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5)
"이보게⋯⋯. 소가주."
당군악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해남행은 자네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일세. 아무리 소수로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오는 것이 목표라고 한들 말일세."
"알고 있습니다. 가주님."
"그런데도 남궁의 소가주⋯⋯. 실제로는 가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자네가 직접 해남으로 가겠다는 건가?"
당군악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언성을 살짝 높였다.
"지금 남궁의 상황에서 자네마저 변을 당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냉정한 지적이었지만, 남궁도위는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네가 해남으로 가겠다는 건가?"
"예."
그 망설임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단호한 대답을 들은 당군악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남궁황이 낫지.'
남궁황도 대책 없는 면이 있었지만, 그건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터져 나오는 오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인간은 남궁황과는 달리 생각할 것은 다 생각하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남궁황과 같은 결론을 가져온다.
과정이 다른데 결과는 같다면, 차라리 과정이 틀린 쪽이 상대하기 쉽지 않은가?
"소가주⋯⋯."
"장문대리."
그 순간, 남궁도위가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본다.
"예. 소가주님."
"장문대리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화산의 장문대리에 오르셨으니, 후방에 남으시고 제자들을 해남으로 보내시겠습니까?"
그 말에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화산에 그런 장문대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산의 장문대리는 가장 앞에서 가장 먼저 행동하는 이입니다. 당연히 제가 직접 해남으로 갈 것입니다."
그 말에 남궁도위가 거 보라는 듯 당군악을 바라본다.
"그렇답니다."
"⋯⋯."
"화산의 장문대리께서 직접 해남으로 가시는데, 남궁의 소가주가 뭐 그리 대단한 직위라고 몸을 빼겠습니까? 전력으로는 화산에 미치지 못하는 남궁이지만, 적어도 그 협심만은 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쓸데없는 부분에 경쟁심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그게 다가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남궁은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과거 남궁을 대표하셨던 분들은 대부분 저 매화도에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남궁에는 그 이름만으로 남궁을 대표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그러니."
남궁도위가 어깨를 편 채 입을 열었다.
"구파가 벌인 일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사패련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겪어 본 남궁의 일원, 그리고 남궁세가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자 해남으로 향할 이들과 잘 화합하여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이."
"⋯⋯."
"남궁에 그 적임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당군악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반박할 말을 찾아 보려 했지만, 도무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논리상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당군악은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소가주."
"예. 가주님."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의 선친과 나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네. 막역지우라고 할 수는 없어도, 서로 술잔을 나누는 것에 딱히 어려움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지."
"알고 있습니다. 서로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두 분은 조금 더 막역한 사이가 되셨겠지요."
"그래. 그렇다네."
당군악이 한숨을 푹하고 내쉰다.
"그러니 내 입장도 조금 고려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만약 자네가 이번 해남행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그 친구의 얼굴을 어찌 보겠는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도위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아는 아버님이라면, 해남으로 간 저를 탓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되레 해남으로 가지 않은 것을 탓하실 겁니다. 선친께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
당군악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남궁황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 자네 숙부도 있지 않은가!"
"숙부님께서는 일전에 입은 상처가 너무 깊어, 긴 여정을 버티기 어려우십니다. 조카 된 도리로 어찌 부상을 입은 숙부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남궁명이 들었다면 '아니? 나 멀쩡한데?'라고 즉각 받아쳤겠지만, 안타깝게도 남궁명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그, 그럼⋯⋯."
당군악이 어떻게든 말을 짜내려 하는 순간, 맹소가 쿡쿡대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도 입장이 난처하시겠군요."
그 말에 당군악이 절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당군악은 누군가를 말리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사람의 발목을 잡아 대는 이가 아니었다. 보통은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담담하게 지켜보는 무심한 성향에 가까운 이다.
하지만 막상 천우맹의 회의를 주관하는 처지가 되어 보니, 그가 평소 하던 대로 굴었다가는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데까지 사흘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맹주님⋯⋯.'
새삼 현종이 천우맹의 맹주로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하는 당군악이었다.
때때로는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을 왜 그렇게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 대는지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딴지를 걸지 않으면, 서역까지도 갈 놈들이다.'
그러니 비록 결과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딴지를 거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끄응.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겠군. 당연히 없겠지. 일단을 알겠네."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쉰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애초에 내가 한 질문은, 화산의 의견에 찬동하느냐였는⋯⋯."
"빙궁에서도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
당군악이 영혼 잃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설소백이 보였다.
"무, 물론 빙궁에는 저보다 대단하시고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빙궁은 중원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은 바, 누가 가더라도 확연한 인상을 주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니, 궁주, 일단⋯⋯."
"그러니 빙궁도 제가 직접 가는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력하나마 빙궁의 궁주 자리를 역임하고 있으니, 사람은 부족하더라도 자리가 주는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당군악의 뇌리에 인자한 눈으로 설소백을 바라보던 빙궁 장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 우리 궁주님께서는 더없이 훌륭한 궁주가 되셔서 빙궁의 역사를 새로 쓰실 것입니다.
'그 말에는 딱히 이견이 없긴 합니다만⋯⋯.'
장로님들.
그러실 생각이셨으면, 저 아이를 이곳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니, 데려오더라도 최소한 저 물 뿌린 먹 같은 인간 옆에서는 떼어 놨어야⋯⋯.
당군악의 시선이 '하, 고놈 잘 컸네.'라는 눈으로 흐뭇하게 설소백을 바라보고 있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저 인간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모든 악의⋯⋯.
"궁주⋯⋯. 내가 물은 것은 화산의 의견에 찬성하는⋯⋯."
"찬성! 당연히 찬성합니다! 이견 같은 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성급⋯⋯."
"빙궁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화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화산이 북해에 와 주지 않았더라면 저희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
당군악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사람은 도리를 알아야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난 빙궁이 어찌 같은 처지에 처해 있는 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렇지. 당연히 그렇네."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으면, '인생은 현실이네.'라는 말을 바로 들이밀었을 당군악이지만, 설소백의 앞에서는 도무지 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자라나는 새싹을 걷어차 버리는 듯한 죄악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린 나이도 무기가 된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는 당군악이었다.
"좋은 생각이로군."
"궁주님!"
맹소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다만 장로들을 설득할 방법은 생각하고 하는 말이겠지?"
"아⋯⋯. 그건⋯⋯."
설소백이 당황한 얼굴을 하자 맹소가 껄껄 웃었다.
"같은 궁주로서 내가 하나 충고하지."
"예! 경청하겠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궁주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용할 필요도 있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동의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말이지."
"아⋯⋯."
"이 자리가 끝나면 내 처소로 오게, 내가 궁주가 하는 '설득'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겠네."
"감사합니다."
"애, 애한테 뭘 가르치는⋯⋯."
"일궁의 궁주라면 더 이상 아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지 않습니까?"
당군악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 빙궁의 궁주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지 않는가?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당군악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설소백이 상기된 얼굴로 맹소에게 묻는다.
"그럼 궁주님께서는요? 직접 가시나요?"
"야수궁은 이번에 참가하지 않겠네."
"어,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새외인이기 때문이지."
맹소가 피식 웃는다.
"천우맹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고는 하나, 중원인들은 여전히 새외인들에게 편견이 있네. 그런 이들이 둘이나 몰려가서 설득한다고 한들, 저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할 걸세."
"⋯⋯하지만 해남파 역시 오지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 빙궁까지는 가도 된다고 한 걸세. 하지만 두 문파가 모두 가는 것은 그리 좋지 못해. 이건 천우맹을 위한 결정이네."
"음."
설소백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야수궁의 대표는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것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맡은."
"키이이이이이이!"
"이 새끼가 사람한테 이빨을 드러내? 진짜 뒈져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백아가 열이 있는 대로 오른 얼굴로 흉성을 토하다가 청명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시무룩해져 바닥을 긁어 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소백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이곳에는 영물을 사람처럼 취급하는 사람과, 영물을 정말 사람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말인데 의미가 참⋯⋯. 그래. 참 다르다.
"그럼 남은 곳은⋯⋯."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이는 이미 준비를 했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번충! 번충이 갈 겁니다."
임소병의 얼굴은 필사적이었다.
"애초에 사파 새끼가 거기 가면 나쁜 인식만 주지, 좋은 인식이 있겠습니까? 빠지는 게 최선이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번충을 보내겠습니다. 힘도 좋으니 짐꾼으로 쓰시기에도 좋을 겁니다!"
"⋯⋯."
"그게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즉시 녹림십영과 녹림 장로들에 대한 자세한 인명부를 작성해 드릴 테니! 그중에 아무나 고르십시오! 누굴 고르더라도 제가 즉각 보내 드릴⋯⋯."
"야."
"⋯⋯."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개소리하지 말고 너도 와."
"사, 사파가 해남에 왜⋯⋯."
"아. 알았으니 오라고."
"⋯⋯인식만 나빠질⋯⋯."
"됐으니까 오라고."
"⋯⋯."
"녹림은 녹림왕이 가는 걸로."
임소병의 합류가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