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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94화 (1,195/1,567)

1194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4)

바람보다 더 빠른 소문이 천우맹의 장원을 강타하던 바로 그 시각.

“그럼, 장문인. 물러가겠습니다.”

“으음, 그래.”

다른 문주들이 피해 준 곳에서 법정의 반응과 그에 대처할 방법에 대해 논하던 화산의 문도들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현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더 자세한 부분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어 이야기하자꾸나.”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오검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가 꾸벅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기 무섭게 현영이 다급하게 입을 뗐다.

“아니, 장문인!”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이건 너무 성급하지 않습니까?”

“끄응.”

현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이놈아! 결국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된 게 아니더냐? 그런데 왜 또 잔소리냐?”

“아니. 백천이 녀석에게 장문인 자리를 넘긴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습니까?”

현종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장로라는 게 본디 그러라고 있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나라고 알았겠느냐?”

“그럼 정말 장문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저놈이 갑자기 한 말이란 겁니까?”

“그렇다니까.”

“허허…….”

현영은 ‘뭐 저런 황당무계한 인간이 다 있지?’라는 눈으로 백천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요즘 애들이 무섭다더니…….”

“애도 아니지 않으냐. 이곳이 강호라 그렇지, 사가였다면 벌써 자식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도 남았을 나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현영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이해는 한다. 현종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현종이 화산의 장문인 자리에 있는 한 법정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장문인의 자리를 이렇게 쉽게 넘겨 버릴 줄이야.

아이들이 이룬 공을 자신이 이뤄 낸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 건 다름 아닌 현영이었지만, 그런 그도 설마 현종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여튼 장문인도 한 번씩 보면 대책이 없으시다니까.”

그 말을 들은 현종이 머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애들한테 옮은 모양이구나.”

“원래 그랬습니다, 원래!”

그때 가만 듣고 있던 현상이 빙그레 웃더니 현종에게 말했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백천이 말이냐?”

“백천이도 백천이지만, 저는 운암이가 영 마음에 걸립니다.”

“으음, 그렇지. 내 운암이와는 따로 이야기를 나눠 보마.”

“그래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영이 불뚝대며 투덜거렸다.

“지금 운암이가 문젭니까? 당장 백천이 가 장문인이 된 판에.”

“장문인이 아니라 장문대리다, 아직은.”

“그게 그거지 뭡니까. 장문인과 장문대리가 뭐가 다르다고.”

“다르지. 정말 장문인으로 불리는 것보다는 부담이 확연히 덜할 테니까.”

현종은 백천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쉽지 않겠지.’

다른 이들이 이번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화산의 장문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현종은 그 호칭이 주는 부담감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짊어진 짐이다. 그러니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

하지만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그저 ‘장문대리’라는 호칭이 그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장문인. 그래서 정말 장문 자리 넘겨주실 겁니까? 진짜로요?”

“쯧.”

현종이 눈살을 찌푸리며 현영을 흘겼다.

“이놈이 오늘따라 왜 이리 촐싹대느냐.”

“아니, 너무 갑작스럽잖습니까!”

“언제는 뭐 화산에 갑작스럽지 않은 일이 있더냐? 저 청명이 놈이 입문한 이후로 제대로 준비 갖춰서 느긋하게 진행해 본 일이 하나라도 있었냐 이 말이다.”

“그건 장문인 말씀이 맞긴 한데…….”

현종이 피식 웃었다.

“왜? 이제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게 되니 배알이라도 뒤틀리느냐?”

“아이고, 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꿈에서도 바라던 일인데.”

현영이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이제 화산은 저희 같은 산골 촌놈들이 감당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습니다. 애들 덕분에 좋은 것도 보고, 좋은 것도 먹고 호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게 어디 저희 주제에 가당키나 했습니까?”

“그래. 그렇지.”

현종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다. 생각보다 조금 빨라진다 해서 뭐가 그리 달라지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앞으로의 화산을 살아갈 것은 저 아이들이다. 그리고 화산의 선택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저 아이들이지. 그렇다면 화산의 방향 역시 저 아이들이 결정하게 하는 것이 옳다.”

“끄응.”

현영이 침음했다. 그 앓는 소리에 우려와 납득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저 저 아이들이 너무 과격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뒤에서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저희가 이제껏 하던 일이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먼저 말을 하는 이가 백천이가 된 것뿐이겠지.”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건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았다.

“잘하셨습니다, 장문인.”

현상의 말에 현종이 슬쩍 시선을 주었다.

“믿어 준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지요. 장문인께서 이런저런 상황을 따지지 않고 그저 믿고 지지해 주었다는 사실이 그 아이에게도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

“훌륭하셨습니다.”

“크흠.”

현종이 겸연쩍은 듯 헛기침했다.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별 공치사를 다 하는구나.”

그 모습을 보며 현상이 빙그레 웃었다.

‘편해지셨구나.’

현종의 말투가 이전에 비해 확연히 가벼워졌다. 그렇기에 새삼 알게 된다. 그간 그가 얼마나 큰 부담감과 싸우고 있었는지.

백천이 제때 나서 주지 않았다면, 현종이 먼저 그 부담감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짓눌려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게 순리겠지.’

때때로 자연이란 변덕스러워 보이지만, 결국은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하는 법이니까.

현상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그런데…….”

“응?”

현영이 무언가 묘하다는 듯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기묘하게 말이 없지 않습니까?”

“그놈? 누구?”

“아, 누구긴 누굽니까? 제일 먼저 입에 거품 물고 길길이 날뛸 놈이지.”

“……청명이?”

“예. 바로 그놈 말입니다.”

현상이 작게 웃었다.

“녀석이 평소에야 날뛰긴 해도, 막상 문파의 대소사를 정할 때는 진중해지지 않더냐.”

“흐음.”

“게다가 녀석이 말은 안 해도 백천이를 꽤 편하게 느끼는 것 같던데. 한 사람의 무인으로 웬만큼 인정해 주기도 하고.”

현영이 알쏭달쏭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현종에게 물었다.

“장문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청명이 말이냐?”

“예.”

“그…… 내가 볼 때는 그냥…….”

“그냥?”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던데?”

잠깐 정적이 흘렀다.

세 사람이 더없이 불안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 * *

방을 나선 조걸이 앞서 걷는 백천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 어색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음?”

“크흠!”

백천이 돌아보며 눈이 마주치자 조걸은 괜히 헛기침했다. 그러더니 다시 넌지시 말했다.

“그…… 사숙. 아까는 저, 제가…….”

“무슨 말이냐?”

조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아까 그가 보였던 행동에 대해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제가 생각이 좀 짧았…….”

“놈!”

하지만 그 순간 윤종이 더없이 엄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화들짝 놀란 조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윤종을 보았다.

윤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나 보았던 엄한 윤종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아니, 사형……. 제가 뭘 잘못했…….”

“네 잘못이 뭔지 모르느냐?”

“예?”

이를 갈아붙인 윤종이 다시금 소리쳤다.

“어디 감히 장.문.대.리께 그따위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냐! 기사멸조의 죄를 물어 단근참맥 하고 참회동에 처박히는 형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어서 제대로 다시 예를 갖추어 경건하게 말을 올리거라!”

그 말을 들은 조걸이 획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보았다.

조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본 백천이 자신도 모르게 오한을 느끼고 움찔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선 순간.

“아이고오오오! 장문대리이이이!”

조걸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절했다.

“제자가! 이 제자가아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아아! 제자가 생각이 짧아 장문대리께 감히! 헛된 망발을 지껄였습니다! 제자의 혀를 뽑으시어 그 죄를 물어 주십시오오오오오!”

“……하지 마라.”

“장문대리이이이이! 부디 노여움을 풀어 주십시오. 제가 상황이 이리될 줄도 모르고오오오오오!”

“하지 마…….”

그 순간 조걸이 아예 철푸덕 앞으로 엎어졌다.

“죄는 제자에게만 있으니 다른 사형제들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제게만 죄를 물어 주십시오. 장문대리이이이이이!”

“흐즈믈르그…….”

“네 이노오옴! 장문대리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느냐!”

“아이고오! 제가 어찌 감히 장문대리의 명을 거역하겠나이까!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그럼 좀 죽어, 제발……. 제발 좀…….”

그 순간 백천의 옆에서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문대리.”

“……응?”

백천이 고개를 돌린다. 유이설이…… 그 유이설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전에 없이 부들부들 떨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장문대리…….”

“…….”

“장문……. 풉.”

웃음을 참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렸다. 동시에 백천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사매.”

“장문…….”

“응.”

“장문대리.”

와……. 쟤가 사람을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구나? 지금까지 내가 이걸 몰랐네?

“헤헤. 축하드려요, 사숙!”

당소소가 한껏 웃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의외로 평범하고 해맑은 그 반응에 백천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

“어머, 어머! 사숙이래! 내 정신 좀 봐! 장문사숙……. 어, 이것도 아닌가?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죠?”

“…….”

“네? 사숙? 제가 사숙을 이제 뭐라 불러야 하나요오?”

당소소의 얼굴에 악마가 덧씌워져 있었다.

백천은 힘없이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래서 하기 싫었다고.’

이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가 그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상황이 상황이라 나서긴 했지만, 이제부터 겪을 일을 생각하니 위장이 절로 뒤틀렸다.

그때, 보다 못한 혜연이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화산의 제자가 아닌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나, 다들 놀림이 과하신 듯합니다.”

“혜, 혜연 스님!”

백천이 감동한 얼굴로 혜연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사람은 그래도 아직…….

“아닙니다, 장문대리.”

“……예?”

“강호의 법도가 지엄한 바, 한 문파의 장문인께서 제게 존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그냥 혜연이라…… 큽. 불러 주십……시오. 크흡!”

혜연이 한 손으로 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맨들맨들한 머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냥 다 뒈졌으면 좋겠다.’

이것들을 빠르게 제거하는 게 강호의 평화를 위한 가장 올바른 길이 아닐까? 웬만한 사람들은 다 동의할 것 같은데?

“크하하하! 장문대리래!”

“이야! 내가 사숙이 장문인이 되는 걸 눈으로 보는구나.”

“문파 꼴 자알 돌아간다! 야, 청명아! 뭐라고 말 좀 해……. 응? 청명아?”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너, 너 왜 그러냐, 청명아?”

“괜찮냐?”

하얗게 탈색되어 버린 청명이 반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부스러기가 되어 버린 영혼이 우수수 빠져나오고 있는 것만 같다.

“동…….”“동?”

“동…룡이가…….”

“…….”

“동…룡이가 장문인이고……. 내가 제자…….”

“…….”

“……죽어야지……. 그냥 내가 죽어야지……. 내가 뭐 한다고 이때까지 살아서 이 꼴을 두 눈으로 보나……. 그냥 나가 뒈져야지……. 어허허허헝.”

“…….”

“죽어야지. 아이고오……. 내가 죽어야지.”

“그렇다는데요, 사숙?”

얼굴을 감싸 쥔 백천이 힘없이 뇌까렸다.

“누가 저 새끼 좀 갖다 버리고 와.”

“아이고오오! 그러믄요! 누구 명이라고…….”

“죽어, 이 새끼야!”

“아아아악!”

끝내 눈이 돌아간 백천이 조걸을 덮쳤다.

그렇게 조걸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와 청명이가 염불처럼 흘리는 한탄 소리가 한동안 장원을 구슬프게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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