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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07화 (1,208/1,567)

1207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2)

현종이 안쓰러운 눈으로 눈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수심 가득한 그와는 달리,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의 표정은 더없이 담담했고, 그래서 속이 더 쓰렸다.

‘나는 참 모자란 사람이구나.’

돌이켜 보면 백천의 지적은 정확했다. 현종은 분명 백자 배와 청자 배에 대한 과한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 했던 것들을 누리게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정말 아끼고 보호해야 했던 이들은 백자 배나 청자 배가 아니라, 바로 운자 배 아니던가?

물론 백자 배와 청자 배는 몰락한 화산에 입문했기에 안쓰럽고 안타까운 존재였지만, 운자 배는 그 몰락의 여파를 전신으로 맞은 이들이다. 그래도 아직은 여력이 있던 세가 일시에 기울고, 풍비박산이 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끝끝내 화산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절망까지 떠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현종은 운자 배를 백자 배나 청자 배처럼 아껴 주지 못했다.

‘참으로 못났구나.’

가세가 기운 집에서 가장 힘든 이가 장남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눈은 막내에게서 떼지 못하는 가장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장남에게 해 줄 것이 없게 된 못난 가장 말이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지, 목이 메는지, 살짝 머뭇거린 현종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어찌할 수 없는 잔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에, 운암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새삼스럽습니다, 장문인.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너에게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이 녀석아. 이런 일을 장문인인 나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이렇게 덜컥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상의를 드릴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래도 했어야지, 그래도.”

운암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현종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운암이 답답해서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운암에게 하고 있는 말이 나이가 들어 고집만 남아 버린 노인의 투정과 다를 바 없게 느껴져서다.

“이놈아……. 장문인 자리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었더냐?”

“아니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운암이 담담히 미소를 짓는다.

“화산의 장문이라는 자리는 막대한 책임감과 능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문파에서 가장 훌륭한 이만이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습니다.”

“…….”

“그렇기에 제 자리는 아닙니다, 장문인.”

“아니라니!”

결국 참지 못한 현종이 버럭 역정을 냈다.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무엇이 부족하기에 네 자리가 아니라고 하더냐? 당연히 네가 올랐어야 할 자리거늘!”

“장문인.”

운암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작게 한숨 쉬었다.

본디 그는 무른 사람이 아니나, 현종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인지 자꾸만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저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건 무슨 말이냐?”

“지금이 평범한 시대였다면, 태평성대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적당하게 흘러가는 시대였다면, 저도 당연히 장문 자리에 욕심을 내었을 겁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현종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조금의 미련이라도 보일 법한데, 운암에게서는 미련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탈속한 도인? 아니, 그런 건 아니다. 탈속한 도인이라면 장문인의 자리 역시 무가치하다 느껴야 할 터.

지금 운암은 화산 장문이라는 자리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현종은 그 사실이 더없이 대견하면서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다.

“다가올 시대에 화산을 이끌어야 할 이는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야 하고, 누구보다 판단이 빨라야 합니다.”

운암이 미소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장문인.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충분히 참고, 기다리고, 고심 끝에 좋은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면 저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어렵습니다.”

“야, 이놈아……. 왜 그렇게만 생각하느냐? 저 아이들이, 네 사형제들이 너를 도우면 될 일 아니더냐? 나는 뭐 대단한 이라서 화산의 장문을 하고 있다더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장문인.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운암이 작게 웃었다.

“착한 아이들입니다.”

“…….”

“저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장문인이 되지 못했단 사실이 아닙니다. 생각하던 길과 제가 걷게 될 길이 달라져 앞으로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저를 곤란하게 하는 건, 저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문파 아이들의 눈입니다.”

“…….”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참 착해 빠져서는…….”

현종이 눈을 딱 감았다. 애초에 그도 알고 있다. 설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운암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화산 제일의 고집쟁이다. 그런 면이 없었다면, 아직 애착이 강하지 않았던 화산에 남아 그 맥을 이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한번 정한 마음은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운암아.”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실 필요 없습니다, 장문인.”

“…….”

“자꾸 못 해 준 것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눈이나,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눈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저의 입장은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운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문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제가 불행한 건 아닙니다. 저는 화산의 문도일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합니다.”

“…….”

“그리고 장문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화산에서 해야 할 일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저는 장문인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지요. 백상이 녀석 혼자서 문파를 운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아시다시피 백천이 놈이 강단은 있지만 그런 부분에는 영 소질이 없지 않습니까.”

“운암아…….”

“장문인.”

운암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의 저는 매화가 되고 싶었습니다.”

“…….”

“장문인께서 버티신 인고의 세월을 이어받아, 화려하게 피어나는 매화가 되고 싶었습니다. 장문인의 겨울을 끝내는 이가 되고 싶었지요.”

운암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결국은 알게 되더군요. 그 역할은 제 것이 아니고,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현종이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반면 운암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래서 저는 뿌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꽃이 화려하게 피기 위해서는 그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 뒤를 이을 아이들이 더없이 고운 꽃을 피워 준다면, 흙 속에 파묻혀 있다 한들 무엇이 문제겠는가 했습니다.”

“장문인이란 그 뿌리 같은 자리다, 운암아.”

“예, 그렇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뿌리조차 제 역할은 아니었다는 걸 말입니다.”

현종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 꽃도 되지 못하고 뿌리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운암은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장문인의 눈빛에 서린 감정을 눈치챈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

“그래.”

“그래서 이제 제가 무엇이 되려는지 아십니까?”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

운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젊은 시절에는 몰랐습니다. 가슴을 호승심으로 채우고, 패기를 잃지 않으려 애쓸 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커다란매화나무뿐이었지요.”

“…….”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화산은 매화. 하지만 그 어떤 매화도 뿌리 내릴 터전이 없이는 피어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현종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저는 흙이 되려 합니다. 저 아이들이 뿌리 내리고, 더없이 고운 꽃을 피워 낼 수 있는 터전이 되려 합니다. 흙이 매화는 아니지만, 흙 없이 어찌 매화가 필 수 있겠습니까? 그 역시 중요한 역할이지요.”

현종이 눈을 감았다.

도기(道器).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현종 역시 문파의 흥망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진짜 화산의 도를 일궈 낼 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만약 지금이 평온한 시대였다면…… 운암은 분명 화산의 도를 천하에 떨칠 장문이 되었으리라. 선대와 후대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장문인이 되었을 것이다.척박한 대지에 피어난 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화산의 척박했던 세월은 어느새 운암으로 하여금 도(道)라는 꽃을 피워 내게 한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백천이가 장문이 되어 화산의 명성을 널리 떨친다면 그 역시 저의 공이고, 윤종이가 장문이 되어 화산의 도를 널리 떨친다면, 그 역시 저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청명이는?”

“말 같은 소리를…….”

“…….”

“…….”

“크흠, 그래.”

나직이 헛기침한 현종이 안색을 정비하고는 다시 운암을 똑바로 보았다.

“너는 그것으로 괜찮겠느냐?”

“일은 갑작스러웠지만, 아시다시피 오래도록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청명이 녀석이 화산에 들게 된 데도 저희가 알지 못하는 이치의 흐름이 있었겠지요.”

“…….”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게 두면 될 일입니다, 장문인. 자연스러운 것을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 건 그저 사람의 욕심 아니겠습니까?”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

“네가 도인이구나. 네가 도사고.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란다.”

운암이 작게 웃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부끄러워 마시고 자랑스레 여기십시오. 장문인께서 지금의 저를 만드셨고, 지금의 화산을 만드셨습니다. 선대도 분명 그리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 내 그러마.”

현종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운암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이조차 순리라는 것도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못내 가슴에 미련이 남는 것은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과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게 이다지도 힘든 일이구나. 그렇기에 등선이 지난한 것이겠지.’

현종은 운암을 부드럽게 불렀다.

“운암아.”

“예, 장문인.”

그리고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화들짝 놀란 운암이 현종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왜, 왜 이러십니까, 장문인!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맙구나.”

“…….”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그 이전에 한 사람의 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 말하마. 그저 고맙구나.”

운암은 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그저 담담하기만 했던 그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속에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와서.

“화산의 모두가, 그리고 훗날의 화산도 지금의 너를 기억할 것이다. 진정으로 도를 좇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네가 후대에 알려 줄 것이다.”

운암이 잠깐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현종은 말없이 그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삶의 대부분을 함께해 온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조금 긴 시간이 지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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