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화. 누가 돕겠는가? (4)
타닥! 타닥!
활활 타는 모닥불 위로 통째로 올려진 멧돼지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패는 정말 당연하면서도 아무 쓸모 없는 생각을 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사람 눈을 피한다면서...... 아,아니 물론 이 깎아지른 절벽 한 가운데에 있는 동굴까지 사람이 찾아와서 불빛을 보려고는 하지 않을테니 상관없겠지만...... 아니, 그래도......
"쓰읍.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이라도 좀 가져오는 건데."
"이 새끼는 전생에 술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여기 강남이야, 인마!"
"사람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무슨 상관이야?"
"...... 그건 맞는 말인데."
청명이 '이렇게까지 절벽이나 산중으로만 다닐 줄 알았으면 긴장도 안 했지.'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당패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누가 봐도 긴장감이라고는 없이 쉴 것도 쉬어 가면 가고 있는데도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최소한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야 하는 건 맞는데......'
"다 익었다!"
"아, 기다려! 아직 안에는 덜 익었어!"
"그럼 밖에부터 먼저 먹으면 되잖습니까?"
"...... 천잰가?"
"먹자!"
구운 돼지에 달려드는 화산 놈들의 모습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존중까지 깨끗하게 싸악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빌어처먹을 돼지고기 써는 데 매화검법 쓰지 말라고, 이 미친 놈들아!
오검이 그렇게 당패의 속을 뒤집어 놓는 와중에, 그래도 장문대리라고 한발 물러서 있던 백천이 임소병을 향해 물었다.
"어떻습니까? 계획대로 이동하고 있는 겁니까?
"흐음."
임소병이 부채로 제 볼을 쿡쿡 찔러대며 답했다.
"계획대로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하기 살짝 미묘합니다. 물론 변수를 어느 정도 상정해 두기는 했지만......"
임소병이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누워서 끙끙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변수까지는 제가...... "
"...... "
확실히 이건 임소병의 잘못이 아니다.
아무리 천기를 내다보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남궁세가 소가주의 고소공포증까지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초에 칼 쓰는 무인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뭐...... 그걸 감안하더라도 예상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닷새 내로 해남으로 가는 해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일이라......"
백천은 살짝 고심했다.
강남을 닷새 만에 관통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 평시라 해도 과연 가능한 일일지 의문이 들 정도니까.
하나같이 절정고수라 할 수 있는 이들만 일행에 합류했기에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설소백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는 청명이가 어떻게든 끌고 가고 있으니까.
그러니 확실히 좋은 소식이긴 한데......
"속도를 조금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백천은 한시라도 빨리 해남에 당도하고 싶었다. 해남파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는 강남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옳으니 말이다.
하지만 임소병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속도는 한계입니다."
"쉬거나 자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잖습니까. 굳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안됩니다."
임소병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칼날같이 단번에 잘랐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물론 장문대리의 마음이 급한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겐 한계라는게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이라고 해도 집중력을 사흘 내내 유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 그렇긴 하지요."
"지금 우리에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건 신중함입니다. 감각이 조금만 무뎌져도 사람의 기척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된다면 늦게 가는 것만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저 동굴을 찾았기에 쉬는 것이 아니라, 임소병 나름으로는 일행의 체력을 안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뒤처리는 더 문제입니다. 저 혼자라면 뭐...... 양민이든 뭐든 대충 묻어서 입을 막아 버리겠지만...... "
"아하 애이아!"
"헤징어오!"
오검이 입에 욱여넣은 고기를 씹다 말고 눈을 부라리며 돌아보자 임소병이 한숨을 푹 내쉰다.
"...... 뭐라는 겁니까?"
"사파 새끼가 뒈지려고!"
".......해석 감사합니다. 그러니 제 마음대로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최대한 들키지 않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휴식도 필요합니다."
"이해했습니다."
납득한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도 아니지.'
그가 남궁도위와 당패를 흘긋 보았다.
오검이야 가혹할 정도의 강행군에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당패나 남궁도위, 그리고 설소백에게는 이런 경험이 처음일 것이다. 겉으로야 어떻게든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다지만......
'힘들지 않을 리가 없지.'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하루를 꼬박 이동한다는 건 웬만한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그저 절벽에 매달려 있는 수준이 아니라 말보다 더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 아닌가?
그 와중에 주변을 경계하는 일조차 게을리할 수 없으니, 체력이 급속도로 소진될 수 밖에 없었다.
'저놈들도 평소보다 과하게 먹어 대는 걸 보면 긴장한 거겠지. 하기야 이런 상황에 누가 긴장 안 할 수 있......'
"아오,씨! 야수궁주님한테 딱 한 병만 받아 올 걸!"
있네...... 긴장이란 단어를 화산 절벽에다가 던져 버리고 온 인간이......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청명이 놈이야 원래 그런 놈이라치고, 임소병의 낯빛도 평소보다 확실히 어두웠다.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선천적인 병이 있는 임소병이다 보니 아무래도 체력이 아주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너무 서두르지는 않는 게 좋겠군요."
백천이 그리 말하자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백천 도장도 생각할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
"뭐 그렇게 부담을 크게 가지실 건 없습니다. 제 뒤 하나 간수 못 할 인간은 여기에 없으니까요."
백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임소병이 뚱한 눈으로 남궁도위를 돌아보았다.
"하나 빼고."
"...... "
이쯤 되면 단순히 출신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 혐오 같은데......
"어쨌거나 강남으로 향하는 길이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느 정도는 교전까지 각오했었는데."
"사패련이라고 해도, 이 넓은 강남에서 사람 열을 찾아내는 건 사막에서 모래알 하나를 찾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죠."
"그렇겠죠."
입장 바꿔서, 백천에게 화산의 인원들을 동원해 강북에 잠입한 사파 놈들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제정신이냐고 그 머리부터 걷어차 버렸겠지.
"위험 요소가 있다면 두 가지뿐이겠죠."
백천이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임소병이 미미하게 표정을 굳혔다.
"장일소란 인간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사막에서 모래알 찾기를 해낼 만큼 집요하다는 것."
임소병의 말에 백천은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확실히 장일소라면...... 그 장일소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레 걱정할 건 없습니다. 제아무리 패군이라도 우리가 지금 이 시기에 강남 땅에 들어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기야...... "
"설마 그놈도 지보다 더 미친놈들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 "
그거 칭찬입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다른 쪽이지만......"
"...... 다른 쪽이라뇨? 또 문제 될 게 있다는 겁니까?"
그 말에 임소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제가 말을 해 봐야 딱히 의미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빌어야겠죠."
백천이 무언가 더 물으려 입을 뗄 때였다.
"아니! 그걸 다 처먹으면 나는 뭘 먹습니까! 이 아귀 같은 것들아!"
임소병이 기겁하며 멧돼지 구이 쪽으로 달려갔다. 통으로 모닥불 위에 걸렸던 멧돼지가 광속으로 형태를 잃어가고 있어서였다.
백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
"...... 대체 뭘 보고 아는 겁니까?"
"딱 봐도 이쪽 아닙니까?"
우거진 수풀 속으로 진입한 천우맹 일행이 신기하다는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수목이 얼마나 빽빽하게 자라 있는지,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임소병은 귀신같이 그 안에서도 방향을 찾아 모두를 안내하고 있었다.
"이쪽?"
"이쪽이라고!"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그냥 뒤만 따라오십쇼! 자꾸 앞서 나가지 말고!"
"아니, 너무 느리시니까...... "
"뭐요?"
확실히 임소병은 이런 면에서 굉장히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걸 모두 새삼스레 실감했다.
아, 물론......
"쯧. 원래는 위쪽으로 가는 게 더 빠른데."
"...... "
"누구 때문에! 쯔으읏!"
생각 이상으로 성격도 나쁘다.
남궁도위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지자 윤종이 어색한 얼굴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하튼 대단하십니다. 저희 눈에는 다 그 길이 그 길 같은데, 이걸 구분하고 안내하시다니. 와 보신 적도 없는 걸로 아는데."
"후후후.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녹림도라면 이 정도야 기본이지요. 산을 지배한다는 녹림이 산을 몰라서야 어찌 녹림도라고......"
"거, 관군 피해서 쥐새끼처럼 도망다니느라 샛길에 훤하다는 말을 또 거창하게 늘어놓는다."
청명이 쏘아붙이자 임소병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윤종이 눈을 부라렸다.
"인마! 왜 사람 기를 죽이고 그러냐! 이렇게나 도움이 되시는데!"
"뭔 소리야? 사파 새끼가 도움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
"응? 갑자기 그건 무슨...... "
"도움이 안 됐으면 벌써 뒈졌을테니까!"
아......
"도움도 안 되면 사파 새끼를 뭐 하러 살려 둬. 적당히 갈아서 비료로 쓰는 게 더 이득이지!"
이야...... 청명아. 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리 봐도 네가 더 사파 놈 같다.
백천이 말없이 임소병의 어깨를 다독였다.
"힘내십쇼."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박차고 나오시지."
순간 말문이 막힌 임소병이 잠깐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쉿!"
갑자기 청명의 표정이 일변했다.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한 그가 앞쪽으로 조심스레 나아가며 수풀을 좌우로 가볍게 헤쳤다.
다른 이들도 숨을 죽인 채 그 뒤를 따랐다.
고개를 내미니 수풀 앞쪽으로 난 작은 길을 통해 천천히 다가오는 행렬이 보였다.
커다란 수레와 그 수레를 지키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걸리는 건 수레에 꽂힌 커다란 깃발이었다. 패라는 글자가 위풍당당하게 수놓여 있었다.
"......사패련이다."
순간 모두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그들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행렬을 뚫어져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