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화. 대체 뭐가 다릅니까? (3)
손에 든 쉰밥이 다 흩뿌려지도록 부리나케 달린 거지는 구석진 움막을 찾아가 문에 걸린 거적때기를 걷으며 박차고 들어갔다.
“분타주!”
“어떠냐?”
움막 한구석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홍대광이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긴 뭘 어떻습니까? 텄습니다.”
“응?”
“반으로 나뉘어 싸우고 난리도 아닙디다. 제가 몇 군데나 돌아봤는데 다들 비슷비슷합니다."
홍대광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사람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그동안 천우맹이 해 준 게 얼만데.”
“어디 사람들이 그런 걸 기억합니까? 앞으로 뭘 더 줄지를 따지지. 평생 거지 생활한 사람이 세상인심 각박한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몰라서 이러겠느냐? 속이 터져서 그러지!”
홍대광의 만면에 짜증이 서렸다.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는 건 듣기에 따라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 같다. 어쨌거나 천우맹의 입장을 이해하는 이들도 절반은 된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그건 이전까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이 일이 퍼지기 전까지 양민들은 구파가 아닌 천우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근 몇 년간 구파일방이 양민들을 위해 한 것이 없는 반면, 천우맹은 장강 유역의 양민 지원은 물론이고, 제 목숨까지 걸며 항주로 달려가 마교를 몰아내지 않았던가?
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이라면 천우맹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이 반으로 갈렸다는 건, 법정이 내건 명분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의미였다. 연이어 몰리던 구파일방이 이번에야말로 천우맹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이다.
‘썩을 땡중 놈이.......’
홍대광이 이를 벅벅 갈아붙였다.
교활한 법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전하는 척하면서, 말과 말 사이에 천우맹이 제 이득을 위해서 구파의 양보마저 거절했다는 해석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굳이 나서서 지적하고 해명하기엔 좀스러울 정도로, 과하지 않게 말이다.
“소림 방장 자리를 투전판에서 딴 건 아니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만......”
그럼에도 욕이 나오는 이유는, 소림의 방장이라는 자리가 본디 교묘한 정치가 아닌 대의를 표방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천우맹에서는 별말 없습니까?"
“뭔 말을 하겠느냐?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닌 것을."
따지고 보면 힘을 합치자는 법정의 제안을 화산이 거절한 것은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세세한 부분에서야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세세한 사정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할 말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천우맹이 뭐가 아쉬워서 지금 구파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갑니까?"
“그거야 우리가 볼 때 그런 거고, 평범한 양민들의 눈에는 여전히 구파가 훨씬 크고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음.......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니 둘이 힘을 합친다면 당연히 천우맹이 사라지고 구파가 남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겠지.”
“그거 기분 묘하네.”
동곽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거나 개방도 구파일방에 속한 곳이니, 양민들이 구파일방을 조금 더 우대해 준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산과 찰떡같이 붙어 생활했던 화음 분타의 일원으로서는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기 분이 묘한 것이다.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느냐?"
“.......그럼 뭘 어쩝니까?"
“야, 이 새끼야! 멋모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대로 떠드는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고? 옆에서 지적을 했어야지! 그런 게 아니라고!”
“아이고, 분타주. 정신 좀 차리십시오!"
동곽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홍대광을 흘겼다.
“우리가 아무리 화산이랑 친하다지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어떻게 거부합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천우맹을 변호하는 게 아니라 방장의 입장을 천하에 나르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화산 놈들을 음해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퍼뜨리라고?"
“누가 그렇게까지 하자고 했습니까? 명에 따르지 못할 순 있어도 아예 반대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상부에 찍히면 분타주도 모가지 날아가는 겁니다. 몰라서 그럽니까?”
“에이, 씨발.”
결국 욕지거리를 한 홍대광이 콧김을 확 뿜었다.
“거지보고 더럽다고 하는 놈들이 제일 웃긴 새끼들이야. 진짜 더러운 놈들이 저리 많은데. 썩은 내가 진동한다! 썩은 내가!"
“말조심하십시오. 그러다 진짜 파문당합니다.”
“파문당하면 내가 뭐 갈 데가 없어? 화산에 입문하면 되지!"
"......안 받아 줄걸요?"
“뭐? 화산검협이 내 친구야, 이 새끼야!”
"화산검협도 그렇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거 아닙니까?"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홍대광이 옆에 놓은 몽둥이를 움켜잡자 동곽이 움찔하더니 얼른 목을 움츠렸다.
“에이, 씨!”
홍대광의 입에서 다시 쌍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장강의 유역. 섬서, 사천과 함께 천하에서 천우맹에게 가장 여론이 좋은 세 곳 중 하나였다. 여기서도 여론이 반으로 갈린다면 다른 곳에선 어떨지 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사람 마음이 갈대 같고, 여론이야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거라지만...... 참 사람들 매정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게 어디 천우맹을 싫어해서 그러는 거겠습니까? 불안해서 그렇지요. 불안해서.”
"뭐가 불안한데? 뭐가?"
“사실...... 천우맹이 유일하게 항주의 참화에 반응해 달려간 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항주 사람들을 구해 낸 건 아니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홍대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뭐? 그게 뭐 잘못됐다는 거야?"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뭔 생각을 했겠습니까? 마교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자기들도 항주 사람들 꼴이 나겠단 생각을 하지 않았겠냐고요.”
이 말에 홍대광도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다들 쉬쉬하기는 하지만, 항주의 참화는 천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멸된 줄 알았던 마교가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가장 충격이었던 건 그들의 잔인한 손속이었다.
저 마교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천하가 어떤 꼴이 될지를 세상 모두가 똑똑히 알아 버린 것이다.
“불안하고 겁이 나니까, 정파가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사패련이나 마교가 쳐들어오더라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둘로 갈라져 있다고 그놈들 하나 못 이길까 봐!”
“아이고, 분타주, 평소에는 안 그러는 양반이 왜 화산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십니까. 막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막말로 내가 뒈지고 나서 마교를 막아 내면 그게 뭔 의미가 있습니까.”
"......"
“사패련과 항주마화 덕분에 사람들도 알아 버린 겁니다. 정파가 힘이 없으면 내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정확히는 이제야 제대로 실감했다고 해야겠지요.”
그 말을 들은 홍대광이 대놓고 역정을 냈다.
“야, 이 새끼야! 그럼 더더욱 천우맹을 지지해 줘야지! 구파 새끼들이 언제 제 목숨 걸고 양민들을 도우러 간 적 있어? 뒤에서 점잔만 빼면서 구경이나 했잖아! 지금 강남에서 사람들이 사파 새끼들 때문에 고통받는 상황이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건데!"
“아니,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동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사실, 뭐....... 명분이야 저쪽에 있지 않습니까. 서로 대립하는 것보다는 화합하는 게 나으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게 원칙상으로는 옳으니까.”
“뭐, 인마?”
홍대광이 두 눈에서 불을 뿜었다.
“이 새끼야! 그런 게 다 조지는 거야. 원론적으로는! 크게 보면! 그딴 소리 지껄이다 다 말아먹는 거라고! 원론적으로 보면 어차피 사람은 다 뒈지는 건데, 뭐 하러 아득바득 살겠다고 입에 쉰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
"......"
“크게 볼 걸 크게 봐야지. 뭐든 크게 보면 다 해결이 돼? 그런 아는 척하는 놈들이 다 말아먹는 거라고!"
“......저한테 열 내지 마시고 사람들한테 가서 말씀하십쇼.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에이, 씨발.”
다시 한번 쌍소리를 내뱉은 홍대광이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어쩌지 못한 노기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방주도 너무 늙었어. 지금 개방이 소림 말 듣고 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닐 상황이냐고! 진즉에 구파에서 나가 천우맹에 들러붙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어디 쉽습니까? 오대세가야 남궁과 당가가 모두 빠져 버렸으니 그렇다지만, 구파에서는 아직 제대로 이탈한 곳이 없잖습니까.”
"......"
“처음으로 구파일방에서 이탈해 천우맹에 붙는 문파가 나오면 소림이 어떻게든 조지려고 들 텐데, 그걸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특히나 우리 개방은 그거 감당 못 합니다. 다른 문파들이야 제 구역이 확실하지만, 우리 거지들은 천하 곳곳에서 빌어먹고 사는 놈들 아닙니까? 당장 하남에서만 쫓겨나도 몇천 명은 굶어 죽을 텐데.”
“그걸 누가 몰라!”
홍대광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새끼야. 굶어 뒈지는 게 무서워서 주둥아리를 닥치고 살면 그게 개방이냐? 진짜 거지새끼지? 그게 먹고살려고 노략질한다는 사파 새끼들 논리랑 다른 게 뭐냐!"
“아니......”
“누구는 세상 남부러울 것 없이 돈 벌고 명성을 얻어도 양민 구하겠다고 사파 새끼들이 득시글거리는 강남으로 뛰어가는데, 누구는 빌어 처먹을 밥 굶기가 무섭다고 늙은 너구리 새끼들 주구가 돼서 헛소문이나 퍼뜨리고.”
홍대광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개방에 들어온 게 아니었는데........”
“뭐 대단한 뜻이 있어 들어온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냥 거지라 들어오신 거면서.”
“에라!”
홍대광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다짜고짜 집어 던졌다.
“아악!”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동곽이 뒤로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일부러 염장 지르나! 너 오늘 진짜 뒤져 볼래?”
“어이쿠!”
동곽이 입구 쪽으로 얼른 내빼며 소리를 질렀다.
“여하튼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장로님이 탈방해서 분위기 흉흉한데, 여기서 헛짓했다가는 본보기로 조져집니다! 지금 개방이 마음에 안 들면 악착같이 버텨서 방주가 되고 바꾸면 될 일 아닙니까!”
“안 꺼져?”
“절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꼭입니다!"
그 말을 남긴 동곽이 밖으로 도망치듯 박차고 나갔다. 그가 나간 입구를 죽일 듯 노려보던 홍대광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주가 돼서 바꾸긴 얼어 죽을.”
위에서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이미 진즉에 바뀌었겠지.
화산을 보고 알았다. 바꾸려고 한다면 기다려선 안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을 마음을 품은 채 참고 기다리다 보면 결국은 자신 역시 과거의 규칙에 순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냐, 화산검협."
새삼 청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가 무모하고 멍청하다고 할 때, 끝끝내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낸 그가 말이다.
“기분 더럽네.”
홍대광은 손때가 탄 궤짝을 열고 싸구려 화주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셔야 잠이 올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