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9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4) < DUNSAN , 오전 11:20 2022-04-14 >
혼란스레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겨우 정리한 뒤에야 당군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복잡하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수만을 투입하여 일단 해남으로 향한 뒤, 그들의 의사를 확인하자는 건가?"
“예. 가주님.”
“만약 저들이 천우맹과 함께하겠다고 할 시에는 천우맹의 본단이 지원을 한다든가 해서 해남파를 탈출시킬 방법을 찾고, 저들이 구파일방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고 할 때는 구파일방과 해남파 간의 연락선을 구축해 준다?”
“예.”
“일이 잘 풀리면 좋은 것이고, 잘 풀리지 않아도 겸사겸사 소림이나 엿 먹이...... 아니, 해남에게 활로를 틔워 줄 수도 있고?"
"정확합니다."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히죽히죽 웃는다.
“이러면 차라리 해남이 의리가 끝내줬으면 좋겠다. 히히."
“......청명아. 너는 도사다.”
“누가 아니래? 으히히히힛!”
"......"
떨떠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던 당군악이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제 턱을 주물렀다.
'나쁘지 않군.'
일단 위험이 확 준다는 것만으로도 구미가 당기기는 한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금 해남의 입장이 이러저러할 거라는 건 말 그대로 천우맹의 예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기껏 있는 대로 전력을 끌어모아 해남으로 진격했는데, 해남파의 장문인이 '왜 오셨음?'이라고 해 버리는 순간 천우맹은 천하의 머저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끌고 가는 병력의 수가 늘어날수록 사패련이 관심을 가질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고.'
우선 위급한 상황에서 발을 빼기 좋은 소수가 해남으로 가자는 말은 확실히 좋은 의견이었다.
급작스럽게 장문대리의 자리에 오른 데다가, 법정과의 대화에서 내놓은 말들이 하나같이 너무 급진적이라 걱정되는 면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백천은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
“그 연락선이라는 건 대체 무슨 수로 유지할 생각인가?"
당군악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구파일방이라고 해남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으려 했던 게 아닐세.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해남에서 강북까지는 못해도 이천오백 리에 달하는 거리지 않은가?"
“음. 그렇습니다.”
“개방이 천하에 자랑하는 특수한 전서구인 천리청구(千里靑鳩)조차도 한 번에 천 리 이상은 가지 못하네. 말이 천 리지 실제로는 오백 리도 겨우 간다고 봐야지. 그래서 개방은 곳곳에 지단을 설치하고 전서를 중개하는 방식 을 쓰고 있지 않은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강호에는 익히 알려져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강남에 지부를 설치할 수 없네, 그러니 자네의 말대로라면 지부 없이 물경 이천오백 리에 달하는 거리를 이을 연락선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
백천이 대답이 없자 당군악의 눈이 좁아졌다.
“설마 해남파의 장문인이 써 준 서찰 하나를 들고 와서 여론을 만들어 보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네.”
“여론을 만들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음? 자네 분명 여론을 만들어 소림을........”
“저는 그냥 상황을 전하겠다고 했는데요? 너무 앞서 나가시는 건 아닌지....... 물론 가주님의 소림에 대한 악감정은 이해합니다만."
"......"
순간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크흐흠. 내가 잠시 오해를 했던 모양이군.”
“오해요?”
“그냥 그렇다고 하세.”
"넵."
당군악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론을 만들려는 게 아니니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건가?”
“그건......”
백천이 막 무어라 답하려는 순간,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뭘 그런 걸 걱정해요.”
“응?”
당군악이 청명을 돌아보는 순간 청명이 고개를 획 돌린다.
“야! 지도!”
“예.”
청명의 외침에 임소병이 즉각 화답했다. 사람들이 번충이라도 왔나 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임소병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놓여 있던 지도를 활짝 펼쳐 낸다.
"똑바로 들어!"
“......예.”
모두가 차마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세상에...... 천하의 녹림왕을 지도 걸이로 쓰는 인간이라니.
아무리 녹림왕이 사파인이라지만, 저런 취급을 받을 사람은 아닌데...... 저 양반은 대체 뭘 위해 천우맹에 붙어 있는 걸까?
“저기 보세요.”
“응?”
지도를 본 이들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지도를 보니 해남과 이곳이 얼마나 먼지가 새삼스레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남도 정말 크네?”
“웬만한 성 하나 크긴데? 섬서 반 정도는 되겠다.”
“에이, 반까지야.”
“아 거기 말고!”
“응?”
청명이 턱짓으로 지도의 해남 부분을 가리킨다.
“여기. 여기.”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청명이 설명을 시작한다.
“해남도가 바다 한중간에 떠 있는 건 맞지만, 육지와의 거리는 멀고도 가깝죠. 바로 위에 반도가 있잖아요."
“그렇네.......”
커다란 대륙에서 꼬리처럼 톡 튀어나온 반도가 보이고, 그 바로 아래에 해남이 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해안끼리의 직선거리만 따지면 불과 육십 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죠.”
“육십 리가 가까운가? 배를 타도 몇 시간은 가야 하는 거린데.”
“에이, 그 정도야 뭐.”
"......"
저 광활한 개념에 경외감이 들었지만, 그건 지금 부차적인 문제다.
“그런데....... 그게 연락선과 무슨 상관인가? 설마 사람을 보내 그 해협을 건너게 하자는 말은 아닐 테고, 지금 문제는 강남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해결이 됐다는 거죠.”
“응?”
“지금 연락선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세 가지잖아요. 이천오백 리를 왕복할 수 있는 건 사람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강남에 못 들어간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렇지?”
자잘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저게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괜히 불안해진 당군악이 슬쩍 부연한다.
“사패련도 바보는 아닐 테니, 자네가 말한 저 반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것 아닌가?"
“네네. 알아요.”
청명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 셋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쓰면 되죠. 이천 오백 리를 왕복할 수 있고, 육십 리쯤 되는 바다는 단번에 건널 수 있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거길 오갈 수 있는 놈!”
“응?”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 사람이.......
“유령문?”
“에이. 아무리 유령문이라도 그건 안 되지. 특급 배송도 상황은 가리잖아.”
"......그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청명이 갑자기 제 앞섶으로 손을 쑥하고 밀어 넣더니 뭔가 허연 것을 잡아 꺼낸다.
“어?"
“와......”
“세상에.”
“자 여기 있...... 아니, 이 새끼가 버텨?"
“키이이이이이이이이!"
백아가 청명의 옷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놈이다 보니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으라차!”
하지만 결국에는 끌려 나온 백아가 바닥에 철푸덕 하고 떨어진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빠르게 주변을 휙휙 돌아본 백아가 한쪽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뛰어 봐.”
"......"
백아의 발이 허공에서 딱하고 멈춘다.
“어디 뛰어 봐. 그래. 안 그래도 슬슬 겨울도 다가오고, 목도리 하나 있으면 딱 좋겠다 하던 중인데, 살도 포동포동하게 쪄서 목도리도 두툼하게 하나 나오겠네.”
"......"
“사람 새끼고 짐승 새끼고! 먹여 주고 키워 줬으면 밥값을 해야지! 이 새끼가 어디 돈도 없는 도관에서 고기란 고기는 있는 대로 다 빨아 퍼먹고 이제 와서 발뺌하려고!"
“키이이이.......”
그 순간 사람들은 보았다.
새하얀 담비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말이다.
'불쌍하다.'
'쟤도 어쩌다가.'
'그래도 녹림왕 보다는 낫지 않나?'
그 모습을 본 맹소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백전이 놈이라면 해남도 정도야 쉽사리 오갈 수 있겠군.”
“저, 정말 되는 겁니까?”
“괜히 백전(白電), 하얀 섬전이겠는가?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에 천 리도 갈 수 있네.”
“아, 아니 바다가 있는데?"
“원래 동물이 사람보다 헤엄을 더 잘 친다네. 저 녀석이라면 육십 리 정도야 순식간에 건너겠지.”
“이야.......”
“괜히 영물이 아니네.”
맹소가 그 말을 듣고 고소를 머금는다.
“야수궁에서도 특별히 취급하는 영물이니만큼, 그 능력이야 확실하지. 그동안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보다는 이놈에게 일을 시킬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는데......”
맹소가 슬쩍 청명을 돌아본다.
"...... 좀 배워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닙니다. 궁주님!”
“배우지 마십시오!”
“야수궁은 동물의 친구잖아요! 저건 친구가 아니라 악덕 노예상이라고요!"
당군악도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저들이 사람은 경계해도 담비를 경계하는 일은 없겠군. 설사 경계한다고 한들, 저 넓은 곳에서 이 작은 담비 한 마리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렇다니까요?”
“합리적이야. 과연, 영물은 다양하게 쓸데가 많군.”
“헤헤헤. 그럴 줄 알고 지금까지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한 거죠.”
“훌륭하군.”
“그런데 먹고 자는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라 아무리 빨리 왕복해도 사나흘 이상은 걸릴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짐승인데. 배고프면 사냥할 거고, 잠 오면 굴 파고 자겠죠.”
“......영물이라 사람이나 다름없다더니?”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필요할 때는 영물이고, 귀찮을 때는 짐승이지.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합리적이군.”
강호에 협의 집단으로 위명을 날리는 천우맹의 권력자들이 조막만 한 동물을 착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만족한 웃음을 짓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백천의 눈에 바닥에 철푸덕 엎어진 채 한숨을 푹 내쉬는 백아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의 귓가에 '하...... 인생.’이라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
뭔가 기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같은 백씨라 그런가.......
“크흠. 여튼 그럼 연락망 부분은 해결됐고.”
당군악이 서둘러 상황을 정리한다.
“말이 길어졌는데, 중요한 건 이 계획이 현실성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문파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겠지."
당군악이 고개를 들어 다른 문주들을 바라본다.
“어떻게들 생각하시는가? 이 계획에 찬성하는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도위가 입을 열었다.
“백천 도장. 아니, 장문대리.”
“예. 소가주님.”
그가 백천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하나 확인하겠습니다. 해남으로 향해야 할 이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각 문파에서 무위가 높고, 특히 신법이 빠른 이들이면 좋습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굳이 각 문파에서 한 사람을 차출해 가는 연유를 묻는 것입니다.”
“아, 그건 간단합니다. 저 해남에 우리 천우맹에 소속된 문파 전원이 해남을 위해 나설 용의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죠.”
“이해했습니다. 그럼 해남으로 가는 이의 명망이 높거나, 명성이 높을수록 더 좋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남궁도위가 고개를 돌려 당군악을 바라본다.
“남궁세가에서는 가장 적합한 이를 보내겠습니다.”
“응?”
“남궁에서 가장 무위가 높고, 명성이 높으며, 저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이......”
“서, 설마.......”
“예! 제가 직접 갑니다.”
당군악이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왜 하나같이.......”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
이 망할 것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