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1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1) - by. 둔산
“방장.”
"......"
“방장!”
거듭 부른 후에야 법정이 종리형을 돌아보았다. 종리형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법정은 차분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문인?”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것입니까?"
“그러면요?”
종리형이 답답하다는 듯 열을 올렸다.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끝낼 일이 아니잖습니까! 저들의 오만방자함을 보고도 그런 반응이 나오십니까?"
“방장께서 직접 하신 제안입니다. 아니, 아니지요. 그게 어디 방장께서 하신 제안입니까? 구파일방이 직접 한 제안이 아닙니까?"
종리형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방장께서 얼마나 좋은 제안을 하신 겁니까.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쓴소리까지 감내하며 내민 손이건만, 어떻게 그 손을 이렇게 걷어차 버린단 말입니까?"
하지만 법정은 그런 그를 보고도 빙그레 웃기만 했다.
“좋지 않습니까.”
“예?”
“나이가 들면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는 법이지요. 더구나 소림은 불가라 그런지 저리 의지견정한 이들을 보기가 더더욱 어렵습니다.”
“지, 지금 이게 그런.......”
“내버려 둡시다.”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쉽게 갈 수 있는 일이 어긋난 것은 안타까우나,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종리형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어찌 나쁜 일이 아닙니까? 저들을 흡수하는 데 실패했고, 방장께서는 대놓고 망신....... 크흠, 아니, 그......"
“망신을 당했지요.”
“그, 그런 의미는 아니었고.........”
종리형이 말끝을 뭉개며 슬쩍 법정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 봤자다. 무슨 말이 오갔건, 결국 밖에서 보자면 소림의 방장인 법정이 이제 갓 화산의 장문대리에 오른 백천에게 훈계를 듣고 꽁무니를 빼 버린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 고고한 소림의 방장이 새파란 화산의 장문대리에게 망신을 당한 일이니, 호사가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며칠 지나기도 전에 전 강호에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무안하기도 합니다.”
“방장?”
종리형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법정을 빤히 보았다. 말은 무안하다 하는데, 아무리 봐도 지금 법정의 얼굴은 무안해하는 낯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조금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니요.”
참다못한 종리형이 재차 되물었다.
“결국은 모든 것이 파국을 맞은 것이 아닙니까? 천우맹은 구파와 다른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강호는 전보다 더 선명하게 둘로 분열되지 않았습니까?"
“사패련과 마교가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우리끼리 분열이라니요. 세상에 이런 해괴망측한 짓이 어디 있습니까?"
“아미타불.”
그 말을 듣고도 담담히 불호를 외는 법정이 답답했는지, 종리형이 도로 언성을 높였다.
“이런 법은 없습니다. 구파일방이라고 해서, 오대세가라 해서 항상 사이가 좋기만 했겠습니까? 때로는 원수보다 더 지독하게 대립하던 곳이 구파일방 아닙니까? 그래도 강호에 위기가 닥친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을 합쳐 싸웠습니다. 그렇기에 구파일방이 구파일방일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랬지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는 듯 법정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찌 저리 무도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아직 어린 이들이라지만, 이런 법은 없습니다!"
법정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장문인.”
“예?”
“후인들이 몰라서 저지르는 일은 후인의 잘못이 아니라 선인의 잘못입니다.”
“그, 그건”
“결국, 그 말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일 뿐이지요. 저희가 제대로 알리고 설득하지 못한 것인데,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종리형이 영 심기가 불편한 듯 헛기침했다. 법정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리고....... 화산의 장문대리가 한 말은 단순한 패기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닙니다.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배우고, 잘 알아서 하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법정은 가타부타 부연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 그저 지켜보십시다.”
“방장. 하나 지금은 한시가 급한.......”
“급할수록 돌아가라지 않습니까.”
종리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법정이 뭘 믿고 이리 천하태평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방장,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이 협의의 결렬로 인해 방장께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으셨는지 말입니다. 안 그래도.......”
종리형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법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대신 말을 마무리해 주었다.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상태에서 괜한 협의를 제안했다가 망신만 당했으니, 이제 저를 우습게 보는 이들이 더 많아질 거라는 말씀이시겠지요.”
“괜찮습니다.”
종리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법정은 이미 대답을 들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하지 않지요. 중요한 건, 어찌되었건 구파일방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그.......”
답답한 듯 동의하려는데 종리형의 귓가에 당혹스러운 말이 꽂혔다.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리형은 멍해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아, 아니, 방장. 말씀을 잘못 하신 게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좋은 일입니까? 오히려 이보다 더 나쁜 일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인데요.”
그 말에 법정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일이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지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장문인. 이제 구파일방은 정파 내에서도 입지가 줄어들어서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 더없이 좋은 상황인 거지요.”
종리형은 황당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법정을 뚫어져라 보았다. 머릿속으론 '이 양반이 망신을 당하더니 정신이 아주 나가 버렸나?' 하는 불경한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법정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도 그저 허허 웃었다.
“소승의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장문인.”
“솔직하게 그렇습니다.”
“장문인. 그간 세상 사람들이 구파일방이 아닌, 천우맹의 행보에 환호하고 손을 들어 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야.......”
종리형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협의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물론 그도 맞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간 사람들이 천우맹을 밀어준 이유는 구파일방이 강자이며 권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제야 법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종리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손가락질할 말일지도 모르지만, 종리형은 법정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음을 알았다.
세인들의 인식에 구파일방은 절대적인 강자인 동시에, 절대적인 권력자다. 강호를 수호하는 정파라는 인식 때문에 대놓고 적대감을 표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의 행보에 배 아파하는 세인들이 왜 없겠는가? |
“그럼 방장께서 하신 말씀은........”
“예, 장문인. 이번 일로 구파일방은 더이상 강자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방장이 가만히 말을 이어 갔다.
“강남은 저 사패련이 장악했고, 강북의 서측은 천우맹이 장악한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과거에 비해 구파일방의 입지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봐야겠지요.”
“...... "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더는 구파일방을 무엇이든 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강자라 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구파일방에 속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법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외부에 적이 생기면, 내부는 결속하기 마련입니다. 그간 구파일방이 서로 합치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리형이 살짝 고민하는 듯 주저하다 그 대답을 내놓았다
“외부의 적이....... 제대로 된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한 번 험한 꼴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저 사패련이 구파일방을 끌어내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어떻습니까? 천우맹이 구파일방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순간, 사패련은 더는 만만한 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구파일방은 저 천우맹과도 정파의 중심을 두고 다퉈야 하는 상황이지요.”
“제 손에 쥔 것을 빼앗기고 싶어 하는 이는 없습니다. 제가 오늘의 결과를 공표하는 순간, 그간 발을 빼고 있었던 구파일방의 문파들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정말 그리되겠습니까?"
여전히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에, 법정이 눈을 감고 불호를 외었다.
“당장 사천에 있는 문파들만 보아도 그렇지요. 청성과 아미는 남쪽으로는 사패련의 위협에 시달리고, 북쪽에는 천우맹의 위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파일방이라는 지붕 없이 버텨 낼 수 있겠습니까?”
“....... 점창은 더 심하겠군요. 점창은 운남에 위치한 곳이니.”
“예, 그렇습니다.”
사실 그간 사천의 문파들이 법정에게 반기를 들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구파일방 내부의 은밀한 알력 다툼 탓도 있다.
역사적으로 소림, 무당, 화산, 공동, 종남, 개방을 중심으로 한 하남 주위의 문파들과 사천, 운남, 청해에 위치한 외곽의 문파들은 손에 쥔 권력의 크기가 아예 달랐다.
법정의 입지에 좁아짐에 따라 반기를 들었던 문파들은 하나같이 외곽에 있는 문파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더는 이 대립을 이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소림에게서 권력 조금 더 가져오려다가 천우맹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길 판이니, 무슨 선택권이 있겠는가?
“하면 일단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겠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법정이 고개를 작게 저으며 말했다.
“그간 구파일방이 선택을 하나 할 때마다 많은 것을 고려해야 했던 이유 역시 구파일방이 강자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 선택을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구파일방은 절대적인 강자라 할 수 없으니, 제 살길을 찾아 움직인다고 해도 비난의 여지가 딱히 없습니다.”
“아......”
“그런 와중에 저 천우맹이 협의의 가치를 저리 높이 들어주었으니, 천하는 이제 협의를 요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구파일방이 아닌 천우맹을 찾으려 들 것입니다. 조금 궁색하긴 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설 명분을 얻은 것이지요.”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궁색함쯤이야 감당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장문인. 오늘의 일을 숨기려 급급하지 마시고 외려 적극적으로 알리십시오. 소림의 법정이 화산의 어린 장문대리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제안을 거절당한채 쫓겨났다고 말입니다.”
“.......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이제 곧 바뀌는 상황을 보며 깨닫겠지.
"이보게, 장문대리.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걸세. 그 책임을 이제는 구파일방이 아닌 천우맹이 짊어져야 할 걸세.”
법정은 그저 그 상황을 조금 빠르게 진척시킬 뿐이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방장....”
“말씀하시지요.”
법정의 눈치를 살짝 본 종리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어찌 되었건 사패련과 싸워야 하는 마당에 저 천우맹이 구파일방과 완전히 갈라선 것은..........”
법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조금 돌아갈 뿐입니다. 결국에는 순리대로 흐르겠지요."
“협의 넘치는 젊은이가 겁 많은 늙은이가 되는 것은 그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도, 협심이 깎여 나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세상이란 게 이상만 좋아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어째서 선대들이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같은 어린 천우맹 대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천우맹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지요. 결국 조금 돌아가는 대신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종리형이 이제야 모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자신만 해도 백천의 저 포부가 얼마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저렇게 고개가 뻣뻣한 천우맹을 흡수하는 것보다 꺾일 대로 꺾여 부드러워진 이들을 흡수하는 게 훨씬 이득이긴 할 것이다.
다만.......
“그런데, 방장.”
“예, 장문인.”
“그.......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만약....... 정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저 천우맹이 정말 마지막까지 그들의 뜻을 관철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질문의 마무리는 불안함에 묻혀 버렸다. 법정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는.......”
운을 떼고도 한참 침묵하며 눈을 감고 있던 법정이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눈 시리도록 푸르렀다.
“둘 중 하나겠지요. 모두가 공평하게 파멸하든가. 아니면.......”
“재 속에서 생명이 다시 피어나듯,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든가."
종리형은 문득 무르르 몸을 떨었다. 몽롱하게 흘러나온 법정의 목소리가 남긴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