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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14화 (1,215/1,567)

1214화.  더없이 그러하다. (4)

"해로! 해로가 좋을 것 같소!"

"아, 아니, 잠시만요. 일단 육로를 ...... "

"아, 닥치십시오! 일단 하나로 빨리 정하라고!"

"해로! 해로로 갑시다! 배 타 보는 게 평생 소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주기적으로 배를 타지 못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습니다! 진짭니다!"

모두가 필사적이었다. 청명이 어떤 인간인지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청명에 대해서는 그만 알아도 충분한 화산의 제자들은 말 그대로 생명의 위기까지 느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아아, 시끄럽고."

청명이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벌써 뭘 정한 건 아니잖아? 그냥 이야기나 들어 보자는 거지. 그래도 지락이라면 천우맹에서 첫손에 꼽히시는 녹림왕께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어?"

"사파 새끼라며?"

"불태워야 한다더니?"

"사파 놈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속이 뒤틀려서 위장약 먹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청명이 오검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도사라는 것들이 출신 성분으로 사람을 차별하다니, 말세다. 쯧쯧쯧."

오검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의 어깨에 절망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남궁도위가 임소병을 향해 슬쩍 물었다.

"녹림왕. 세 번째에는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임소병은 코에 찬 피를 한차례 풀고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보면 모르쇼? 빠르잖습니까."

남궁도위의 눈가가 희미하게 경련했다. 그는 임소병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응?"

"제가 사파분께 너무 많은 걸 바랐습니다. 그 능력에 맞지 않는 과한 것을 요구하는 것 역시 예의에 어긋난 행동인 것을......"

"하?"

이번에는 임소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영 샌님에 깍쟁이 같던 양반이 화산이랑 좀 어울리더니 살살 비꼴 줄도 알게 되셨고, 아주 잘 자라고 계시네?"

"그게 어디 꼭 화산 덕분이겠습니까? 녹림왕께서 친히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아아, 그러셔?"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충돌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패가 한 손으로 배를 꾹꾹 누르기 시작헀다. 그러자 당소소가 말없이 그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 이게 뭐냐?"

"위장약이요."

"...... "

"넉넉히 챙겨 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익숙하거든요."

"...... 고맙다."

그래도 오라비를 생각해 주는 건 누이밖에 없.... 아니, 이게 아니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제발 일 좀 합시다, 일 좀!"

"크흠."

"흠흠."

당패의 지적에 크게 헛기침한 임소병이 말했다.

"물론 조금 황당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

"조금?"

"많이 황당한데요?"

"제정신인지 궁금할 정돈데?"

"...... "

잠깐 말문이 막혔던 임소병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이어 말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면 그리 황당한 의견만은 아닙니다."

"황당할 것 같은데?"

"황당함의 기준이 다른 것 아냐?"

"이게 사파식인가? 하기야 장일소 그 새끼 보니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더라."

임소병의 볼이 파르르 경련했다. 저 화산 새끼들은 그를 지나가던 산적 나부랭이로도 여기지 않는게 분명하다. 아무리 그래도 녹림왕 면전에 대고......

"아, 잡설 치우고 깔끔하게 설명만 하라고! 여하튼 사파 놈들은 천성이 사기꾼이라 그런가. 입만 열면 혀가 길어, 혀가!"

하지만 그런 임소병의 불만은 청명의 짜증 앞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래, 저 새끼를 데리고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화산 사람들은 정명한 도사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뭐? 왜?"

"...... 아닙니다."

임소병이 한숨을 쉬며 부채를 꽈악 펼쳐 냈다. 하지만 이미 못 볼 꼴을 다 보여서 그런지 영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육로로 강남을 꿰뚫는 길은 분명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정 단축에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째서요?"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그렇게 맞더니 결국 머리를 다쳤구나.' 생각하며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임소병이 고개를 저으며 얼른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자! 잘 생각해 보십시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주 간명하지요. 일정이 길어졌을 때 생기는 문제가 뭡니까?"

"해남이 위험해진다?"

"그럴 수 있겠군. 해남은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까."

그나마 남궁도위와 당패가 상식적인 의견을 내 주었지만, 임소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진짜 큰 문제는 저 사패련과 구파가 우리의 부재를 알게 된다는 거지요."

"아...... "

그 말에 윤종이 깨달은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지 냉큼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사형?"

"생각해 보거라. 구파건 사패련이건 지금 이 장원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겠느냐?"

"...... 그렇지요."

물론 주변을 직접적으로 감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력이 약한 이들이 더 강한 이를 감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장일소나 일문의 문주급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청명의 이목을 속이고 주변을 세세히 감시할 순 없다.

하지만 오가는 이들을 통해 장원의 상황을 어림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도 저들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건, 청명이 놈과 문주님들. 그리고 이번에 장문대리가 되신 사숙의 움직임이겠지. 그런데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루아침에 씻은듯이 사라지면 뭐라 생각하겠느냐?"

"...... 장원에서 떠났다는 걸 알게 되겠네요."

"그렇지."

타악!

임소병이 접은 부채로 제 손을 내리쳤다.

"정확합니다. 제가 봤을 때, 우리가 이 장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저들이 확신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흘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은밀히 움직여도, 어떤 길로든 해남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숨길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저들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사람을 풀어 저희를 찾으려 하겠지요."

"아닙니다."

탁, 탁!

임소병의 부채 끝이 지도 아랫부분에 그려진 해남도를 가볍게 두드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여력이 되는 이들을 움직여서 해남을 봉쇄해 버리는 거로도 충분하지요. 길이 어디가 되었든 결국은 해남으로 올 거 아닙니까?"

"아...... "

"그게 아니면...... "

임소병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살짝 스쳤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해남을 지워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숙연하게 감돌았다. 여차하면 그들의 움직임이 오히려 해남의 운명을 좀 더 빨리 결정지어 버릴 수도 있단 생각이 든 것이다.

"중요한 건 사흘입니다."

임소병의 부채 끝이 구강에서 해남까지 다시 한번 선을 그렸다.

"이곳에서 구강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이천오백 리. 어마어마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말 정도는 우습다 할 만한 속도로 달리는게 가능하지요.

한 시진에 백 리만 간다고 해도 하루 열두시진이면?"

"...... 천이백 리."

"예.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저 사패련이 알기도 전에 해남에 도달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거지요!"

"자, 잠시만요! 녹림왕!"

남궁도위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일단 해남으로 가는 길은 직선거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는 관도나 대로로 달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열이 넘는 이들이 그런 속도로 관도를 질주하면 이틀은커녕 두 시진도 지나기 전에 온 강남이 저희의 행적을 알게 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인 이상, 같은 속도로 이틀을 내리 쉬지도 않고 달리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요."

"그렇죠."

"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인원이라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길을 이용하여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한다고 해도 해남과 가까운 해얀에 도달하기까지 닷새 이상은 걸리지 않습니다."

"...... "

"그렇게 된다면 설령 저들이 사흘째에 우리의 부재를 알아채고, 해남으로 병력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 우리가 먼저 해남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지요."

임소병의 말에 당패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잠시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해남에 들어가도 그냥 해남과 같이 포위되는 꼴이 아닙니까?"

"쯧쯧. 당 소가주께서는 아직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신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사천당가 분들이 장강으로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한 뒤 도착하기까지 며칠이 걸렸습니까?"

머릿속으로 지난 일을 떠올려 본 당패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답했다.

"열흘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소수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천당가라서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겁니다. 해남을 봉쇄하거나 멸문시키기 위해서는 사천당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원이 필요할 터. 못해도 보름이상은 걸릴 것입니다."

"아...... "

"그 시간이면!"

타악!

임소병이 부채로 지도를 한차례 탁 내리쳤다.

"해남을 설득하고 해남도가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올 방법을 강구하기까지 그렇게 빠듯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해남의 상황을 봐야 하겠지만 말이지요."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네가 몸을 빼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고?"

"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저야 여러분들처럼 그 양반들의 사정에 목숨 걸어 줄 의리는 없는 사람이니까요."

청명이 히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의 입에서 의리와 협의가 나오는게 오히려 더 어색할 것이다.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합니까? 저들이 정말로 우리가 강남으로 향하는 걸 모를까요?"

조걸의 물음에 임소병이 씨익 웃었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리 요란스레 승계식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지요."

"예?"

"한 문파의 장문인이 바뀌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일입니다. 저 장일소마저 사패련을 집어 삼키고는 그 뒷감당을 위해 발이 묶여 은인자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렇죠."

"아무리 화산이 근본도 없고 생각도 없는 문...... 아니, 아니! 저들이 그리 생각한다는 겁니다! 저 말고요! 주먹 좀 내려 놓으세요!"

"...... "

"아무튼 그런 문파라고 한들, 장문인을 교체하자마자 장문대리를 문파 밖으로 내돌릴 거라고는 생각 못 할 겁니다.

특히나 방장과의 대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사패련이라면 말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야 백천이 어떤 생각으로 장문대리가 되었는지 알고, 백천이 어떤 이인 줄도 아니까 이 상황을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패련의 입장에서는 그저 한 문파의 이대제자가 뜬금없이 장문대리가 되어 버린 상황으로 보이지 않곘는가?

그런데 그런 이가 다음날도 아니고 그날 바로 문파를 떠나서 강남을 뚫고 해남으로 향한다?

'미친 짓이네.'

'사람 할 짓이 아니네.'

'그 정도면 의원에 보내야지.'

'그런데 그걸 우리가 하고 있잖아?'

임소명이 씨익 웃었다.

"아시겠습니까?"

"...... "

"예상 못 할 겁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저 장일소의 입에서도 미쳤다 미쳤다 듣기만 들었지, 이렇게 제대로 미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에헤이! 욕이 아니라니까, 욕이!  누가 저 분 좀 잡아 주십시오!"

모두가 임소병의 현란한 말솜씨에 웬만큼 넘어간 그때, 윤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녹림왕, 정말 강남을 관통하면서도 저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저 사패련의 영역에서? 그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 순간 임소병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조소했다.

"제가 처음에 뭐라 말씀드렸는지를 잊으셨군요."

"예?"

"이 모든 길을 정함에 있어서 첫 번째 고려사항은, 천우맹의 입지가 강한 영역으로 이동해서 우리의 행적을 저들에게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에 선택한 곳이 절강과 안휘, 그리고 사천과 운남이었지요."

"...... 그렇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예?"

순간 윤종이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자 임소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강남으로 간 우리가 어디를 통해 이동한다 했습니까?"

"그야......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길...... 아!"

윤종이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임소병에게서 숨 막히도록 위압적인 기운이 흘러 나왔다.

"다들 잊으신 모양인데, 저는 녹림의 왕입니다."

"...... "

"그곳이 강남이 되었건, 강북이 되었건 천하의 모든 산은 녹림의 영역."

그 기세에 모두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안내해 드리지요. 저 강남으로. 녹림왕의 가호 아래 말입니다."

녹림왕 임소병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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