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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16화 (1,217/1,567)

1216화. 누가 돕겠는가? (1)

해남도. 중원의 최남단에 있는 거대한 섬.

중원인들이 말하는 '중원'에서 까마득히 먼 남단에 위치하여 과거에는 유배지로나 활용되던 곳이다. 그 뜨거운 기후와 다습한 환경으로 인해 북부와는 또 다른 의미로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막상 해남에서 나고 자라 살아가는 이들은 나름의 평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해남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사실 해남은 외딴곳에 있는 데다 일반적인 성의 절반 크기 정도밖에 안 되어 세인들에게는 인상이 흐릿하다. 그럼에도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그 해남 오지산 중턱에 자리한 한 문파 때문이었다.

해남파. 화산이 빠진 자리를 꿰차고 새로이 구파일방의 일원이 된 곳.

비록 역사와 세로 보자면야 전통적인 구파일방 강자들에 비해 손색이 있다지만, 그래도 구파일방은 구파일방이다. 말석이나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남파의 위상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 해남파의 중지, 장문인의 처소. 더없이 경건해야 할 그곳에서 지금 침울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혹여."

잠시 끊겼던 목소리가 조금 힘겨운 듯 이어졌다.

"연통이 왔더냐?"

해남파의 장문인 금양백이 장로들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분명 묻고 있되, 그 목소리에는 의문 따윈 스며 있지 않았다.

돌아올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 우리는 그것을 자조라 한다.

"아직...... "

대답조차 완전하지 않았다. 말하기도 민망하다는 듯이 적당히 끝을 얼버무리는 이 대답이 지금 해남이 처한 상황을 더없이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겠지."

금양백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어린 싸늘한 냉소가 장로들의 속을 더욱 갑갑하게 만들었다.

"장문인...... 아직 기대를 접으실 때가 아닙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연통이 도착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다르냐?"

금양백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의지는 있되 연락이 닿지 않아 돕지 못한 것과, 의지가 없어서 연락을 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결과는 똑같은 것을."

"...... 장문인."

"연락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해남을 구할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있다면 뭐가 달라지느냐. 어차피 돕지 못할 것을. 해남이 멸문하고 나서 안타까워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냐?"

입을 뗐던 장로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그 역시 자신이 꺼냈던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위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금양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쏘아붙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장로들이라고 이런 상황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패련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것은 아니고?"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땅히 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로, 그들이 사패련의 움직임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바다 넘어 저 강남 땅에는 단 한 사람의 제자조차 들여보낼 수가 없는데.

기껏 마련해 두었던 정보망은 모조리 박살이 났고, 그들에게 정보를 공유해 주던 개방은 강남에서 철수한 지 오래다.

고립무원.

지금 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섬의 상황뿐이었다.

사람도, 정보도, 심지어는 하늘은 나는 새마저도 이 섬에는 찾아들지 못하고 있다.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식쯤은 되어야 시간이 지난 후 가까스로 해남에까지 말이 돌 정도다.

"장문인...... 소식을 전해 오지는 못했지만 우려하는 상황이 터질 경우 우리를 도울 문파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소림이 이 모든 상황을 그저 좌시하지만은 않......"

"그렇더냐?"

말허리를 끊은 금양백이 허허 웃었다.

"그래, 그렇구나. 방장께서 깊이 생각한 끝에 지난 시간 동안 내도록 우리 해남을 방치하듯 내버려 둔 것이었건만, 소인배 같은 내가 방장의 뜻 하나 헤아리지 못해 투정이나 부리고 있는 것이구나."

"...... "

"일이 벌어지면 어련히 알아서 도와주실 것을. 내가 너무 걱정이 많구나. 그런 게지?"

결국 장로들은 눈을 딱 감아 버렸다.

본디 금양백은 저리 비아냥거리고 비꼬며 말하는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으로 치면 호인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 고립무원의 처지로 사패련의 압박에 시달리다 보니 날이 갈수록 말이 거칠어졌고, 성격 또한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장로들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금양백은 또 한 번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하구나. 장로들을 탓할 일이 아닌 것을."

"아닙니다, 장문인. 장문인께서 얼마나 고심이 많으실지 저희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장로들의 얼굴도 참담한 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마음은 다르지 않다.

어찌 구파일방에 대한 원망이 없겠는가?

구파일방이란 단순한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평소에는 서로가 옥신각신하며 세를 다투다가도 외적이나 사마외도가 발호하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대항해왔기에 구파일방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강남불침 조약 이후로, 해남은 구파일방의 다른 문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바로 코앞에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늑대 같은 사패련의 위협을 그저 홀로 감당해 낼 수 밖에 없었다.

"개방에서는 아직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가?"

"...... 예, 장문인."

"마지막으로 개방 사람이 다녀간 때가 언제인가?"

"한 해...... 예, 한 해 전입니다."

금양백이 망연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벌써 그렇게나 되었는가?"

중얼거림을 끝으로 한참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아무리 사패련의 칼이 날카롭고, 장일소의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천하의 개방일진대 사람 하나 보내지 못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더냐?"

"장문인......"

"쿡쿡쿡."

금양백이 나직이 웃었다. 그의 허망한 웃음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 대전에 서글프도록 퍼져 나갔다.

"우습구나.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개는 자신이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주인만을 기다린다고 하더니, 우리가 지금 딱 그 꼴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언제 올지 모르는 구파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실로 비참하고도 슬픈 자조였다.

아무리 상황이 지독하다 해도, 그는 한 문파의 수장이다. 심지어 구파일방의 일원쯤 되는 대문파의 문주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이렇게 문파를 개에 비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못했다. 금양백이란 이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해남에 대한 애정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하느냐?"

"...... "

"정말 저 사패련이 마수를 뻗쳐 올 때, 저 구파가 지원을 보낼 거라 보느냐?"

"그, 그럴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합니다. 그것이 도의이고 협의 아닙니까?"

장로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림 정도 되는 문파라면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지원을 안 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금양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행동에는 힘이 없었다. 확신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묻겠다. 그럼 그 소림이 보낸 지원이 제때 도착할 거라 생각하느냐?"

"그건...... "

이 말에는 아무도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확신하고 있다. 소림은 분명 지원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지원은 결코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진심으로 보낸 것이든, 적당히 시늉만 하는 것이든 말이다.

"소림이 원하는 것은 적당한 명분과 적당한 실리겠지."

금양백이 허탈하게 웃었다.

뻔히 보인다.

"엄중히 경고하고, 무력으로 응징도 하려 하겠지. 하지만...... 그 응징을 위해 출발한 이들이 정말 강남 깊숙이 들어오겠느냐?"

"...... "

"그저 장강 어귀에서 시위나 하고 있겠지."

"자,장문인...... 소림이 설마 그렇게까지는...... "

"저들에게 있어 우리 해남이 주력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구할 가치가 있는 문파더냐?"

금양백이 이를 악물었다.

"화산이 급하게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시기에 화산의 빈자리를 급하게 채워야 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정말 우리가 지금 구파일방으로서 행세를 할수 있었겠느냐?

저들로부터 이민족이라며 은근히 멸시받던 우리 해남파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화산이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해남이 그 견고한 구파일방의 벽을 깨고 들어가는 건 영원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구파일방이라 해 봐야 우리는 그저 구색이나 맞춰 주는 문파에 지나지 않았던 거지."

"장문인...... "

"내 말이 틀렸더냐?"

금양백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저 소림이 정말 능력이 부족해서 한 해가 지나도록 해남으로 연통 하나 보내지 못했단 말이더냐?"

",,,,,, "

"그것도 참 암담한 말이구나. 그 말은 곧, 저 사패련의 힘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그 소림조차 무력하게 만들 정도라는 의미니까!"

"장문인! 고정하십시오. 소림은 구파일방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

"그것참 재미있는 말이구나. 내 장담컨대, 아마 화산파가 그 말을 들었더라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한 문파가 기둥뿌리조차 남기지 않고 무너진다고 해도, 구파일방의 공고한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 자리를 또다른 명문이 채울 뿐이었다.

바로 해남이 그 수혜를 받았던 곳이 아닌가? 백 년이 지나 이제 그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한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인가?

"구파일방도 비난이야 받겠지. 손가락질 당하고 욕도 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영원하겠느냐?"

"...... "

"결과적으로 사패련을 막아 내기만 한다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평해지고, 해남에 전력을 낭비하지 않은 방장의 선택은 살을 베어 내는 결단이었다고 칭송받겠지. 그렇지 않더냐?"

"장문인...... "

"세상의 인심이 결국 그런 것을."

금양백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결국은 잊힐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화산을 잊었던 것처럼. 아니, 아마 그 이상으로 빠르게."

금양백이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보았다. 죄를 지은 이들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죄를 지울 수 있는지 말이다. 과거 화산이 겪었던 일을 이제는 해남이 겪게 될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과거에 가장 적극적인 가담자였던 해남은 이 상황을 속시원히 비난하고 욕할 자격조차 없단 점이다.

모두가 참담한 심정으로 침묵하던 그때, 금양백의 귓가에 넋두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천우맹에 드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순간 말을 한 이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입을 열었던 장로가 살짝 떨떠름한 표정으로 망설이더니 이내 한을 토해내듯 말했다.

"마교가 나타났다고 사패련이 지배하는 강남 땅까지 쳐들어가는 천우맹이라면...... 거리가 멀다는 변명으로 같은 소속의 문파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 목소리를 끝으로 대전 내부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한없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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