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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06화 (1,207/1,567)

1206화. 이제야 문파가 똑바로 돌아가네! (1)

권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고, 수많은 이들을 파멸로 밀어 넣었다. 권력이란 무릇 양날의 검과 같아서, 잘못 휘두르는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그에 매달리는 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질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곳, 화산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젊은 검수는 지금 자신이 가진 권력이 과연 길가에 널브러진 돌멩이만큼의 가치라도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거 챙기고, 이거도 챙기십쇼.”

“……고맙다.”

“가기 전에 잊지 말고 저한테 들러서 노자도 받아 가시고요.”

“그래. 잊지 않으마.”

“물 바뀌면 애들 배앓이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소소한테 말해서 약 챙기라고 하십시오.”

“뭔 무인이 물이 바뀌었다고 배앓이를…….”

“그러다 애들 탈이라도 나면 사형이 책임지실 겁니까?”

“……말해 둘게.”

“쯧.”

……불편하다.

물론 백상이 항상 편하기만 한 사제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백상은 백자 배 중 둘째로, 백천이 당연히 존중해 줘야 할 위치였다. 게다가 예전에는 그의 수족으로서 수많은 일을 해 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백천도 어느 정도는 백상의 눈치를 살피던 편이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 느끼는 이 불편함은 조금 궤가 달랐다.

“그…… 상아.”

“왜요?”

“……아니다.”

백천을 노려보던 백상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물품들을 뒤적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뭔 선불 맞은 황소 새끼도 아니고…….”

“…….”

“눈만 돌리면 일 저지르고, 눈 돌리면 또 일 저지르고!”

“…….”

“그거 수습은 다 누가 하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나이에 재경각주 되게 생겼네.”

“그…… 그냥 내가 장문대리를 맡는 것뿐이지. 너희가 딱히 뭔가 달라지지는…….”

백천이 말문을 닫았다. 백상이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백천의 면전에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굵은 철사에 꿰인 열쇠 꾸러미를 본 백천의 얼굴이 살짝 묘해졌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열쇠 같은데?”

“광이랑 창고! 식량이랑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열쇠들입니다! 열쇠요!”

멍하니 열쇠 꾸러미를 바라보던 백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중간에 있는 작은 열쇠는 뭐냐? 왜 열쇠에 금칠을…….”

“예. 잘 보셨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백상이 눈을 희번덕대며 언성을 높였다. 그 기세에 백천이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내, 내가 물었잖아…….”

“금고 열쇠입니다, 금고! 현영 장로님이 어딜 가든 신줏단지 모시듯이 업고 다니는! 현영 장로님 방 안에만 있는 문파 금고! 그 금고 열쇠요! 장로님이 저 섬서에서 여기까지 가져온 화산 금고 열쇠!”

“…….”

“평생 한시도! 심지어는 목욕을 할 때도 입에 물고 하시던 그 금고 열쇠를 저한테 넘기신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알지. 왜 모르겠니…….

“장로님들은 벌써 업무 넘길 생각에 희희낙락하고 계신데, 막상 일 저지른 사람만 머리에 꽃밭이 펼쳐져서는!”

“미, 미안하다.”

“에이, 진짜!”

백상이 콧김을 킁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쫄아 버린 백천이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았다.

“이십 년은 지난 후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내가 장로라니. 아이고, 위장이야…….”

백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이들이야 그냥 장로랍시고 거들먹거리면 되고 적당히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되지만, 백상은 경우가 많이 달랐다. 그는 현영에 이어 재경각의 각주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화산에서 업무적 부담으로 따진다면 비빌 곳이 없는 재경각이다. 당연히 재경각의 각주 자리에 강제로 올라야 하는 백상의 위장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응?”

현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무각주 자리는 정하셨습니까?”

“무, 무각주?”

“예! 무각주!”

“그거야, 어……. 현상 장로님이 내려오신다면 아무래도 운검 사숙이…….”

“운검 사수우우우우우욱?”

백상이 다시 눈을 까뒤집자 백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장문인이 백천이고, 재경각주가 백상인데! 무각주가 운검 사숙이요? 아무리 문파가 거꾸로 돌아간다지만, 무도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사숙에게 보고를 받겠다는 겁니까? 예?”

“그, 그럼 안 되지! 그렇지!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럼 누굴 올릴 겁니까?”

“그건…….”

백천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백상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말을 말아야지! 내가 말을…….”

“…….”

“사형.”

“으…… 응?”

백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제 말 똑바로 들으십시오.”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백천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이어질 말이 장난으로 흘려들을 만한 게 아닐 것 같아서였다.

“사형의 머릿속은 지금 강호의 정세와 천우맹의 앞날, 그리고 각 문파 간의 관계로 복잡할 겁니다.”

백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지금 그는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머리는 백상이 말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요. 큰 일을 두고 작은 일에 신경을 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백상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가화만사성이라 했습니다.”

“…….”

“선인들께서 제 손에 닿는 곳부터 신경을 쓰라 하신 이유는 발밑이 안정되지 않으면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형이 정말 화산을 잘 이끌고자 하신다면, 당장 손에 닿지 않는 먼 일보다 가까이 있는 일부터 제대로 살피셔야 합니다.”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백상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게 되면 내가 이런 말을 안 하겠지. 에이!”

“…….”

“해남 가는 길에 이거 읽으십시오.”

백상이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냐?”

“장부입니다. 화산의 재정출납부!”

백천의 얼굴이 살짝 떨떠름해졌다.

“이걸 굳이 내가 볼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하는 일인데, 나는 그냥 너를 믿고…….”

“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백상이 버럭 호통치자 백천이 움찔하며 찔끔 목을 움츠렸다.

“사람을 믿는 건 믿는 거고, 일은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자금은 문파의 핏줄과도 같은 겁니다! 혈관이 막히면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이!”

“그, 그렇지.”

“그럼 적어도 문파의 수입이 어떻게 되고, 지출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중간에 새는 돈은 없는지, 장부 정도는 볼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딴마음 먹고 돈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백천이 아무 말을 못 하자 백상이 작게 혀를 차더니 품에서 책자 하나를 더 꺼내 백천의 손에 얹었다.

“그리고 이것도 보십시오.”

“……이건 또 뭔데?”

“백자 배와 청자 배 애들 인적사항이랑, 성향, 무공 수위 같은 걸 분류해서 정리해 둔 겁니다. 문파는 문도가 근간 아닙니까. 장문인은 문도 하나하나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 아니, 백상아. 네 말에 틀린 건 없다. 다만 지금 내가…….”

“아, 당장 할 일이 아니라고요? 장문대리니까?”

“…….”

“속 편한 소리 그만하십시오. 누군 제가 이러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창고 열쇠 들고 다니기까지 십 년은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넘어오는 데 일 년도 안 걸립디다!”

“빠, 빠르네.”

“화산의 일이 상식적인 속도로 진행된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사형이 장문대리 호칭을 떼고, 진짜 장문이 되기까지 일 년도 안 걸립니다. 아시겠습니까? 거꾸로 말하면 사형은 지금부터 일 년 내에 장문인 업무에 완전하게 통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맞는데…….”

“지금 장문인께서 도와주실 거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딱 그 말을 하려 했던 백천이 다시 입을 합죽 닫고는 공손하게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건 권리는 누리고, 책임을 피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사형을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그건 저부터 용납 못 합니다!”

“그, 그래. 내 노력해 보마…….”

“그러니까 지금 준 장부와 인명록 완벽하게 달달 외우시고!”

백상의 품 안에서 다시 책자가 쑥 뽑혀 나왔다.

“또, 또 있……. 잠깐만.”

“이건 장문인께서 대외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화산의 사업장 정보와, 지금 화산이 벌이고 있는 사업들에 대한 대략적인 얼개를 정리해 둔 것.”

“아니, 뭔 품에서 책이 계속 나와?”

저걸 다 넣고 있었다고?

“이건 은하상단과 유령문을 비롯한 화산과 연대하는 곳들의 대략적인 정보와 내부 조직도!”

“…….”

“그리고 이건…….”

턱! 턱! 턱! 턱!

순식간에 양손에 탑처럼 책자가 쌓였다. 백천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충 이 정도만 보시면 화산이 어찌 돌아가는지 감은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 추린 것들이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머리에 쑤셔 넣으십시오!”

백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산의 장문인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하는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고…….

‘이건 원래 내가 당연히 알았어야 하는 것들이구나.’

그걸 지금까지 백상이 대신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단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고 묵묵히.

그 사실을 깨달은 백천의 얼굴이 굳어지자 백상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다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뭐…… 물론 좀 많기는 한데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사형은 알아 두시는 거고, 실제로 그걸 관리하고 운영하는 건 제가 할 일이니까요.

”백천은 새삼 백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건만, 백상은 백천이 수많은 업무에 질려 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시라니까. 대외적인 업무 때문에 바쁜 건 알고 있습니다. 안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알고는 계시라는 겁니다. 그 정도는 하셔야 훌륭한 장문인이…….”

“상아.”

“예?”

“……고맙다.”

순간 멍하니 있던 백상이 입술을 실룩였다.

“뭔 이상한 말을……. 여하튼 그거 다 숙지하십쇼. 저는 이제 식재 관리하러 가야 됩니다.”

살짝 얼굴이 붉어진 백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나가 버렸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백천은 책자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펴 들었다.

그 순간,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새로 쓴 책이다.

원래 있던 것을 보라며 찾아다 준 것이 아니라, 한 자 한 자 새로 쓴 것이다. 살펴보니 책자들이 다 그랬다.

천우맹의 맹도들을 먹이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백상이 아니던가? 보나 마나 이 책자들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아직 채 다 마르지도 않아 먹 냄새가 진동했다. 백천은 눈을 떼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책장을 덮었다.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망할 놈 같으니…….”

책임은 백천만 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아가는 만큼, 다른 이들도 그만큼의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간다. 모두가 그 무게에 익숙해졌을 때,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화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실망시키지 않으마.’

백천은 굳은 다짐을 다시 한번 새기며 책자를 모두 챙겨 들었다. 그리고 창고 문을 열려던 그 순간 귀를 찌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니이이이이, 목검은 무슨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그걸 왜 그렇게 막 써 대고 있어! 그리고 내가 대련할 때 의복 안 찢어지게 조심하라고 했지? 이 새끼들이 진짜 옷이 때 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나!”

“아, 아니, 사숙……. 대련을 하는데 어떻게…….”

“뭐? 너 이 새끼 지금 반항하는 거야? 돈 한 푼 못 벌어 오는 식충이 같은 것들이 어디서 사숙들이랑 사형들이 몸뚱이 하나로 벌어 온 피 같은 돈을 귀한 줄 모르고 막 써 대!”

“자, 잘못…….”

“화산에 돈이 영원히 펑펑 쏟아질 것 같아? 청자 배 놈들은 고생을 덜 해 봐서 그래? 왜 돈 귀한 줄을 몰라! 나 때는 옷 한 벌도 수십 번을 꿰매서 입고! 목검 한 자루도 직접 산에 올라가 나무 베어다 깎아 썼는데! 하여튼 요즘 것들은 정신이 글렀어!”

“잘못했습니다, 사숙!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내가 지금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잖느냐! 엉? 애초에 그 돈이 다 네 장문대리와 청명이 놈이 칼 맞고! 장력에 얻어맞아 가며 벌어 온 돈인데! 그걸 너희가…….”

“히이이이이익!”

연이어 귀를 찔러 오는 송곳 같은 잔소리를 묵묵히 듣던 백천은 잡았던 문고리를 조심스레 다시 놓았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읽어야겠지?”

그리고 좀 조용해지면 나가자…….

조용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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