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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18화 (1,219/1,567)

1218화. 누가 돕겠는가? (3)

임소병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장강을 물개...... 아니, 개처럼 도하하고 무려 하루를 이동하는 동안 천우맹 일행은 사패련의 감시는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산에 있는 이상은 사패련이 아니라, 천하의 누가 와도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호언장담을 임소병은 확실하게 증명해 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녹림왕 자리를 골패로 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정말 강남의 산길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천우맹 일행들은 누구와도 조우하지 않은 채 강남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들이 가는 길을 진정 '길'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후드드득!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천하의 대장부도 오금이 저려 슬슬 발을 뺄, 그런 깎아지른 절벽에서 제법 큰 돌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이런 가파른 절벽이 있는 깊은 산중에 오가는 이들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여 아래에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큰 횡액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밑에 사람이 있었고, 그가 운 좋게 빠르게 쏟아지는 돌을 모두 피했다면, 그래서 놀란 나머지 위를 올려다보았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까마득한 절벽에 다닥다닥 붙은 십여 개의 작은 무언가를.

"히,히익!"

떨어지는 돌무더기에 본능적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남궁도위가 기겁하며 절벽에 달라붙었다.

명성 높은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는 지엄한 직위를 생각해 보면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벌리고 절벽에 들러붙은 모습이 채신머리없는 짓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이 머리엔 체면이란 말이 남아 있을 자리조차 없었다.

"왜...... 왜! 왜에에에에!"

남궁도위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왜 굳이 여기로 가는 거냐고오오오오오오!"

절규가 구슬프게 메아리치며 퍼져 나갔다.

"쯧쯧쯧쯧."

그러자 그의 옆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임소병이 한 손으로 돌부리를 부여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여유롭게 부채를 부쳤다.

"조용히 좀 하십시오. 누가 듣습니다. 우린 지금 암행 중이란 말입니다."

"누가 듣습니까, 누가! 사람은커녕 새 한 마리도 안 보이는구만."

남궁도위가 발작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그들의 발밑으로는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새가 아무리 날개를 가졌다고는 하나, 여기까지 오르기야 하겠는가?

"쯧쯧쯧쯧."

하지만 임소병은 남궁도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천하의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실 분이 고작 절벽 정도로 이렇게 호들갑을 떠셔서야...... "

"고작 절벽이라니! 여기서 떨어지면 장삼봉도 죽을 판인데!"

"절벽에 떨어져 죽으나, 칼 맞아 죽으나 다 똑같이 죽는 건데. 죽는 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검은 어떻게 씁니까?"

"그거랑 이게 같습니까? 같냐고!"

"뭐가 다르다고."

임소병이 피식 웃으며 혀를 찬다.

"하여튼 채신머리없어 보이니까 조용히 좀 하십시오, 조용히 좀."

"으으...... "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궁도위가 이를 갈아붙이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싹.

그 순간 오금이 저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뼈저리게 실감한 그는 황급히 시선을 위로 획 꺾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다,당 형님!"

"...... 왜."

"괜......찮으십니까?"

"...... 괜찮겠냐?"

그가 슬쩍 실눈을 뜨고 돌아보니, 과연 당패의 얼굴도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당패는 애써 심호흡하며 말했다.

"아, 아래를 보지 마라. 여기가 평지라고 생각하면 조금 낫다."

"평지가 아닌데 어떻게 평지라 생각합니까?"

"그냥 해, 인마!"

"...... "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다시 돌무더기가 우르르 떨어졌다.

"히이이이이익!"

"아아아아아아아악!"

둘은 기겁하며 절벽에 바싹 들러붙었다. 그들의 머리 바로 뒤로 어른 주먹만 한 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 이건 미친 짓이야!"

남궁도위가 다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왜! 왜 꼭 이런 길로 가야 하는 거냐고! 왜!"

"아, 거! 엄살 좀 적당히 떠십시오. 남들은 의젓하기만 하구만."

"누가! 누가 의젓한데!"

"저기 안 보입니까?"

"응?"

임소병의 부채 끝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자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남궁도위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 "

절벽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주먹밥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던 조걸이 어색하게 주먹밥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었다.

"아, 죄송. 배가 좀 고파서...... "

"...... "

"그, 좀 지루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걸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쭉 따라오고 있는 화산 놈들은 이 만장단애 절벽이 산책로라도 되는 양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인간 길 더럽게 막아대네.' 하고 비난하는 듯 말이다.

"아,안 무섭습니까?"

"여기가요?"

"...... 예."

"왜요?"

조걸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몸을 들썩이는 걸 본 순간 남궁도위는 거의 반쯤 까무러치며 바지에 실례할 뻔 했다.

"뭐, 나름 높기는 한데...... 여긴 화산에 비하면 거의 평지 수준이라 딱히."

"에이, 화산에서는 입문한 지 두 달만 되어도 이 정도는 오르지."

"굳이 화산까지 갈 것 있나? 화음현의 어린애를 데려다 놔도 여기에서 공놀이할걸?"

"거 빨리빨리 좀 갑시다. 절벽 처음 타심?"

남궁도위의 눈에서 눈물이 질금질금 배어났다.

"...... 말입니다."

"예? 뭐라고 했습니까?"

"하,합비."

"응?"

"합비에는 산이...... 산이 없단 말입니다...... "

"...... "

"어흑."

어쩐지 모두 숙연해지고 말았다.

"끄으으...... "

"...... "

"으으으으......"

"...... "

절벽 가운데 난 작은 동굴, 그 안에서 남궁도위가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더 가려고 했지만 해가 졌고, 마침 날짐승조차 잘 들지 못할 동굴을 발견하여 들어온 것이다.

연신 앓는 소리를 내는 남궁도위를 보며 나머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천하의 남궁도위가 고소공포증이라니."

"그래도 인간미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그동안은 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처럼 영 거리감이 느껴졌었는데."

"그래. 솔직히 대가리 깨지기 전 사숙 같았지."

"나는 또 왜 걸고 넘어지냐!"

오검은 혀를 차며 남궁도위를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남궁도위의 얼굴은 지옥에서 겨우 탈출한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 있었다.

"이게 그렇게 무섭나?"

"...... 합비에 산이 없다잖습니까. 거기는 다 평지래요."

"이래서 있는 집 자식들은 ...... "

"아니, 그렇게 따지면 장문대리도 있는 집 자식 아닙니까?"

"걸아. 비교할 걸 비교해라. 남궁세가에 비하면 종남 장로네 집안 같은 건 동네 거지 급이다."

"...... 진짜 거지 출신은 사형이랑 청명이잖아요."

"근데 이 새끼가?"

오검은 뭔가 이해가 가면서도 안 간다는 듯 남궁도위를 보았다. 저 양반이 엄살을 떨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으니, 오죽 무서우면 저러겠냐 싶지만......

반면에 그런 절벽을 무서워하는 이를 이해하기란 그들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절벽을 무서워하는 이 같은 건 화산의 산문에 도달하기도 전에 알아서 걸러진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눈에 남궁도위는 살면서 처음 만나는 괴이한(?) 인종일 수 밖에 없었다.

"근데 진짜 엄살은 아닌가 보네요. 당 소가주님도 허옇게 뜬 걸 보니."

"저 양반도 웃긴다니까. 사천에는 산도 많던데."

"그, 그 산 절벽으로 누가 다니냐고!"

그나마 남궁도위보다는 사람 몰골을 유지하고 있던 당패가 체면이고 뭐고 버럭 소리쳤다.

"사람이 다니면 그게 절벽입니까, 그게? 사람이 안 다니니까 절벽이지!"

"쯧쯧쯧. 무후께서는 그 험한 촉로로 대군을 이끌기도 하셨던 것을."

"그걸 하니까 제갈량이지! 그걸 아무나 하면 역사에 남았겠냐고!"

"...... 그럴싸한데?"

임소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당패가 다시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니! 그냥 절벽 위로 가면 될 일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절벽 아래로 가든가! 대체 왜! 대체 왜 절벽 한중간을 타고 가는 겁니까! 왜! 사람이 거미 새끼도 아니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사람 눈을 피해야 한다고."

"절벽 위에 사람이 왜 있어요! 이런 심산유곡에!"

임소병이 별말 없이 조걸을 슬쩍 앞에다 끌어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죠."

"......아."

있구나....... 절벽 위에 있다 못해 절벽 위에다가 도관 짓고 사는 것들이.

생각해 보니 저것들 진짜 미친놈들 아냐?

임소병이 말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심산유곡에 사람이 없어? 사람을 피하려면 제일 접근하면 안 되는 곳이 심산유곡입니다! 왜 세상의 이름난 명산에는 모조리 도관이며 사찰이 들어차 있겠습니까!"

"...... "

"그래도 도사나 불자는 좀 낫지. 그 양반들이야 그래도 건물이라도 지어서 '나 여기 있어'는 해 주니까. 적당한 동굴 하나 찾아서 여길 기점으로 산채 지어야겠다 하고 고개 들이밀었더니, 그 안에서 백 년 묵은 은거기인이 튀어나와서 산채 하나가 모조리 몰살당하는 사태가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 뭔 용도 아니고, 거기서 갑자기 사람이 왜 튀어나와요."

"내 말이!"

강호인이 문제네, 강호인이.

청명이 입만 떼면 해 대던 '칼 든 놈치고 정상적인 새끼 없다.'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산에서 장사 한번 해 먹으려면 얼마나 고려할 게 많은데! 혹쇼ㅣ 여기에 도사나 중이 어슬렁대지는 않는가! 어디 깊은 동굴에 사연 간직한 놈이 혼자서 몇 십년 동안 눈 돌아서 수련하고 있진 않은가!

어디 정파에서 파문당해 쫒겨난 놈이 으쓱한 데서 슥슥 칼을 갈아대고 있지는 않은가."

"...... "

"겨우 아무도 없는 데 발견해서 산채 하나 지었다 싶으면 또 어떻고? 갑자기 어디서 영약 하나 발견됐다고 온 동네 칼 좀 쓴다는 놈들은 모조리 산으로 뛰어오는데......"

백천이 임소병의 어깨에 다독였다.

"울지 말고 말하십쇼."

"...... 죄송합니다. 좀 북받쳐서."

"그러게 왜 산적질을 해서는...... "

"태어나 보니 아비가 산적이었는데 뭘 어쩌라고!"

"저는 그래서 뛰쳐 나왔는데."

"...... "

순간 말문이 막힌 임소병이 멍하니 백천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누가 더 패륜아인지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이다.

"...... 설 궁주님은 괜찮으십니까?"

내내 옥신각신하는 등신들에게서 시선을 뗀 당패가 설소백에게 물었다. 저 산짐승 같은 것들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설소백은 그나마 평범한 사람이 아니던가?

"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아요."

설소백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좀 무섭긴 했는데, 어쨌거나 매달려 온 거라 힘은 안 들었거든요."

"...... "

"그리고 설마 청명 도장님이 이런데서 떨어지기야 하겠어요? 그렇게 죽으면 그건 억울할 것도 없는 거죠.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아 죽는 것보다 더한 건데."

우리는 그런 걸 두고 '억울하다'라고 하기로 했어요...... 얘는 대체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그때 남궁도위가 희망이라도 찾은 사람처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나,나도 좀 업고 가 주십...... "

"누워요, 누워!"

"생각을 하고 말하십쇼. 그러다 평생 놀림당합니다."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하시라고!"

"끄으....... "

남궁도위가 다시 무너지듯 드러누워 앓았다. 모두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강남 땅을 관통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고난을 각오하기는 했지만...... 그 고난이 설마 이런 것일거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거나 좀 쉴 틈을 얻었으니 일단 건량을 좀...... "

"으라차!"

그때 동굴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안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갑작스레 동굴에 나타난 멧돼지와 노루를 보며 당패가 입을 쩍 벌렸다. 뒤이어 청명이 손을 탁탁 털며 안으로 들어섰다.

"배고프다! 밥 차려라!"

"고기다!"

"먹자!"

오검이 희희낙락하며 달려드는 꼴에, 당패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지옥 한복판에 던져 놔도 적응할 놈들......'

그래도 가는 와중에 배를 주릴 염려는 없는 모양이다. 천 가지 불행 중 하나의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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