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4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4)
사내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굵은 땀방울이 연신 옆구리며 등허리를 훑고 지났다
하지만 사내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그는 칼날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해도 그 감각과 고통에 집중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유야 지극히 간단하다.
고통 따위야 순간적으로 스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물린 이가 손등에 난 상처 따위에 고통을 느끼겠는가?
더구나 지금 사내가 마주한 이는 범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였다.
"흐음."
나직한 비음이 새어 나오자 사내의 몸이 절로 흠칫 움츠러들었다.
"차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예? 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련주님"
"누구 있느냐?"
사내의 앞에 선 이가 부르기 무섭게 즉각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새로 내어 오거라. 따뜻하게 데워서."
"그리하겠습니다."
시비들은 사내의 앞에 놓인 찻잔을 회수하더니 공손한 움직임으로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여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혹여나 차를 마시지 않은 자신의 행동이 눈앞에 있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봐 겁이 난 것이다.
'흠."
그 순간 사내를 바라보는 눈이 초승달 같은 묘한 호선을 그려 냈다. 어떻게 보더라도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이가 편안할 리는 없었다.
"그리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단주님."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아니, 아니.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실로 부드럽고 정감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주님께서도 이 사람을 너무 겁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예! 물론......"
"제가 단주님께 해를 끼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구차한 방법을 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 호의다. 그리고 그 표현도 그리 그릇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말을 하는 이, 패군 장일소 그 자체였다. 별 뜻 없는 말도 장일소의 입에서 나오면 섬뜩한 말로 변하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단주라 불린 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장일소가 다시 작게 미소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압니다만, 저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패악무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나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온화한 사람에 가깝지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여 우물쭈물하던 사내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장소의 눈매가 한껏 휘어졌다.
“믿기 어려우십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련주님! 미, 믿습니다!"
"하하하핫"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힌 장소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짝 턱을 괴더니 사내를 빤히 응시했다.
"제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앞으로 단주님께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입니다."
"...... 한낱 상인에 불과한 제가 련주님 같은 높으신 분께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한 사내는 슬쩍 장소의 눈치를 살폈다. 장일소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답을 잘못 택했다는 것을 알아챈 사내가 즉시 말을 바꿨다.
"하, 하지만 제 미력한 힘이나마 련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소인분골쇄신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모,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 이상을 바랄 수 없이 과격한 충성의 맹세였다. 하지만 장소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한참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던 장일소가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충성이라......"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대체 뭐라 설명해야 할까?
"상인의 말은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장일소의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으나 그 시선은 흡사 살아 있는 독사처럼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또 그만큼 위험하고 허무한 것이지요."
순간 시내는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내의 뇌리에는 전동처럼 울려 퍼졌다.이 변덕스러운 마귀의 기분에 따라 수백, 수천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저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마, 망령된 입을 놀린 저 벌......"
"상인이 또는 것은 결국 이문."
"......"
"그렇지요?"
시내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팀이 배어났다.
장일소가 천천히 운을 뗐다.
"그간 장강의 상황 때문에 강남의 상인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사패련의 련주로서 사과드리지요."
장일소의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그게 어찌 주님께서 사과하실 일이시겠습니까?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한 요. 용단이었다는 걸 모를 이가 있겠습니까?"
"용단......이라. 쿡쿡쿡쿡."
용단이라는 말에 장소가 순간 못 참겠단 듯 조소했다.
"그리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어쨌든 저는 이문을 포기하고 사패련을 위해 희생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자는 말이지요."
"......돕는다고 하시면?"
"간단하지요."
장일소가 손에 들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음미했다. 건너편에 있는 이의 속이 타들어 가든 말든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단주님."
"예, 예! 련주님.."
"상인에게 필요한 것이 이문이라면, 저희 사패련에 필요한 것은 안정입니다."
"......안정이라고 하셨습니까?"
"무엇이든 기반은 단단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정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말을 꺼낸 이가 장일소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지금껏 걸어온 행보를 생각해 보면 '파격'이나 '급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안정이라는 말은 조금도 어울리질 않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지금 강남 민초들의 삶은 그리 안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장일소가 살짝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사내는 놀라 그를 다시 보았다.
'이 사람이 정말 패군 장일소인가?'
물론 맞는다는 건 사내도 알았다. 천하에 이런 화려한 복색을 한 이가 또 있겠는가? 실사 이가 둘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곳 사패련에서 저 무시무시한 사파의 거두들을 숟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장소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사내가 놀란 기색을 숨기질 못하니 장소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이상하십니까?"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하하. 이상할 것 없습니다. 단주님 제가 사파의 수괴이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살인마인 건 분명히 사실이지요."
"......"
"하지만...... 그렇다 해서 굳이 쓸데없이 민초들을 핍박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강남에 바라는 것은 그저 안정과 질서입니다."
사내가 몇 번이고 입을 떼려다 다시 닫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종잡을 수 없는 장일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러니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상인은 이문을 쫓는 존재. 그렇기에 때때로 잊고는 하지요. 결국 이문이라는 것은 물건을 사 줄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사내가 생각할 때 즈음, 장소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사패련이 강남을 장악한 이후 강남 상계가 곡식과 물품들을 몰래 숨겨 비축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려, 련주......"
"아아."
장일소기 말을 끊지 말라는 듯 장신구 가득한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걸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시절이 하 수상할 때는 웅크리는 것도 방법이지요."
"......이해해 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순간 혼백이 달아났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사내는 이제 차라리 단칼에 목을 쳐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장일소의 기름한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문을 쫓는 것도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곡식을 풀지 않는 건 도를 넘어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단주님은 강남 상계에 영향력이 큰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경상단(南京商團)의 심이경(沈二更)이라 하면 강남에서는 누구나 첫손에 꼽는 상인이라 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러니 가서 전하십시오. 창고에 모아 둔 곡식을 모조리 풀라고. 그리고 모아 놓은 다른 물품들은 사패련으로 가져오십시오. 항주의 재건에 사용할 것입니다."
사내 심미경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마침내 장일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눈앞이 아득하였다. 차라리 목을 베어 가라고 외치고 싶은 와중, 그의 귓가에 전혀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대금은 청구하십시오. 한 달 내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예?"
너무 황망한 나머지 심이경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값을 쳐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이 사람이 강탈이라도 해 갈 줄 아셨던 모양이지요?"
"그, 그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련주님!"
"하하하하하하하핫!"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장일소가 몸을 들썩이며 깔깔 웃었다.
"좋아요, 좋아. 다만...... 값을 너무 과히 치지는 마십시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만, 과욕을 부리는 이는 경멸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만민을 위하는 일에 어찌 과욕을 부리겠습니까!"
"흐음."
강일소에게서 얻은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이경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럼 그리 전하기만 하면......"
"그리고."
"예, 예! 련주님!"
"장강을 열어 드릴 테니, 강북과의 무역을 재개하십시오."
그 말에 심미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조건은 한 가지."
"......그게 무엇인지?"
"창고에서 꺼낸 곡식과 물품들이 큰 도시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사는 촌락에도 닿을 수 있게 하시면 됩니다."
"......"
"사람의 진실에 피가 통하듯 강남 전체에 물류라는 피가 다시 흐르게 하세요. 강북과 교역한 물품도 마찬가지로."
"그, 그리될 수 있다면 저희 역시 반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인이란 결국 물류를 통해 먹고사는 이들 아니겠습니까?"
심이경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남에서는 물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이라도 귀한 물건이 도로로 나서면......"
"약탈을 한다?"
"그게......"
"감수하세요."
"예?"
심이경이 놀라 묻지 장일소가 나직이 웃었다.
"처음 한두 번이면 됩니다. 그 뒤로는 누구도 약탈할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처음 물건에 손을 댄 놈들이 한 달에 걸쳐 살점 하나하나 뜯겨 가며 죽는 걸 보고 나면 말입니다."
순간 심경의 등을 타고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그러니 단주님께서는 속히 상계를 움직여 천하 곳곳에 곡식과 물품들을 풀고, 그동안 쌓아 놓은 것들을 강북으로 보내 이문을 취하십시오. 그 대신 그 이문의 대가가 강남 전체에 닿도록 하십시오. 그게 사패련이 상계에 거는 조건입니다. 그 대가로 상계는 강남에 한하여 제한 없는 상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련주님!"
"별말씀을."
장일소가 조용히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심이경의 마음속에 순간 작은 의혹이 떠올랐다.
"......그런데......"
"흐음?"
어쩌면 이건 심이경의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용기라기보다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패군 장일소는 천하에서 가장 지탄받는 사파의 거두다. 그런 그가 사패련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제 돈을 풀어 강남의 굶주린 이들을 구하는 것이라니. 위화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심이경은 결국 묻고 말았다. 치밀어 오르는 공포를 살짝 밀어 둔 채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선정(善政)을......"
"이상합니까?"
"......"
"아니면 그러면 안 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만."
"어떻습니까?"
장일소가 짙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장일소가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지요?"
"나, 나쁜 사람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가, 감히 그런 생각은 머리에 한시도 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유쾌하게 웃어 젖힌 장소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더니 미소 지었다.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이야. 천하가 저를 오해하는 와중에 단주님이라도 알아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단주님은 이문을 쫒고, 저는 안정을 쫒으니, 서로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련주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도록 창백하던 심이경의 얼굴에 살짝 들뜬 기색이 떠올랐다.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쌓아 둔 물건을 팔 수 있게 되었고, 막혀 있던 유통로를 다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에야 큰 이문이 남지는 않겠지만, 물류를 재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득이 아닌가?
그리고 생각보다 장일소가 대화가 통하는 이인 걸 보면,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이문을 취하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아. 참. 한 가지만 더."
"예?"
심이경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보았다.
곱게 호선을 빚은 장일소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더없이 섬뜩한 빛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상계에 잘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장일소가 본보기 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
"사람이 돼지와 다른 이유는 은혜를 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이라면 호의를 호의로 받을 터. 만약 내 호의를 그저 호의로 받지 못하는 이가 나온다면."
장소가 제 붉은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단주님께서는 세상이 말하는 저와 진짜 제가 조금 다른 이라는 걸 다시 한번, 조금 다른 의미로 알게 되실 겁니다."
심이경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온 차는 드시고 가십시오. 제 배려이니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핫!"
크게 웃으며 일어난 장일소의 뒤쪽에서 시비가 차를 내왔다. 그리고 심이경의 앞에 놓아 두었다.
그날, 심이경은 그 차 한 잔을 한 시진이 넘도록 다 넘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