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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98화 (1,199/1,567)

1198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3)

“그...... 아니, 장문대리.”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당군악이 크게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겨우 평탄한 안색을 회복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해남으로 가야 한다는 장문대리의 주장에는 동의하네.”

여기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천우맹은 구파일방과 다른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분명 해남행이 있다. 만약 이제 와서 해남으로 향하기를 주저한다면 법정과의 협상 자리에서 그들이 했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여기까지야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해남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단 것도 알고 있네. 될 수 있다면 서두르는 쪽이 좋겠지. 하지만 서두르는 것과 성급한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닐세."

백천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남행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네. 강남의 최심부까지 가야 하지. 당연히 충분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하네. 성급하게 굴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주님의 말씀 십분 동의합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대비는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음?”

순간 백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당군악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백천이 담담하게 부연했다.

“지금은 최대한 서두르는 쪽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입니다."

“.......해남을 말함인가?"

“아닙니다.”

백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물론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해남에도 도움이 되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해남 때문이 아니라, 강남으로 가야 할 이들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

“저희가 해남행을 논의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맹 내부의 소수만이 말을 나누었다지만, 말이란 결국 흘러나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당군악이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방장마저 저희의 의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방장 역시 어째서 협상이 틀어졌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야 할 테니,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당군악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은, 우리의 해남행이 사패련에도 알려질 수 있다는 거로군.”

“예,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함께 말을 나눈 분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이란 물과 같아서 영원히 담아 두고 가둬 둘 수 없습니다. 악의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악의가 없기 때문에 쉬이 새어 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심각해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패련이라......'

소림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들의 해남행은 더는 숨기기 어려울 확률이 높아졌다.

“껄끄러워졌군.”

지금 천우맹의 입장에서 강남땅은 말 그대로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에 사패련이 그들의 강남행을 알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면?

‘적지(散地)가 사지(死地)가 되겠군.”

얼굴을 굳힌 당군악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장문대리.”

“예, 가주님.”

“장문대리의 말은 이해했네. 하지만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군.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기에 서둘러야 한다는 말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위험한 곳에 준비 없이 뛰어드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렇네.”

당군악이 순순히 긍정하자 백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그 부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시간을 끈다고 해결책이 나올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동안 저들 역시 대책을 강구할 테니까요.”

“으음. 하지만.......”

“그리고 그 대책을 세우는 이가 장일소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당군악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서로서로 계책을 준비하고 맞닥뜨린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서로 준비한 전장이라는 조건에선 장일소를 당해 낼 이가 현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성급하고 위험해 보이겠지요.”

당군악은 부정하지 않고 백천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천우맹은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도출해 최선을 찾아내는 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지금까지라면 그 방식이 옳았을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아닐 것입니다.”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제부터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전쟁의 겁화가 강호를 뒤덮으면 팔자 좋게 모두가 모여 앉아 의견을 수렴하고 결과를 찾아내는 방식 따위는 써먹을 게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빠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이 될 것이다.

“그게 자네의 생각인가?"

“예, 가주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선택이 틀렸을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네.”

“그렇기에 사흘의 시간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 혼자서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신 분들과 사흘의 시간이라면 최선은 몰라도 차선 정도는 찾아낼 수 있겠죠.”

"......"

“두 가지 방법을 적당히 절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선은 지양해야겠지만, 시간을 너무 끄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한정된 시간 내에 필사적으로 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당군악은 턱을 가볍게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답도 없이 성급하단 생각을 했건만, 말을 들어 보면 이건 지극히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백천을 보았다.

법정의 앞에서 당당히 의견을 제시할 때도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확실히 이 사내는 녹록지 않다. 다른 이들이 화산의 새로운 장문대리 취임이라는 파격적인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 백천은 이미 다음 수를 위한 고민에 들어갔던 게 분명하다.

본인은 성급하고 철없을지 모르지만, 화산의 장문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던가?'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때 백천이 한 말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우선......”

당군악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혹시 싶어 다시 한번 확인하겠네만, 이건 천우맹 소속의 문파 자격으로 화산이 제안하는 의견이겠지?"

“당연히 그러합니다. 더 좋은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알겠네.”

짚어야 할 부분을 짚은 뒤 당군악이 다시 물었다.

“인원을 각출해 달라고 했었는데, 그 인원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각 문파당 몇 정도로.......”

“생각하는 대로라면 각 문파당 한 명, 총원은 열 이상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군악이 순간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겨우 그 정도 인원으로 해남에 가겠다는 건가?”

“인원으로 사패련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백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령 백, 혹은 이백이 간다고 해도 강남에서 사패련에게 포위된다면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패련을 상대할 수 있는 수를 동원한다면?”

“......전쟁이 시작되겠지."

“예, 바로 그렇습니다.”

백천이 단호한 눈빛으로 당군악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해남으로 가는 인원은 최소화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저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대항력이 없을 텐데?"

“그렇기에 무학에 자신이 있는 이들로 한정한 겁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각 문파에서 신법이 뛰어난 이들로 뽑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법?”

“예.”

백천이 후광이 비칠 듯 헌앙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걸리면 튀어야 하니까요.”

“......”

"튈 때도 될 수 있으면 사방으로 뿔뿔이 찢어져 튀는 쪽이 생존율이 높을 테니까, 혼자서도 사패련의 추격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일 것. 이게 최우선 조건입니다.”

“어.......”

일리 있는 말이다. 아, 물론 일리는 있는데.......

당군악은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멍하니 백천을 보며 생각했다.

'장문인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 저런 말을 입에 담는 경우가 있던가?'

하물며 안 그러던 사람도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언행을 조심하는 게 일반적인데......

당군악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산의 제안은, 신법이 뛰어난 소수로 우선 빠르게 해남에 닿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는 거로군.”

“예.”

당군악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좋은 생각 같지만, 대책 없어 보이는 것도 문제로군. 우선 그렇게 해남에 도착할 경우, 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

“그건 저희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 순간 백천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렸다.

“본디 천우맹의 방식대로라면 해남을 탈출시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상하고 계획을 짰겠지만, 사실 그건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까?”

“어째서인가?”

“막상 그걸 다 준비해서 해남에 도착했는데 해남이 그 방법을 못 믿겠다고, 그냥 거기에 남겠다고 해 버리면 저희가 뭘 어쩌겠습니까?"

"......응?"

당군악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백천은 상체를 더 곧게 펴며 말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해남의 의사를 확인하는 일이죠. 그 뒤의 일은 그 뒤에 논의해도 됩니다. 지금 모든 문제는 사패련이 강남을 장악한 뒤로 해남과의 연락이 끊긴 데서 발생한 것이니까요.”

“......연락망이라.”

“예. 저는 우선 그 연락망 복구에 주력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음. 그리된다면 확실히 조금은......”

우선 고개를 끄덕이고 보려던 당군악이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네의 말은 좀 모순이지 않은가? 저들이 해남에 남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저들과의 연락망을 만든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물음을 들은 백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저희는 의미가 없지요, 당연히."

“그런데?”

“가주님. 사람이란 반드시 의미 있는 일을 행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선을 행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측은지심?”

“생각해 보십시오.”

백천이 더없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한 집단에 속해 있는 형제 같은 문파가 적진에 고립된 채, 제대로 된 연락이 되지 않고 있으니 다른 분들이 얼마나 애를 끊이고 계시겠습니까?"

“한 집단? 구, 구파일방?”

“예!”

백천의 얼굴엔 정말로 측은지심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 드리워 있었다.

"해남이 크 격식을 세의 처우매과 함께하겠다 하면 당연히 천우맹의 본단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도와야겠지만, 그러지 못하겠다고 한들 저분들을 그곳에 두고 그냥 발길을 돌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적어도 강남으로 간 김에 끊긴 연락망 정도는 복구를 해 줘야겠지요.”

“저 소림과 구파일방이 고립된 해남파의 서찰을 직접 받고, 당금 강호의 분들이 모두 그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고, 도사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보통 그런 걸 도리라고 하나?"

“하하, 가주님.”

백천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이게 화산의 도입니다.”

당군악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떨떠름해졌다. 물론 도사가 아닌 그가 화산 앞에서 도와 도리를 논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건 뭔가 방향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그 순간 당군악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일단 딱 분위기만 봐도 백천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 것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는 그래도 분명......

“오?”

그리고 당군악은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끼눈을 새하얗게 뜨고 있던 청명이 감탄한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백천을 보는 모습을 말이다.

“제법 그럴싸한데?”

“후후, 그렇지?”

“잘만 하면 공쳐도 대왕 대머리 머리는 빨갛게 물들여 줄 수 있겠는데?"

“이게 장문인의 품격이다, 삼대제자야.”

“끄응....... 이번에는 인정한다.”

당혹으로 물들었던 당군악의 눈에서 점차 힘이 풀려 나갔다.

‘진짜 이래도 괜찮을까?'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어떻게든 현종과 독대를 해 봐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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