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5)
장원의 공터를 연무장으로 쓰고 있는 상황이라 그리 넓진 않았다. 덕분에 화산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도열한 것만으로도 비어 보이지 않고 그득했다.
천우맹의 다른 문파들은 화산의 장문대리 임명을 위해 연무장을 비워 준 모양으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배려에 새삼 감사하며 백천이 무거운 한 걸음을 뗐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다. 종남을 떠나 화산에 처음 입문하던 때부터 그의 꿈은 장문인이 되어 언젠가는 화산을 종남보다 더 훌륭한 문파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어린 치기로 세운 목표지만, 이제 더는 치기가 남지 않았을 만큼 나이 먹고도 그의 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고, 더 단단해졌다.
이제 그의 꿈은 화산을 종남보다 훌륭한 문파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천하에서 제일가는 문파, 그것조차 넘어 강호의 흐름을 주도하는 문파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백천은 그토록 바랐던 꿈의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이다.
'긴장하지 말자.'
겨우 첫걸음일 뿐이다. 벌써 긴장한다면 앞으로의 험난한 길을 어찌 헤쳐 갈 수 있겠는가.
백천은 짧게 심호흡했다.
언제나 장난기 가득하던 화산의 문도들이 더없이 진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 속에서 백천은 앞으로 나아갔다. 정복을 갖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훤칠했다. 연무장 중앙을 따라 걸었고, 마침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문인과 장로들 앞에 섰다.
딱히 누군가가 말해 준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화산 이대제자 백천이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그 말을 신호로,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예를 갖추었다.
“장문인을 배알합니다!”
현종은 말없이 백천을 바라보다 뒤에 도열한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격식 있게 도복을 차려입은 현종에게선 평소보다 더 묵직한 진중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받은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자세를 바로 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이 자리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문파의 장문인을 새로 임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어떤 문파에서건 수장이 바뀌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런데 특히나 화산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할 수 있다.
화산은 그 어떤 문파보다 장문인의 권한이 강하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 멸문을 목전에 두었을 만큼 위기를 겪던 문파다.
그런 문파가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화산과의 결별을 의미함과 동시에 새로운 화산으로 거듭난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임명하는 것이 그저 '장문대리 일지라도,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하는 것과 다름없는 무거움을 가지는 것이다.
현종은 모든 제자들을 눈에 담았다. 평소와는 달리 칼날 같은 눈빛을 내뿜는 제자들을 보니 조금 낯설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직하다.
그 순간, 그는 밀려드는 묘한 기시감에 눈을 감았다.
'그랬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에 기시감이 느껴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이 기시감은 착각이 아니다. 현종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가 과거에 꿈에서도 바라 왔던 화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그의 제자들은 그가 항상 그리곤 했던 화산파의 미래보다 더욱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주었다.
꿈이 실현된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가 가슴에 차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새삼 이제는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게 실감되었다.
'어쩌면 조금 늦었던 걸지도 모르지.'
미련? 그런 건 없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 법. 제 역할이 끝났다는 걸 알아 버린 현종에게 미련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하나 남은 것은, 미련이라기보다는......
현종이 작게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제자들은 듣거라.”
“예, 장문인!”
화산 문도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고개를 끄덕여 준 현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 현종은 화산 장문인의 자격으로, 오늘 이 자리에서 후대의 화산을 이끌어 갈 새로운 장문인을 임명하려 한다.”
모두의 눈빛에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현종이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이제 달라질 화산에 대한 조금의 껄끄러움과 두려움.
하지만 가장 큰 것은, 달라질 화산에 대한 기대와 화산을 이끌어 갈 백천에 대한 굳은 신뢰일 테다.
현종은 생각했다.
좋겠지.
제자들에게서 저런 눈빛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라면 충분히 장문인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고, 현종보다 더 훌륭하게 장문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현종은 새삼 자신이 장문인이 되던 때를 떠올렸다.
사형들이 모두 화산을 떠나 버렸기에 떠맡듯이 맡게 된 장문인의 직. 축하도 축복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화산을 지켜야 한다는 오기와 무거운 책임감만 존재했을 뿐.
그때 그를 바라보던 현상과 현영의 눈빛은 현종이 평생을 두고 떠올리는 무거움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그렇기에 참으로 기꺼운 일이다. 새로 장문인이 될 이가 그와는 다른 시선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이제 화산은 과거 그가 물려받았던, 섬서의 망해 가는 문파가 아니다. 모든 것을 주먹구구식으로 선택하고, 몇 되지도 않는 이의 의견만으로 적당히 때우는 그런 곳이 아니다.
새 시대의 화산은 과거의 화산이 그랬듯, 당당한 섬서의 명문이자 천하를 울릴 대문파로서 그 체계를 갖추어 갈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대에 어울리는 이가 장문인 자리에 오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날 현종이 가져갈 것은 그저 화산의 새 시대까지 버텨 내었다는 자부심. 그것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화산의 장문인이란, 무릇 화산이라는 도문의 수장으로서 도인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하며, 검문인 화산의 수장으로서 검의 길을 올바로 걸어야 한다.”
백천의 얼굴이 실로 굳건하였다. 현종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백천이라면 잘해 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검의 길을 걸어 왔으며, 화산의 검수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협의를 그 가슴에 단단히 새겼으니까.
“나 현종은 이제 화산의 후대 역시 그 자격을 갖추었다는 판단하에, 화산의 장문인직을 다음 대의 장문에게 선위함을 조사와 선조께 고하려 한다."
현종의 몸에서 부드러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이에 이의 있는 자, 이곳에 있느냐?"
“없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자, 이곳에 있느냐?"
“없습니다!”
현종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 선조들께서도 미소로 그의 선택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현종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선조들께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잘해 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선만은 다했노라고, 한시도 화산 장문인 역할에 소홀한 적 없었노라고 말이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백천을 주시했다. 반듯한 얼굴에 무거운 책임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저런 표정이었을까? 그리고 그의 스승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그렇다면 나 현종은 선대로부터 그 권한을 인정받은 화산의 장문으로서, 제자들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받은 화산의 수장으로서 다음 대의 장문이 될 이를 선정하겠다.”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현종의 시선은 다른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모든 제자들, 심지어는 장로들마저 백천을 바라보는 와중, 홀로 올곧게 현종만을 바라보고 있는 청명에게로.
그 흔들림 없는 눈을 본 현종은 미소 지었다. 어쩌면 청명의 것과 닮아 있는 듯한 미소였다.
'선대들이시여.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뒤를 이어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은!”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떠나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온당히 그 자리에 올라야 할 이에게로,
“운암!”
“예?”
"......어?"
순간 제자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백이 넘는 제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하니 현종을 보았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게 당황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운암이었다. 그의 두 눈이 뒤흔들렸다.
반면 현종의 입가엔 익살맞은 미소가 맺혔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 하나만은 제 뜻대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도란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는 것.
그의 마음이 말한다.
백천이 더 훌륭한 장문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운암이 지금껏 화산에 헌신해 온 것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더 나은 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걸 당연히 여기게 된다면, 화산 역시 오직 능력만을 보는 문파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현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린 욕심이자, 도인으로서의 자신을 직면한 결과였다.
“어.......”
운암이 너무 당황하여 입도 다물질 못하자, 현종은 그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다음 생은 청명이 녀석처럼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이 광경은 현종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기분을 선사했다.
“제자 운암은 앞으로 나오너라!”
“자, 장문인......?”
운암은 어쩔 줄을 모르고 현종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 하는 것이냐?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더냐!"
짐짓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현종이 일갈하자 운암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일단 앞으로 나섰다. 멀찌감치서 보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다른 문파 사람들도 지켜보는 와중에 그가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운암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백천의 옆에 무릎을 끊자 현종이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현종은 화산 장문인의 권한으로 일대제자 운암을 화산의 장문으로 선택한다!”
운암의 얼굴에 망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현종은 다시 고함치듯 말했다.
“또한! 화산이 과거와 같지 않아 장문인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화산을 이끌어 나가기 어려운 바, 상시 장문대리직을 신설하고 대외적인 장문인의 업무를 분담하게 한다. 이에 화산장문대리의 자리에 이대제자 백천을 임명한다!”
“아!”
“어......?"
그래선 안 될 자리란 걸 알고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에 반대하는 자, 이곳에 있느냐?"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눈빛을 교환한다.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미래를 이끌 이와, 과거와 미래의 화산을 이어 줄 이에게로.
이윽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없습니다. 장문인!”
그 터질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사람, 청명이 히죽 웃었다.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현종을 보는 그의 시선에 다시없을 만족감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오후 12:01 2022-04-24, by. 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