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화. 더없이 그러하다.(1)
연무장으로 이어지는 길 한편에서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도위가 멍한 얼굴로 당패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겁니까?
"그…… 백천 도장이 아니라 운암 도장께서 장문인이 된다고 하시는 것 같지 않은가?"
"운암 도장이요?"
남궁도위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운암 도징이라는 분이……'
그의 시선이 백천의 옆에서 어깨를 떨고 있는 운암에게로 향했다.
'저분이셨지.'
남궁도위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남궁도위에게 운암은 딱히 존재감이 없었던 이이기 때문이다. 아니, 운암뿐 아니라 화산의 운자 배 자체가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이거 괜찮은 건가?'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현자 배가 물러났을 때 운자 배가 장문인 자리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화산의 장문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이게 웬만한 이로는 그 무게를 버티기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천우맹 맹주의 위(位)마저 감당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운암이 장문에 오른다고 하니,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모르겠군."
당패 역시 같은 심정인지 중얼거렸다. 운암의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했다.
남궁의 가주가 될 남궁도위나, 당가의 가주가 될 당패나 소통에 있어 운암보다 백천이 훨씬 편하다는 점이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우선은 신중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확실히…… 장문인이시군."
다만 지금껏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당군악만은 이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과연 옳은 선택이시다."
그 말에 당패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주님…… 가주님께서는 화산의 장문인 자리에 저 분이 오르는 것이 좋다 보십니까?"
"좋고 나쁨을 가릴 일이 아니다."
당군악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가 화산의 장문 자리에 올라 더 문파를 잘 이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물론 더없이 중요하지."
"예, 그렇습니다."
당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백천이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외적인 명성이나 타문과의 관계를 감안했을 때 지금 화산에 백천만 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문인 자리는 그런 것만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문파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는지도 더없이 중요하지."
"……"
"그 자질과 명성만으로 장문을 택한다면, 누가 문파를 위해 헌신하고, 누가 문파를 위해 노력하겠느냐? 장문은 밝은 곳에서 빛날 이들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지만, 또 동시에 그늘에서 묵묵히 노력해 온 이들도 외면하지 않아야 하는 법."
그 말에 당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은 내심 감탄했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사실이거만…… 장문인께서는 놓치지 않으셨구나. 화산이 화산이기 위해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인 것을……"
당군악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의 끝에선 청명이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백천이 한 단계 밀려나게 돼서 좋아하는 철딱서니없는 사질로나 생각하겠지만……
'장문인 이전에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떤 이는 화산검협이겠지.'
화산검협은 꾸준히 백천이 장문대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해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백천이 똑같이 장문 대리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오히려 기꺼워하고 있다.
법도란 지켜야 하는 것. 법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 속에 한 문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반드시 피룡한 것들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문파의 선대들이 오래도록 고심을 거듭한 끝에 후대에게 이것만은 지켜 달라 말한 것. 그것을 어찌 그저 고리타분한 옛말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머리로 알았든, 본능으로 알았든, 화산검협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낄낄낄낄……"
"……"
"으헤헤헤헤. 꼴 좋다!"
"……아닌가?"
"예?"
"크흠."
당군악이 고개를 저으며 작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청명의 목소리를 털어 냈다. 쓸데없이 귀는 좋아서 이런 걸 들어 버린다니까.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저분은……"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지. 새로 임명된 장문대리가 장문인의 권한을 대행하고, 새 장문인은 내치에 힘쓴다. 그건 백천 도장 홀로 장문대리에 오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일 아니더냐?"
"아……"
당군악이 미소 띤 얼굴로 현종을 보았다.
"백천 도장이 맡기로 했던 대외적인 일들은 그래도 맡게 하고, 장문인께서 하시던 화산의 내치는 새로운 장문인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딱히 다를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명분과 법도를 모두 챙기셨지. 본인이 장문인의 자리에서 조금 빨리 물려나는 것으로 말이다."
그 말에 모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현종을 보았다.
별것 아닌 선택이것만, 듣고 보니 무척 합리적이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 결과를 스스로 먼저 물러나는 선택을 통해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현기가 느껴지네요."
"도인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저희는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화산은 검문인 동시에 도문인 거겠지."
세 사람의 시선이 운암과 백천에게로 향한다. 화산의 새 시대를 이끌 두 사람에게로.
"장문인…… 저는……"
운암이 저도 모르게 현종을 향해 입을 열고 말았다. 그래선 안 될 자리란 걸 알지만, 도저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런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외려 따듯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왜? 자신이 없더냐?"
"……그런 것을 따질 일이 아니잖습니까. 이미 제 뜻을 다 말씀드렸는데……"
"그래. 너는 분명 그러했지."
현종이 자애로운 눈으로 운암을 보았다.
"하지만 운암아. 내 마음은 그렇지 않더구나."
"장문인. 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
현종이 고개를 돌려 그 옆의 백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천이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네 생각에도 운암이가 화산의 장문으로 부족한 이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문인."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숙께서는 화산의 장문으로 누구보다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저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숙께서 끝끝내 거절하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상황이 시급하지 않았다면, 저도 당연히 사숙께 장문인 자리를 부탁드렸을 겁니다."
"그렇다는구나."
"장문인……"
어쩔 줄 몰라 하는 운암을 보며 현종이 미소 지었다.
"운암아."
운암이 의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현종이 입을 열었다. 표정, 목소리 할 것 없이 진심이 스미지 않은 데가 없었다.
"내가 부족하지 않은 순간 같은 건 영원히 오지 않는단다."
"……"
"중요한 것은 부족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부족함에도 그 책임을 감당할 각오가 있는가란다. 백천이가 보여 주지 않았더냐."
"……장문인."
"나 역시 그러했다. 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게만 느껴졌지. 장문인이 되는 것이 정말로 무섭고 두려웠단다."
운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귓가에 스승이 전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는 그 자격이 있는 이다."
"……"
"네가 말했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지금은 지키는 이가 아니라, 나서는 이가 잠문의 직을 맡아야 할 때라고."
"……예."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운암아. 내 마음이 그리 말하지 않는구나."
합리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선택할 것을 선택하는 것.
하지만 때로는 그 합리 속에 수많은 가치가 묻혀 버리기 마련이다. 현종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합리 속에 묻힌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마음을 따르는 것이 협의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이 도라면, 나는 지금 누구보다 협의를 관철하고 있고, 누구보다 도의를 따르고 있단다. 설령 그것에 화산으 ㅣ장문인으로서 조금은 좋지 않은 선택일지라도……"
현종이 슬쩍 청명을 일별하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떠냐? 나는 평생을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나 자신을 내리누르며 살아왔단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 정도는 내 욕심대로 할 권한이 있지 않겠느냐? 선대께서도 나를 나무라시지는 못할 것이다."
"자, 장문인!"
"말이야 바른말로 내가 선대에게 할 말이 많지, 그분들이 내게 할 말이 많겠느냐?"
현종이 익살스럽게 웃었다.
운암은 그 모습에서 낯섦과 친근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건 그가 보지 못했던 현종으 ㅣ모습, 그리고…… 어쩌면 그가 볼 수도 있었던 현종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리해 주거라. 네가 장문인의 자리에 올라 주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
운암이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긴 침묵이 찾아왔다.
현종은 그를 채족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운암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운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자 감히 장문인께 묻겠습니다."
"그리하거라."
"제자에게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있습니까?"
"그러하다."
"그렇다면 제자가 화산의 장문 자리에 오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더없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제자가 화산의 장문 자리에 오르는 것이 화산을 위한 일입니까?"
현종이 빙그레 미소 짓고는 답했다.
"그건 내가 대답할 것이 아니구나."
현종이 시선을 돌려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묻노라!"
화산의 제자들이 살짝 자세를 낮추었다.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그 대답을 준비했다는 듯. 세상에서 가장 우렁찬 목소리로 그 진심 어린 답을 내어 놓겠다는 듯이.
"제자 운암이 화산의 장문인 자리에 오르는 것이 화산을 위한 일이더냐!"
"그러합니다, 장문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을 뚫을 것 같은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암의 어깨가 절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니 묻노라."
현종의 시선이 다시 운암에게로 가 닿았다.
"제자 운암은 대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의 정기를 수호하고, 그 목숨을 걸어 제자들을 이끌겠느냐?"
운암이 고개를 조아렸다. 땅에 닿을 듯이 머리를 숙인 그의 입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자…… 제자 운암……"
그리고 마침내, 그의 고개가 들렸다.
"감히…… 감히 그 중책을 감당하겠나이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숨에 허리에 찬 자하신검을 풀어냈다.
"그렇다면 나 현종은 대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의 일대제자 운암을 새로운 화산의 장문으로 임ㅁ여하고 이 사실을 천하에 선포한다."
자하신검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현종은 다시 납검하고는 두 손으로 운암에게 건넸다. 운암은 떨리는 손을 들어 한없이 경건하게 그 검을 받아 들었다.
"제자! 목숨을 바쳐 화산 장문의 직을 수행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백천이 장문 자리에 오르기를 바랐으면서도, 뭇내 가슴 한 편에 운자 배에 대한 안타까움을 버리지 못했던 화산 제자들이 이제야 마음껏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요란한 가운데서 청명은 피식 웃었다.
"……개판이네."
법도도 없고, 격식도 없다.
그가 아는 장문 계승식은 본디 이런 게 아니다. 여기엔 천지신명께 지내는 제례도 없고, 선대의 장문들에게 기원하는 축원도 없다. 심지어는 정당한 절차와 엄격한 맹세조차 없다.
하지만…… 굳이 그걸 꼬집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나 모자란 게 많음에도,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장문인 계승식이 이제껏 봐 왔던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죠, 사형?'
하늘을 올려다보니 환히 웃는 청문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