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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17화 (1,218/1,567)

1217화. 누가 돕겠는가? (2)

"그만하거라."

"아니, 제 말이 뭐 틀렸습니까?"

말을 꺼낸 장로는 더 이상 말을 가려하기도 싫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내질렀다.

"말이야 바른말로, 천우맹이었다면 이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까지 구원을 오지 못한다 해도, 한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우리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외면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말을 좀 조심하거라. 그레 어디 의자가 없어서인가? 강남불침......"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강남불침 조약은 뭐 남이 맺어 줬답니까? 솔직히 우리 해남을 쥐꼬리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조약을 맺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게 저 소림이 우리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만하라 하지 않는가."

"사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잖습니까!"

그 말이 폭탄처럼 장내에 떨어졌다.

"말은 못해도 내심으로는 다 같은 생각들 아닙니까? 소림은 우리를 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아니라 이미 몇 해 전에 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 "

"그런 와중에 우리끼리 오지도 않을 소림을 백날 부르짖어 봐야 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답답한 탄식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누구도 대놓고 말은 하지 못했지만, 생각이 다른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내뱉은 말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돌아올까봐 그저 꾹꾹 눌러 왔을 뿐.

말을 하던 장로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토해내듯 말했다.

"이럴 바에야 이리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기 전에 먼저 천우맹에 투신을 했으면...... "

"닥치라 하지 않느냐!"

그때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그보다 더한 노호성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말이 없었겠느냐? 애초에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야 할 것 아니냐! 천우맹의 실질적인 수장이 어디인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하지만...... "

"화산! 그래, 화산이다! 우리가 차지한 이 자리의 원주인이다!"

"....... "

"화산이 몰락할 때 해남에서 무엇을 했더냐? 그들을 도왔더냐? 그들을 위해 싸웠더냐? 아니! 오히려 이제야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하지 않았더냐!"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지난 과거의 일이라며 선을 그을 수 있는 이는, 과거의 녹을 받아먹지 않은 이들뿐이다. 구파일방이라는 영화를 누려 온 그들에게는 과거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방도가 없다.

하다못해 우리가 누리는 것이 사실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냈다면 조금 달랐을 것이다. 본디 침묵하지 않아야 할 때 침묵한 이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와도 입을 열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 화산이!"

격한 감정을 토해 내던 장로가 이를 뿌득 갈았다.

"몰락한 자신들을 돕기는커녕 떡하니 그 자리를 차지한 우리에게 화산이 무슨 좋은 감정이 있어서 천우맹에 받아 주고, 동료랍시고 이 이역만리까지 구원을 오겠느냐!"

"...... "

"입장 바꿔 너희가 지금 화산의 문도들이라면, 우리가 이 꼴이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겠느냐? 아니! 우리였다면 이 기회를 틈타 해남이 빠진 자리를 차지할 궁리나 하고 있겠지. 예전의 해남이 그러했듯 말이다!"

몇몇 장로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새삼스레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는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화산을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봤을까?

피눈물을 흘리며 몰락해 가는 와중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서서 떵떵거리는 해남을 보며 대체 어떤 분루를 삼켜야 했을까?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

거기까지 말한 장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해남의 장로로서는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분위기에 짓눌리던 금양백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난 일이야......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지."

복잡한 상념이 머리에 머물렀다.

"자양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상황이 이리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천우맹에 고개를 숙였다면 그리되었을지도 모르지."

"...... "

"아직 손에 쥔 것이 있고, 내놓을 것이 있을 때. 그럴 때 먼저 사과하고 진심으로 참회했다면 분명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느냐."

금양백의 뇌리엔 비무대에서 봤던 화산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린 제자들이야 잘 모르니 화산에게 악감정을 드러냈지만, 나이를 먹은 장문인과 장로들은 화산의 시선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그 눈빛이 너무도 껄끄러웠으니까.

'그때라도......'

죄를 빈다는 말은 과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개를 숙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리된 것에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빈말이라도 건넬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금양백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선대의 죄라고 우겨볼 수도 없다.

암묵적인 동조자는 적극적인 가담자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죄는 피하되 이득은 취하고 싶은 이들이 암묵적 동조자가 되는 법이니까.

"그래. 결국에는 인과응보인 것을."

그 일의 대가를 이제 치르는 것뿐이다. 협의를 숭상해야 하는 정파임에도 타인의 억울함을 풀어 줄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 기회를 틈타 이득을 취했으니......

어쩌면 이렇게 멸문하는 것이 오히려 사리에 맞은 일일 것이다.

그가 해남의 장문인이기에 그게 당연하다는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뿐.

한참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금양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자들은 어떠하더냐?"

"...... 말을 하지 않지만, 다들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적은 너무도 강대하고, 이 섬은 너무도 외롭다.

"자양."

"......예, 장문인."

"지난 일을 입에 담아 봐야 소용이 없구나. 차라리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

"구파일방이 돕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릴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다른 곳에라도 구원을 청해 봐야지. 해남을 위해 줄 문파들에게 연통을 넣어 보자꾸나."

그 말을 들은 자양이 쓰게 웃었다.

"누가 오겠습니까?"

"...... "

금양백조차 무언가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양은 그 겉치레같은 말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해남과 같이 싸워 달라는 말은 해남과 같이 죽어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진대, 천하에 누가 있어서 저 강남 땅을 뚫고 이곳까지 오겠습니까?"

"자양...... "

"세상에 협의 넘치는 이들이 그리 많았다면...... 애초에 지금 해남이 이런 꼴은 아니 되었겠지요."

짧게 탄식한 금양백이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지 않겠느냐."

"장문인...... 우리가 빠진 물에는 지푸라기조차 없습니다. 연통을 보내 보고 싶어도...... 보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금양백은 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리 사사건건 힘 빠지는 소리만 하느냐고 타박이라도 해 보고 싶지만, 그 말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뚱이를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힘겨웠다.

"장문인. 차라리 섬을 버리고 탈출하시는 쪽이......"

하지만 금양백은 다 들어 보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왜 모르는 것이더냐. 우리가 이 섬에서 나오기를 가장 기다리고 있을 건 바로 저 사패련이다. 강남불침. 그래, 우리를 조이는 그 조약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 "

"우리가 섬을 나서는 순간, 저들에게는 우리를 칠 명분이 생기지. 그리고...... 섬 위에서라면 우리는 해남파지만, 배 위에서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무학을 익혔다 한들,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장문인...... "

"강남에 닿든, 바다로 향하든, 그 어느 쪽도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없는 일인 것을......"

"그렇다고 이리 앉은 채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금양백은 침묵했다. 답답한 건 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목이 마르다고 소금물을 마시면 죽음만 앞당길 뿐이다.

"조약의 기간은 이미 지났던가?"

"...... 시일로 보면 그러합니다. 하지만 사패련과 구파 중 어느 곳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피차간에 당장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관계가 되었음을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파는 강남불침을 입에 담는 것조차 치욕스러워하고, 사패련은 굳이 그 사실을 이야기해 당장 분란을 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마 그 강남불침 조약이 공식적으로 끝을 맺는 순간은 저 사패련의 칼날이 해남을 침범하는 그 날일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겠지.'

피하려 해도 느껴진다. 그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는 것이 말이다.

"임겸."

"예, 장문인."

"...... 아직 나이가 어린 제자들을 산문 밖으로 내보내 사가로 돌아가게 하거라."

"...... 장문인?"

"해남과 함께 뼈를 묻겠다 하는 이들을 말릴 수는 없겠지만,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말려야지. 저들의 마수가 사가에까지 뻗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나, 적어도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 말에 임겸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저 말은, 해남에는 더 이상 사패련에 대항할 방도가 남아 있지 않음을 자인하는 것과도 같다.

"......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 파문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원대로 해 주어라."

"자, 장문인! 그건......!"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금양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해남의 기둥뿌리를 부여잡고 죽는 이는 나로 충분하다. 굳이 다른 이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저 말에 얼마나 비장한 각오가 어려 있는 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양은 그저 답답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사패련은 정도를 지키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후환을 남길 턱이 없지요. 해남파를 정리한 다음에는 해남을 샅샅이 뒤져, 해남파와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삭초제근 하려 들 것입니다.

그게 사패련의 방식이고...... 또한 만인방의 방식이 아닙니까."

자양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날개도 없는 사람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 봐야 해남. 그저 해남인 것을......"

"...... "

금양백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멸문.

영원히 그가 직면할 일 없을 거라 여겼던, 그 두 글자가 너무도 별안간에 찾아와 파고들었다.

더없이 따뜻한 해남이건만, 지금 그는 너무도 시리고 외로웠다.

'강호가 이토록 비정한 곳인 줄, 내 왜 진작 알지 못했던가?'

그들이 목놓아 외치는 협의조차 가진 자의 유희에 불과했다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허허허......"

힘없는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허허허...... "

울음보다 더 서글픈 웃음은 그렇게 한동안 대전을 망령처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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