있던 천우맹 일행이 몸을 일으켰다.
복잡하고도 묘한 시선으로 수레가 사라진 쪽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돌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뭐......별일이야 없겠지?"
"장일소가 곡식을 나눠 주라고 했다는데, 아무리 사파 새끼라고 한들 설마 일이야 치겠어요?"
"그렇지. 지들도 장일소 무서운 줄은 알 텐데."
"갈 길도 바쁜데 괜히 시간만 낭비하겠지."
"다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뻔한 말을 늘어놓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자."
"따라만 가 보자."
"조금만 지켜보면 되지. 별일 없으면 갈 길 가면 되잖아."
"근데 시간이 지체될 수도...... "
"안 자면 그만이야!"
임소병이 참담한 심정으로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내가 이 꼴 안 보려고 산길로만 다녔는데.'
이들이 사람 눈에 띄는 게 무서운 게 아니다. 사람이 이들 눈에 띄는 게 무서운 거지!
"저기...... 그럴리는 없겠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리는 건데...... "
"예?"
"......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강남 한중간입니다."
임소병이 통사정하듯 말했다.
"어차피 그냥 가자고 해도 안 들어 먹을 거 뻔하니까 거기까지는 안 말리겠는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서시면 안 됩니다. 일이 커지기라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당연하죠."
"설마 우리가 그 정도 생각도 없으려고요."
"사패련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확인해야죠. 이건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눈에 켠 불이나 끄고 말해...... 누가 보면 수풀에서 호랑이 떼라도 나온 줄 알겠다. 뭔 눈알에 힘을 그렇게까지 주냐......
백천이 슬쩍 모두를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나서면 안 된다."
"예. 장문대리."
"좋아."
백천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만 확인해 보자."
* * *
소로를 통해 빠르게 나아간 천우맹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촌락 하나를 발견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걸로 보아 사냥을 하거나 화전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작은 마을인 모양이었다.
"여기 같은데요?"
"쉿."
그들은 목소리를 낮추며 산비탈을 찾아 올라갔다.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훤히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조금 전에 그들이 봤던 곡식 수레가 마을 앞 공터에 멈춰 있었고, 그 앞으로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서른 명 정도가 겁을 먹은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 이게 전분가?"
그 말에 앞에 선 촌로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예, 예! 저, 저희 마을에 사는 사람은 이게 전부입니다."
험상궂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패련에서 행하는 일이다. 사람 수를 속이거나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겠지?"
"아이고, 나으리....... 저희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감히 나으리들을 속이겠습니까. 저희 마을에 사는 사람은 이들이 전부입니다. 젖먹이 하나까지 빠지지 않고 모두 시키시는 대로 모였습니다."
"흐음. 그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선 이들의 수를 헤아렸다.
"서른둘이라...... 산속 깊이 있는 마을치고는 수가 좀 되는군."
고개를 끄덕인 그는 수레에 실린 곡식 자루를 손으로 퍽퍽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잘 들어라! 련주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겨 곡식을 보내셨다. 이 모든 것은 련주께서 베푸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도록."
"저,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너희를 모아 두고 농담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너무 감사해서...... "
촌로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수레에 실린 곡식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칼 찬 사파 놈들이 마을에 쳐들어왔길래 대체 또 무슨 봉변을 당할까 떨던 와중인데, 곡식을 나눠 준다고 하니 놀랄 수 밖에.
"감사는 련주께 표하면 된다. 사패련의 련주, 패군 장일소의 이름을 기억해라."
"그, 그러믄요, 그러믄요.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평생 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촌로의 눈가에 눈물이 뿌옇게 맺혔다.
안 그래도 올해 가뭄이 심하게 들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참이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하는 이까지 나올 지경이라 걱정에 잠을 못 이루던 중인데,
그 유명한 사파의 수괴가 설마 이리 곡식을 나눠 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먼 데서 좋은 말을 하는 부처보다, 바로 앞에서 먹을 걸 나눠 주는 악당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끼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험상궂은 사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감사하더냐?"
"예! 예! 나으리.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련주님의 은혜가 하해와도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리고 여기까지 이 곡식들을 가져와 주신 영웅님들께도 마을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하. 내게는 감사할 것 없다."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 예?"
그 순간, 사내가 허리춤에 찬 도를 섬전처럼 뽑아 촌로의 가슴을 일격에 갈랐다.
쩌억.
"뭐, 뭐 하는 거야!"
곁에 있던 사내가 손도 쓰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촌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쩍 벌어진 제 가슴을 내려다보다 그 자리에서 스르륵 허물어졌다.
여기저기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감사할 것 없다니까."
얼굴에 피가 잔뜩 튄 험상궂은 사내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