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7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2)
고정관념일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게 있지 않은가?
한 집단이나 조직의 수장이 바뀌고, 젊은이가 그 자리를 꿰찼을 때 가지는 일반적인 기대 같은 것.
물론 우려도 없지 않겠으나, 그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대체로 새로운 젊은 피가 가져올 활력, 드넓은 포부 등을 기대하는 것이 보통일 터.
그런데 이건.......
당군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놈들보다는 사천에 계시는 숙조부님이 훨씬 활력 있겠다.'
이제는 연세가 너무 많아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양반이지만, 그래도 병든 닭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더욱 그의 위장을 쑤시게 하는 건, 저 잘생긴 얼굴이 못나 보일 정도로 맛탱이 간 장문대리 놈이 얼마 전 법정과의 대립에서 당군악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화산 놈들은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지독한 검수와 정신 나간 망나니를 오가는 청명이나, 화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헌앙한 차기 장문인 백천과 동네 바보 형 동룡이를 오가는 백천이나........
앞으로 이런 놈들과 천우맹의 대소사를 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벌써 현종의 빈자리가 시리도록 사무치게 느껴지는 당군악이었다.
“그래서...... 그.......”
계속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었던 당군악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자네가 만들었다고 하던데?"
“예?”
“이 자리 말일세?”
“......제가요.”
"......"
그때 당군악은 깨달았다. 왜 화산에 그렇게 폭력이 만연해 있는지 말이다.
이런 놈들끼리 어울려 살다 보면 자연히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게 되지 않겠는가?
“아...... 아, 그렇죠. 제가....... 예, 제가 그랬죠.”
"......"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모은 이유는 어......”
백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였더라?”
그리고 그 순간 당군악은 보았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던 청명의 얼굴이 말 그대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는 모습을.
단언컨대 당군악은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 그 천마가 강림한다고 해도 이런 공포를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이유가 있었는데.”
“야, 이!”
막 청명이 눈을 까뒤집고 발작을 시작하는 순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오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날려 그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찍어 눌렀다.
심지어 평소 웬만하면 뒤에서 혀를 차고 있던 혜연마저도 기겁하여 민머리로 청명의 가슴을 누르며 늘어졌다
“청명아! 장문대리시다, 장문대리!"
“다른 분들이 보고 계시잖아!”
“입! 입 다물어, 입! 여기서 말 잘못 하면 진짜 참회동에 끌려간다!”
“거기 똑바로 잡아!”
그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괜찮을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구파일방과 손을 잡는 게 낫지 않을까? 격렬하게 반대하던 가문 놈들도 두 눈으로 이 꼴을 보면 그래도 소림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아닙니까? 하고 숭산을 향해 뒤도 안 보고 달릴 것 같은데.
그 순간 유이설이 멍하게 있던 백천의 머리를 콩콩 두드리더니, 냉수가 담긴 물병을 백천에게 내밀었다.
“마셔요.”
“......아.”
냉수를 받아 단번에 들이켠 백천의 얼굴이 점차 색을 되찾아 갔다.
어찌 보면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냥 얼굴값도 못 하고 제멋대로 풀려 있던 표정을 단속한 것뿐이건만,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달라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상태가 안 좋아서."
“언제는 좋았던가?”
“예?”
“.......아닐세.”
당군악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망할 화산 놈들에게 말버릇이 옮은 모양이다. 그가 이런 말을 다 하고.
백천이 나직이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 문주님들을 청해 모신 이유는 천우맹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논의라......”
조용히 되뇌어 보던 당군악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의미가 정확했으면 좋겠네, 장문대리. 그 말은 가장 먼저 할 일을 정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가 이미 정한 일에 대해 그 방법을 논해 보자는 말인가?"
“의미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음."
당군악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현종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종은 무언가를 정하기 전에 다른 이들의 의견부터 경청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백천은 자신이 이미 정한 것을 논의하자고 한다.
성향의 차이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백천이 말했다.
“아,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음?”
그런 당군악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는 담담히 부연했다.
“저는 화산의 장문대리일 뿐, 천우맹의 맹주대리가 아닙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천우맹의 맹주로서 결정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화산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음."
“결정의 권한은 언제나 그러했듯 맹주님께 있으니, 제가 드리는 말씀이 곧 맹주님의 의견이라고는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높은 곳에서 하는 명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하는 제안이라는 의미였다. 세세히 따져 들자면 화산의 장문대리가 가지는 실질적 지위는 천우맹의 부맹주 역할을 맡은 당가보다 낮고, 다른 여타 문파들과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장문대리. 입장상, 우리는 그리 생각하기 어렵네. 우선 맹주님과 자네가 한 문파 소속이라는 게......”
“맹주님께서 저희의 의견을 우대해 주시겠습니까?”
“......이해했네.”
당군악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현종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현종의 공명정대함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현종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제자들을 믿는 동시에......
'천하에서 제 제자들을 제일 못 미더워하는 분이시기도 하니까.'
정확하게는 제자들을 못 믿는다기보다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광증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인 거겠지만...... 어쨌든.
그러니 화산의 의견에 더 각별하게 귀를 기울이는 등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화산은 다른 문파들과 동일한 발언권을 가진 일개 문파로 취급될 수밖에 없네. 괜찮겠는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백천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각 대답했다.
“원래 그랬어야 합니다. 그게 곧 천우맹이니까요. 지금까지 화산이 천우맹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저 천우맹의 맹주께서 화산의 장문 자리를 겸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주님께서 맹주 자리에 오르신다면 당가가 그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으음.”
“화산은 천우맹에 특권을 요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저희가 세운 이상은 모두가 동등함을 기본으로 하지 않습니까.”
당군악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확실히......'
사람이 권력에 초연하단 평을 받는 건 보통 가질 수 있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을 때다. 이건 결국, 아무리 권력에 초연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누리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는 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곧 편안함.
주어지는 편안함을 굳이 거부하고 불편함을 자처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 백천은 화산이 암묵적으로 천우맹에서 지니고 있던 우월적인 권리와 입장마저 초연하게 내려놓겠다고 말하고 있다.
젊어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대단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게 화산의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가주님.”
“음. 좋은 일이군. 확실히 젊은 사람은 달라.”
고개를 끄덕인 당군악이 문득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예.”
"......자네와는 생각이 좀 다른 이가 있어 보이는 것 같은데?"
“예?”
그 말에 백천이 슬쩍 제 옆을 보았다.
“읍! 으읍!”
오검에게 짓눌린 청명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들썩이고 있었다. 원독과 증오로 가득 찬 그 두 눈이 마치 '그게 어떻게 얻은 권리인데, 그걸 너 꼴리는 대로 내려놓냐! 이 종남 간자 새끼야! 화산에서 썩 꺼져라!' 하고 외치는 것 만 같았다.
“으으으으읍!”
“가만히 좀 있으라고!”
“누가 가서 줄 좀 가져오십시오, 빨리!"
“도, 동아줄요?”
“동아줄 말고 쇠줄! 이 새끼를 동아줄로 묶어서 뭘 어쩌자고요!”
“아니, 당장 쇠줄을 어디서 구하라고......”
오검이 들썩이는 청명을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그 기묘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광경을 빤히 바라보던 백천의 입가에 순간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가주님.”
“으음?”
산뜻하게 시선을 뗀 백천이 당군악을 보며 무척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런가?"
“예. 저는 지금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개' 삼대제자의 반응 따위를 신경 쓰시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쿠, 쿨럭.”
순간 사레가 들어 버린 당군악이 몸을 크게 들썩이며 기침했다.
“이, 일개 삼대제자?”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화산에 널리고 널린 삼대제자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나마 검은 좀 쓸 줄 아는 놈이라 자리에 참석시키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일개 삼대제자일 뿐, 화산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완벽하게 무관하니 없는 셈 치시면 됩니다.”
“어......”
화산의 장문인을 대리하는 저와 '일개' 삼대제자의 의견 중 무엇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그, 그야 그...... 아니, 그래도 될...... 그래야 하는 건 맞는데.......”
“하하.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닙니까?"
당군악은 보았다. 부드럽게 물은 백천이 슬쩍 청명을 보더니 씩 웃는 모습을 말이다.
그 얼굴을 본 청명은 아예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내 새하얀 게거품까지 뽀글뽀글 물었다.
“꾸륵......”
청명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눈을 까뒤집고 넘어가자 이내 방 안이 고요해졌다. 간헐적으로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는 꼴이, 아주 멀리 가 버린 모양이었다.
'이, 이래도 되나?’
물론 말이야 맞다. 화산검협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는 하지만, 신분으로 따지자면 화산의 삼대제자에 불과하니까. 격식과 원칙을 따지자면 이런 자리에서는 발언권이 없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래도 화산검협인데?'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삼대제자 따위가 아니라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으응?”
“지금 천우맹이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행보는 협의를 관철하는 것이자, 구파일방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일입니다.”
“그, 그렇겠지.”
“그러니 화산은 다른 문주님들께, 지금 즉시 인원을 각출하여 해남으로 출발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최대한 빠르게, 사흘을 넘기지 않은 시간 내에 준비를 마쳐서 강남을 뚫고 해남까지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저...... 그건 조금 급한......”
“무학에 자신이 있는 분들만 합류해 주십시오. 합류하시는 분이 없다면 화산이 단독으로 해남으로 향하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말을 마친 백천이 씨익 웃었다.
“이상입니다.”
그 순간 당군악은 깨달았다. 이 미친 장문대리 놈이 들이받는 대상이 오직 법정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당군악의 위가 다시금 쓰려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