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05화 (1,206/1,567)

1205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5)

넘치도록 따라진 술이 출렁였다.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장일소는 심드렁한 낮으로 고개를 젖혔다.

"갔니?"

"예, 련주님. 지금 막 련을 빠져나갔습니다."

"쯧."

작게 혀를 찬 장일소는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저리 심약해서야. 상계에서는 알아주는 이라고 해서 조금 기대했건만."

"......웬만하면 맞장구를 쳐 드리고 싶습니다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시진 만에 정신을 차린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 주고 싶습니다."

"음?"

"지금의 련주님을 독대한 것을 고려하면 말입니다."

"쯧쯧. 너도 요즘 슬슬 혀에 꿀을 바르는구나. 이러니 권력자가 타락하는 게지."

장일소의 힐난 아닌 힐난을 들은 호가명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치시겠습니까?"

"끄응."

슬쩍 앓는 소리를 흘린 장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상계의 거두라는 놈도 저런 머저리인데, 너를 대신할 이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느냐?"

그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심약한 건 그렇다 치고, 그래도 상인이니 머리는 조금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웠겠지요."

호가영은 가볍게 웃으며 심경을 거들었다.

저들이 보기에 련주님은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련주님이 재물을 털어 양민들을 구휼하겠다고 나서셨으니, 저들의 입장에선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러니 멍청한 거란다."

작게 혀를 찬 정일소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이득만을 추구한다는 상인이라는 놈이, 이득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뜻이잖니."

"......"

"위정자들이 선과 질서를 내세우는 것은 위정자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멍청한 양민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지. 그걸 이해했다면 저따위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터.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상인이라면 선과 질서가 이득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니?"

호가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련주님께는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저희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엄살이 심하구나. 너라면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호가명은 쓰게 웃었다.

지배자가 폭군이 되는 이유는 욕심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멍청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욕심이 많은 왕은 법과 질서의 완벽한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게 왕에게 가장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욕심에 따라 행동하고 질서와 법을 무시한다면 원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 혼란을 안정시키는데 막대한 힘과 자금이 소모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선을 지키고, 질서를 숭상하게 된다면 왕은 어떤 수고도 들이지 않고 그런 이들로부터 이득을 뽑아낼 수 있다. 가혹할 정도로 말이다.

"저 정파놈들에게도 배워야 할 건 배워야지. 선이나도 그리고 질서와 협의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진 이들은 당장 배곯아 죽어가면서도 함부로 타인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거든."

"......"

"늑대를 먹이로 길들여 개로 만들듯이, 사람은 선으로 길들여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저 잘난 정파놈들도 수틀리면 사람 죽이는 칼을 선의 수단이라고 지어 대는데, 내가 저들의 선을 무기로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더냐?"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사패련이 창고에 쌓인 제물을 모조리 물어 양민을 구했다는 소문이 터진다면, 강남의 양민들은 앞으로 뿐만해서는 패션이 하는 일에 쉽사리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장일소가 강호인들에게는 잔인하지만,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없이 자비롭다 여기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훗날 그들이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정파와도 적대하게 될지 모른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장일소나 사패련에게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런 막대한 이득을 돈과 타인을 부려 얻어 낼 수 있다면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호가영이 피식 웃었다.

"조금 우습기는 합니다. 이대로라면 련주님께서 천하제일의 협의 지사로 불리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가 광소를 터뜨렸다.

"협의지사? 하하하하핫.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으하하하하하하하핫! 그럼 나는 광동패협(廣東覇俠)이 되는 건가?"

장일소는 아예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하기 힘들단 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위선과 선은 단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평생 위선을 행하다가 자신의 선이 위선이었음을 밝히지 않고 죽어 버린다면, 그는 결국 평생 선을 행한 선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장일소가 어떤 뜻으로 선을 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선에 도움받은 이들이 장일소를 칭송하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그는 훗날 정말 협의지사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하하핫. 좋구나. 협사라...... 협사, 근사한걸?"

"그렇게 웃으실 일만은 아닙니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농담이 아닙니다."

"음?"

강일소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가명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협의지사의 의미가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여 타인을 돕는 이라면, 지금도 딱히 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패련의 재정이 충분하다고 하나, 이 일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쯧. 쫌생이처럼 구는구나."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금대부, 그 돈귀신 놈이 모아 놓은 재물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하고 남을 정도잖니."

그 말도 분명 사실이었다. 흑귀보가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단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소금 밀매로 그들이 축재한 돈은 만인방이라는 거대 집단의 재정을 관리하던 호가영조차 아연실색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련주님. 시련은 거대한 단체입니다. 지금 당장에 버틴다지만 모아 놓은 돈을 쓰면서 버티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호가명의 우려에도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곡식과 물품들을 사들이는 데 쓰거라."

"련주님, 그러다......"

"쯧쯧. 가명아. 답답하게 굴지 말고 생각해 보자꾸나."

장일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호가명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돈이 무엇이더냐?"

"......예?”

“황금은 또 무엇이고?"

“그건......”

무언가 대답하려던 호가명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장일소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서렸다.

“그래. 알겠니? 돈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 가치를 만드는 것은 그저 사람이지. 사람 간의 약속이 없다면 돈이란 쓸모없는 종이 뭉치이고, 황금은 칼 한 자루 만들 수 없는 무른 쇳덩어리에 불과하다.”

"......"

“굶어 죽어 가는 이에게 황금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제아무리 집채만 한 황금이라고 해도 굶주린 이에게는 쌀 한 톨만 한 가치도 없는 법이지 않니.”

“......그러합니다.”

“곧...... 그래. 곧 올 거란다.”

장일소의 얼굴에 일순 귀기가 어렸다.

"산처럼 쌓아 올린 전표보다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홉의 쌀이 더 중요한 시대가, 강처럼 흐르는 황금보다 날 세운 칼을 만들 수 있는 녹슨 철이 더 귀한 시대가!”

그런 장일소를 바라보며 호가명은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장일소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검지로 천천히 가로 그었다.

“그때가 오면, 세상이 옳다 믿던 것은 바닥에 처박히고, 세상이 천하다 여기던 것은 하늘로 오를 것이다.”

마귀 같은 미소를 지어낸 그는 음산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시대...... 세상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불태우는 시대가 곧.......”

장일소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이 내 손에서 시작될 거란다.”

호가명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다수에게 '안정'이라는 두 글자는 평화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 안정은 그런 게 아니다. 이 남자가 안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등 뒤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 그래야만 적을 부수고 죽이는 데 전념할 수 있으므로.

장일소가 행하는 것은 더없는 선이다. 하지만 그 선의 결과는 결국 더없는 악으로 이어진다. 지극히 온당한 선을 행하여 지극히 무도한 악의 체제를 구축하는 행위를 대체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

아니, 칭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하니까.'

장일소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그저 행한다.

세상을 얻기 위해 협을 행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할 것이고, 더없는 죄를 저질러야 한다 해도 추호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저 욕망뿐이다. 순수할 정도로 검게 불타는 욕망.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서 말끔히 살기를 지운 장일소가 가볍게 호가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필요한 건 재물 따위로는 얻을 수 없단다. 그러니...... 그 재물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리기 전에 다 써 버려야 하지 않겠니?"

“......이해했습니다.”

“좋구나.”

탁. 탁!

호가명의 어깨를 두 번 가볍게 두드린 장일소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탁자로 다가가 탁자에 놓인 잔을 들었다. 단숨에 술을 털어 넣은 그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지."

"......예?”

장일소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슬슬 거슬리는구나. 나는 내 등 뒤에 놓인 칼을 계속 놔둘 만큼 인내심이 깊지 못해서 말이다.”

“해남 말씀이시로군요.”

곧장 이해한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구파일방과 천우맹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는 소식을 막 입수한 참입니다.”

“흠?”

“이리된다면 저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쉬이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해남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처지일 뿐이지요.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네가?”

“해남 따위에 련주님이 직접 나서시게 해서야 제 면이 살지 않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흐음......”

장일소가 살짝 비음을 흘리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좋겠지. 네 뜻대로 하려무나."

“감사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였던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장일소는 어느새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깊게 잠긴 모양으로 움직임이 없었다.

호가명은 장일소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리를 죽여 방을 나섰다. 방에서 충분할 만큼 멀어진 뒤에야 그는 조금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했다.

'해남이라.......’

호가명의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그동안은 장강에 진을 친 이들에게 움직일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냥 두었을 뿐이다. 사실 사패련의 힘이라면 해남 정도는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었다.

'매화도에서 받은 굴욕을 갚아 줄 때도 되었지.'

이건 단순히 구파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 성과다 사정하는 모든 놈들에게 사패련에 대항하는 이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사파의 방식으로 말이지.”

찬 미소를 흘린 호가명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발끝에 묘한 흥분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