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2)
“사, 사숙!”
“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뭘?”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곽회를 보면서도 백상의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곽회의 낯빛만 보면 당장 마교라도 쳐들어온 듯싶지만, 이 심약한 사질 놈은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어 대는 게 일상이다 보니 그 얼굴을 보고도 딱히 관심이 가질 않았다.
“배, 백천 사숙 있잖습니까! 백천 사숙!”
“사형이 왜?”
“장문인이 되셨답니다!”
“어, 그래. 되시겠지. 언젠가는 되겠지.”
백상이 보고 있던 서류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니! 사숙, 그 말이 아니라 장문인이 되셨다니까요!”
“어, 그래. 알았다니까.”
“지, 진짜입니다! 지금 장원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장문인께서 백천 사숙에게 장문인 자리를 물려주셨답니다!”
그제야 백상이 도로 고개를 들며 시선을 주었다.
“……장문인께서?”
“예!”
“갑자기?”
“그렇다니까요! 전격적으로 자리를 물려주셨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
“어…… 그러니까 네 말은, 장문인께서 사형에게 장문인의 자리를 물려주셨다는 거지?”
“예!”
이제야 백상이 이해해 주어 기쁜 양으로 곽회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보는 백상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왜?”
“그게 앞으로의 화산을 위해서…….”
“왜?”
“버, 법정, 그 소림 방장과 대화를 하면서…….”
“왜?”
“…….”
“왜?”
곽회가 입을 닫았다. 백상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백상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예.”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그건 저도…….”
“…….”
멍하니 곽회를 바라보는 백상과 어쩔 줄 몰라 하는 곽회의 대치가 그렇게 한동안 지속되었다.
“사형, 운검입니다.”
“들어오거라.”
운검이 가만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운암은 좌탁 앞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걸 들었을 텐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모습이 참 평소의 그다웠다.
운검은 그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백천이 말이더냐?”
“예, 사형.”
운암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되었다. 너와 미리 상의하지 못한 점은 미안하구나. 이해해 주면 좋겠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운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본디 다음 대에 장문인이 되었어야 할 이는 백천이 아니라 운암이다. 운암도 운검도 그리 생각하며 화산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장문인. 막중한 책임과 막중한 부담이 함께하는 자리.
그럼에도 화산의 문도치고, 장문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없는 이가 몇 안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당연히 오를 수 있었을 그 자리를 내어 놓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 큰일을 한 직후였지만 운암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니 그 무위가 높지 않아도 운검이 운암을 깍듯하게 사형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그제야 서류 더미를 모두 정리한 운암이 곱게 옆에 놓아두고는 운검을 마주 보았다.
“그리되어야 할 일이니 그리한 것뿐이다.”
“순리대로 간다는 건 참 쉽게 들리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그 말을 들은 운암이 피식 웃었다.
“제법 도사 같은 말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검밖에 모르던 녀석이.”
그 말에 운검이 겸연쩍은 듯 제 콧잔등을 긁적였다.
사형이란 참 이상한 존재다.항렬과 배분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부모뻘인 현자 배가 더 어려워야 할 터지만, 운검이 화산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이는 다름 아닌 운암이었다.
“제자들을 키우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좋은 일이지.”
운암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철이 든 동생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형.”
조금 쑥스러워진 운검이 슬쩍 말을 돌렸다.
“사형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음?”
운검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사형도 사람이시잖습니까. 아무리 순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실 텐데.”
그 말을 들은 운암이 피식 웃었다.
“왜? 네 귀여운 제자 놈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사형도 참…….”
“하하.”
가볍게 웃어 버린 운암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쉬움이라……. 솔직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않겠느냐?”
“예. 그렇겠죠.”
운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일이었을 리 없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언젠가는 화산을 천하제일의 문파로 이끌고 싶단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냐? 언젠가 내가 장문인이 된다면 우리가 겪었던 화산과는 다른 곳으로 만들어 가고 싶었지.”
“……예, 사형.”
운검은 운암의 목소리에 밴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바랐다.
운암이 장문인이 되고, 운검 그는 화산제일검이 되어 과거의 화산이 되찾기를. 그게 화산에 입문한 이후 두 사람이 줄곧 꾸던 꿈이었다. 언젠가부터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 짓눌려 찾아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단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운검은 솔직히 말했다. 그는 사실 이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운암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예?”
뜬금없는 소리였다. 운검이 눈만 끔뻑였다. 당황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운암이 작게 웃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니까.”
쿡쿡대며 웃은 운암이 부연했다.
“네가 나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단다. 내가 네게 빚을 진 게 없기 때문이지.
”뭔가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아리송한 말이었다.
“가난한 집 자식은 그럼에도 부모를 공경하지만, 자식을 가난하게 키운 부모는 내심 못내 미안함을 버릴 수 없는 법이다.”
“아…….”
“재미있는 건 자식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지. 그렇기에 내심은 내가 한두번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가 못 이긴 척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해 버리곤 한단다.”
운검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젠 너도 알 것이다. 네가 아이들을 그 부모의 눈으로 보고 있을 테니까.”
운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요, 사형.”
현종만이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운검 역시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스승으로서 저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없다.
백매관의 관주니 어쩌니 했지만, 그가 가르칠 동안 화산의 제자들은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들이 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청명이 나타난 이후다.
실전된 무공 때문이었다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운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진정 실력 있는 스승이었다면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삼류 무공만으로도 제자를 훌륭히 키워 냈을 테니까.
그런 운검이 제자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따끔하게 혼낼 수 있을까? 자식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입히지 못한 부모처럼, 자신의 탓을 하지 않았을까?
“이해하겠느냐?”
“예.”
운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화산의 핵심은 누가 보더라도 백자 배와 청자 배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올바로 이끌 자신이 없구나. 아이들 눈에 나는 조금 덜 어렵고, 조금 덜 엄한 장문일 뿐이다.”
“…….”
“부모와 자식 같다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자식은 결국은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단다. 해 준 것이 없는 부모는 결국 그 어리광을 받아 줄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내가 가진 자격지심이 저 아이들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오래도록 해 왔단다.”
“사형…….”
운검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운암을 보았다.
이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던 것일까?
그저 화산의 미래를 본 결단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의 중추를 화산의 핵심에게 빨리 넘겨주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기에 그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암은 좀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머리에는 화산이 더 강해지는 길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저 제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길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백천이 녀석이 내게 와서 그러더구나. 자신에게는 과거에 대한 부채가 없다고.”
“…….”
“그러니 장문인의 자리에 오르라고 말이다. 그럼 자기가 보좌해서 화산을 훌륭하게 이끌 수 있다고. 고얀 녀석이지.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그 말을 들은 운검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다른 이라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겠지. 그리고 백천조차도 그 말에 굳이 진의를 숨겨 두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운암에게는 그 말이 어찌 들렸겠는가?
“그러니 고민할 것도 없지 않으냐? 더 좋은 길이 있는데도 다른 길을 고집하는 것은 그저 내 욕심일 뿐이니까.”
“……하지만 법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하하. 화산에 법도가 있더냐?”
“사형!”
“농담이다. 뭘 그렇게 화를 내느냐.”
운암이 쿡쿡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쉽지 않다면 나는 이미 선인이겠지. 하지만 내 선택이 옳았다는 데에는 조금의 의심조차 없단다.”
“…….”
“그리고 운검아.”
“예, 사형.”
“미련이 남고 아쉬운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란다.”
운검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운암을 바라보았다.
“선을 행한다는 건, 옳음을 좇는다는 건 항상 그런 거란다. 선을 선택하는 게 쉽고 즐거운 일이라면 세상에 선을 따르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겠느냐? 속이 쓰리고 아쉬워야 선이지 않겠느냐?”
그 말이 운검에게 큰 울림을 전해 주었다.
“힘들어야 선이다…….”
“그래, 그렇지. 힘들지 않게 행하는 선은 그저 제 마음의 위안에 지나지 않는단다. 만금을 쌓아 놓고 사는 부호가 굶주린 거지에게 던져 주는 동전 한 문이 정말 선일 수 있겠느냐?”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그래.”
운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하루 품삯으로 동전 두 문을 받은 이가 거지에게 주는 한 문의 동전은 그 자체로 선이란다. 내밀면서도 속이 쓰리고, 몇 번이고 고민되지 않겠느냐? 그럼에도 아쉬움을 이겨 내고 그 손을 내미는 것이 선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사형.”
운검이 피식 웃었다.
“결국은 사형이 굉장히 잘난 도사님이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이 녀석이…….”
“하하하핫!”
운검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이 사람이 그의 사형이다. 만인이 바랄 화산 장문인의 자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속이 쓰리고 아쉽다고 투덜대는 이 사람이 바로 그의 사형이었다.
“믿으니까 줄 수 있는 것이다.”
함께 크게 웃은 운암이 이내 가만히 미소 지었다.
“백천이 놈이니까. 내가 지켜봐 온 내 제자 놈이니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그 녀석만큼 화산을 잘 이끌 놈도 없을 테니까. 그 녀석의 말대로 놈에겐 부채가 없고 그 가슴에 협의가 가득하다. 그리고…….”
“대책 없죠.”
“그래. 대책 없는 망둥……. 크흠. 그거야 우리가 잘 보좌해 주면 될 일이고.”
운암이 슬그머니 쓴웃음을 흘리자 운검이 그와 마주 웃었다. 운암이 말했다.
“운검아.”
“예, 사형.”
“잘한 거겠지?”
운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가 지금까지 본 사형이 한 일 중에 이게 두 번째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뭔데?”
“예전에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새벽에 담 넘어서 도망가다가 마음 바꿔 돌아온…….”
“그 입 다물어라. 살인멸구 해 버리기 전에.”
“어허! 어디 도사가 살인멸구를 입에 담습니까!”
두 사형제가 서로를 보며 웃어젖혔다.
둘 다 눈에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다. 높은 곳으로 향하지만, 결코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이기에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잘하겠지.”
“예. 잘할 겁니다.”
“그래. 잘할 거다. 누구 제자라고.”
따뜻한 웃음으로 운암을 보던 운검이 말했다.
“그런데, 사형.”
“응?”
“아까부터 조금 이상해서 말입니다.”
“응? 무슨…….”
“백천이는 제 제잡니다.”
운암이 떨리는 눈으로 운검을 바라보았다. 운검은 칼날같이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은근슬쩍 숟가락 얹지 마십시오. 이건 양보 못 합니다.”
“……치사한 놈.”
결국 그들도, 화산에 살아가는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