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화. 더없이 그러하다. (5)
모두가 임소병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평소 보여 주는 모습 때문에 종종 잊어버리곤 하지만, 이 사내야말로 신주오패 중 하나이자 중원 모든 산을 지배한다는 녹림의 왕인 것이다.
그런 이가 직접 안내하는 산길이 어떻게 위험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녹림은 이미 강남에서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당패의 물음에 임소병이 여유롭게 웃으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겠습니까?"
"예?"
"사람이야 철수했다지만, 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천하의 어떤 이들도 녹림만큼 산을 잘 알진 못하지요."
임소병이 펼친 손을 그러쥐어 보였다.
"강남에 있는 산들을 저만큼 속속들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패련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산에서만큼은 제 상대가 아니다 이 말이지요."
"...... 과연."
임소병의 지략과 녹림왕의 지식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모두가 감탄하려는 그 순간, 한구석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 "
청명이었다. 그의 얼굴에 '뭐 그딴 걸 대단하답시고 지껄이지?'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산적 새끼들이라 관군만 나타나면 꽁지빠지게 도망 다니고 숨는 데 이골이 났다. 그래서 쥐새끼처럼 안 들키게 가는 방법을 잘 안다, 이 말이잖아."
"사, 산의 지형과 샛길을 훤히....... "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잖아."
"중원 모든 산을 지배하는 녹림의...... "
"지배는 얼어 뒈질."
청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콧김을 뿜었다.
"중원의 모든 산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남이 안 쓰는 산이나 기웃대는 거지. 그렇게 중원 산을 다 지배하고 있으면 숭산에도 산채 하나 차리지 왜?
소림 땡중 새끼들이 외롭던 와중에 이웃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하겠냐?"
"...... "
이윽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탄을 터뜨리던 이들이 서로를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좀 과장된 이야기이긴 하네요."
"좀이 아닌 것 같은데요? 무당산이나 화산에도 산채는 없잖습니까. 종남산에도 없고...... ."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름난 산에는 산채가 없네요."
"이름난 산은 다 잘나가는 문파가 하나씩 들어차 있는데 산적이 어떻게 거길 들어갑니까?"
"그럼 좀 웃기긴 하네요. 오악 같은 명산에는 발도 못 붙이고, 남들 안 들어가는 산에만 산채 차리고 있는데 중원의 모든 산을 지배한다고 말하는게...... "
남궁도위는 임소병과 눈이 마주치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임소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흠! 무, 물론 모든 산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강남에 있는 산들만큼은 제가 꽉 잡고 있습니다."
"꽉 잡아?"
청명이 피식 웃었다.
"정체 들킬까 봐 다른 놈 내세우고 숨어 다니던 놈이 잘도. 직접 가 본 적은 있냐?"
"...... "
"사파 새끼들은 왜 입만 열었다 하면 저렇게 허세를 못 떨어서 안달인지 몰라. 저 망할 허세만 좀 덜 떨었어도 사파 평균 수명이 십 년은 더 늘었을텐데. 쯧쯧쯧."
백천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니냐?"
"응?"
"사파가 빨리 죽는 거니까."
"어...... ?"
청명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는 듯 임소병을 다시 보았다. 임소병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정파냐! 사파에서도 안 쓸 악독한 놈들 같으니라고!"
"뭐래."
역시나 깔끔하게 무시한 청명이 임소병이 펼쳐 놓은 지도를 주시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따지면."
"...... 예."
"강남을 가로질러 가는 게 다른 길에 비하여 아주 많이 위험한 대신에 어마어마하게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거지?"
"...... 그렇지요."
"위험하고 빠른 길?"
"...... "
"그래, 그래. 위험하고 빠르다 이 말이지."
혼자 되뇌어 보던 청명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두의 얼굴엔 짙은 불안이 내려앉았다. 결국 그들이 필사적으로 찾게 회는 건 화산의 장문대리가 된 백천이었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당신네 집 자식이잖아!'
'장문대리가 됐으면 뭐라도 해야지!'
그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백천이 어색하게 웃으며 청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명아, 그...... 네 생각이 뭔지 대충 짐작은 간다마는...... 어...... 굳이 위험한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잖느냐? 그렇지?"
"에이, 사숙. 내가 등신 새끼도 아니고."
"으응?"
"굳이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그, 그렇지?"
백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이놈이 철이 좀 들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 씨익 웃는 청명의 낯이 보였다. 불길할 만큼 환했다.
"그래. 돌아서 가는 게 맞지."
"...... 그렇지? 내 생각도...... "
"나야 상관없지. 편하게 다녀온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 물론 해로로 빙빙 돌아가거나 육로로 빙빙 돌아가면서 기껏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해남에 도착했는데,
눈에 뵈는 거라고는 기둥뿌리까지 뽑혀 나간 해남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뭐 그렇게 큰 문제겠어?"
"...... "
"천천히 가도 되지, 그럼. 장일소 새끼 성격으로 보건대 안정만 되면 일단 해남 새끼들부터 껍데기를 벗겨 버리려고 할 텐데, 특히나 우리가 소림이랑 갈라섰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면 옳다구나 하고 싹 다 불태워 버리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원래 문파는 제 손으로 지키는 거니까."
백천의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문파는 그래도 살아날 수 있어. 화산도 한번 아주 시원하게 활활 타고 다시 회생했는데, 해남이라고 못 하겠어? 걱정 마, 걱정 마.
해남은 바다에 있으니까 전각도 화산처럼 바싹 말라 있질 않아서, 그래도 기둥뿌리는 남을 거야."
이제는 다른 이들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삐질삐질 솟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냐. 백 년 정도 삼류 문파됐다가 재건하면 되지. 문도가 한 열 명 남으면 분위기도 가족적이고 얼마나 좋은데."
"...... "
"아, 물론 반쯤 장문인 협박해서 장문대리가 된 사숙이나, 그 협의니 미래니 하는 말을 듣고 장문인 자리에서 내려온 태상장문인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짓을 한 것들이라고 손가락질 좀 받겠지.
그리고 그 와중에 천우맹도 쪼다에 등신 집단이란 소리를 좀 듣기야 하겠지만, 뭐 우리가 그 소리 듣기 싫다고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그, 그만...... "
"에이. 괜찮아, 사숙. 별로 큰 일도 아닌데. 응? 협의? 에이, 그런 건 그냥 남들 앞에서 입으로나 하는 거지! 세상이 다 그런거잖아. 안 그래? 남들 앞에서나 우린 협의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다 떠들고 그러는 거잖아.
남들 안 볼 때 누가 그런 걸 지켜? 그냥 적당히 시늉만 해도 '아, 그래도 저 새끼들은 뭔가 하려고는 했구나!' 소리는 들을 수 있는데. 안 그......"
"육로로 갑시다!"
"장강 건너, 씨발!"
"해남으로 일직선으로 간다! 일직선으로!"
"모두 닥쳐! 그냥 제일 빠른 길로 가!"
기겁한 이들이 백천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장문대리! 산길로 갑시다!"
"나, 남궁 소가주님. 일단 진정을 좀 하시...... "
"지금 진정을 하게 생겼습니까? 해남을 제 때 못 구했다간 남궁의 명예가 아주 처박히게 생겼는데? 그걸 누가 감당할 겁니까, 누가? 장문대리입니까?"
"...... "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러려고 무학이 강한 사람을 차출하라고 한 것 아닙니까? 강남 가다 사패련에 걸려서 누가 죽는다고 해도 그건 장문대리 탓이 아니라, 도망도 못 히면서 이 일에 지원한 사람 잘못이니 그냥 갑시다!"
"아니...... 언제 그렇게 과격해지......"
"과격한 게 아니라 합리적인 거지!"
언제부터? 그게 대체 언제부터 합리적인 게 됐는데?
"흐음. 말은 거칠지만, 사실 별로 틀린 말은 없습니다."
임소병이 은근히 백천을 채근했다.
"상식적으로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따지자면 해남행 자체가 그리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건 맞지."
"제정신 아닌 짓이긴 하지."
"그런데 그걸 하자고 한 게 장문대리잖아?"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백천에게로 쏟아졌다. 조금 당황한 백천이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데 이제 와 뭘 이것저것 따지시는지."
"그런 사람 있잖습니까. 계획은 거창한데 막상 실행할 때가 되면 엉덩이 슬슬 빼는."
꽉 쥐어진 백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그가 열받은 이유는 은근슬쩍 그를 도발하는 문주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등 뒤에 숨어 반쯤 얼굴을 내밀고 '사숙 쫄았네.' 하며 연신 쫑알대는 청명과 조걸 때문이다.
"사숙."
그때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윤종이 입을 열었다.
"망설여지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해남에 도착했을 때 일이 끝나 있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
"우리가 해남행을 선택한 건 천우맹의 성세 때문도 아니고, 각 문파의 입장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고립되어 무너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해남을 버려둘 수 없다는 협의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이미 사숙도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고민하시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자 된 입장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
"사숙께서 했던 말을 기억하십시오.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협의는 협의가 아닙니다. 거꾸로 말하면 협의를 이행하려 하는 자는 위험 감수하기를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미타불."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윤종 도장의 말이 맞습니다, 장문대리."
"...... "
"결정을."
모두가 백천만을 응시했다.
사실 백천이 이곳에서 가장 직위가 높은 이는 아니다. 백천이 아무리 화산의 장문대리라고 하지만, 이곳에는 녹림의 수장과 남궁세가의 수장, 거기에 북해빙궁의 수장도 있다.
직위로 따지자면 백천도 그들에게 밀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백천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 일행의 결정권자가 백천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인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으로 갑시다."
"...... "
"가장 빠른 길로."
그 말에 모두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백천이 그런 그들과 마주 웃어 주려는 순간.
"저걸 진짜 받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런 양반이 화산의 장문인이 된다니. 화산의 미래도 뻔하겠어."
아니, 이 새끼들이? 너희들이 그 길로 가자며?
"뭐...... 별 수 없지. 까라면 까야지 않겠습니까."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하면 전부 다 사숙 책임입니다."
"에이. 사숙 잘못 만나서 이게 뭐 고생이야."
오검도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백천은 기가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가 할 말을 찾기도 전에 청명이 입을 열어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튼 그럼 그렇게 결정이 났고. 녹림왕."
"예이."
"길은 확실하게 안내해라."
청명이 순간적으로 사람을 꿰뚫을 듯 차갑고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임소병이 미소를 지우고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
모두의 시선이 드넓게 펼쳐진 장강과 그 너머의 땅 쪽으로 옮겨갔다. 이제부터 그들은 저기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럼 배는 어디서 수배합니까?"
"배? 무슨 배?"
"...... 배가 있어야 장강을 넘죠?"
"뭔 배부른 소릴 하고 있어? 왜? 우리 지금 배 타고 강남으로 가는 중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게?"
"...... 그럼?"
청명이 무성의한 턱짓으로 강을 거리켰다.
"잠수해."
"...... "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조용히. 살포시. 남 눈에 안 들키게."
"...... "
"출발."
누런 장강을 바라보던 일행의 어깨가 동시에 축 처졌다.
본디 협행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