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화.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 (2)
화산의 의지. 화산의 협의.
그 말이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 단번에 이해한 이는 없었다.
만일 이곳에 있는 이들이 이전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이제 겨우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애송이가 외쳐 대는 입바른 말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이들은 그 말이 주는 묘한 울림을 고스란히 받았다.
어느 정도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배운다. 모두가 다짐한다. 협의를 지키고, 대의를 추구하겠노라고.
처음 검을 들던 때, 처음 무학에 입문하던 때에는 모두가 가슴에 청운의 꿈을 품기 마련 아니던가?
하지만 강호의 비정함을 알고 그 입바른 협의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더는 협의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백천의 말이 울림을 가지는 것이다.
화산은 이제 더 이상 섬서의 작은 문파가 아니다. 높아진 입지만큼이나 많은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화산의 장문대리가 협의를 입에 담고 있다.
이런 광경을 두 눈으로 본 게 대체 얼마 만이던가?
“의지와.......”
법정이 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협의라.”
그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 말씀이 마치 소림에는 의지도 협의도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내가 오해한 것이오, 장문대리?"
백천이 더 큰 미소를 지으며 그런 법정의 말을 받았다
“당연히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그저 서로가 추구하는 협의의 방식이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대리. 그 말씀에 담아 내신 호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요. 나이 든 이가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나이 든 이들은 이런 호기를 이미 잃었기 때문이겠지요.”
얼핏 백천을 인정하는 말 같았지만, 그 안에 묘한 뼈가 있었다. 백천의 말에 호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기는 드높으나, 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내저으며 읊조렸다.
“화산과 소림의 뜻이 다르다. 그렇기에 한 길을 갈 수 없다.”
살짝 뜸을 들인 그는 어두운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흡사 짓누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그 대답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물러나기에는 천하가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한 무인의, 또한 한 문파의 입장을 일일이 고려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장문대리께서도 이해하시지 않습니까?"
백천이 그 말에 긍정하듯 눈을 감았다.
그도 알고 있다.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걸.
“모든 이들의 입장을 하나하나 배려해 주다 보면 결국은 중구난방이 되고 맙니다. 만약 장문대리께서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는 화산이 천하의 안위를 무시한 채 제 뜻만을 높이 세운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긁는 말도,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는 말도, 심지어는 법정의 태도를 지적하는 말도, 만년 바위처럼 굳건하게 버티는 법정을 흔들지 못했다.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당군악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대의를 제 명분으로 삼은 이들이 무서운 건 이래서다. 그렇기에 과거부터 수많은 영웅과 효웅이 대의라는 명분을 얻어 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천하의 대의는 분명 천우맹에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대의는 저 법정이 움켜잡았다.
그러니 백천이 무슨 말을 하건 그래서 화산은 도탄에 빠진 양민들을 외면하고 제 뜻만을 내세우겠다는 것이오?'라는 말로 모조리 반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물론 외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화산은 수많은 것들을 잃어야 할 것이다. 아직 완벽하게 민의를 얻지 못한 화산이기에 더더욱.
당군악이 고민하듯 눈을 감은 백천을 바라보았다.
'괜찮네, 도장...'
당군악은 백천이 저 말에 완벽하게 반박해 내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이제 막 화산의 장문이 된 백천에게 너무도 가혹한 요구다. 애초에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책임은 다른 이들에게 있는데, 이어받은 이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설령 잃는 것이 있더라도,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어도 제 주장을 관철하면 된다.
화산 홀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게 두지는 않을 테니 말일세.
화산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의 의미는 화산을 화살받이로 내세우겠다는 게 아니다. 화산이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얻은 과실을 기꺼이 천우맹과 나누는 것처럼, 화산이 져야 할 책임 역시 나누어 지겠다는 의미다.
젊은 백천이 짊어지기엔 아직 그 짐이 지나치게 무겁다. 당군악도 문주들 중에서는 나이가 젊은 축이지만, 이제 따지고 보면 천우맹의 문주들 중에선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가 오직 맹소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껏 현종이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가 백천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
결심을 굳힌 당군악이 막 대화에 개입하기 위해 입을 뗐다. 하지만 백천이 말을 꺼낸 것이 더 빨랐다.
“방장께서는 제게 자꾸만 같은 말을 하게 하시는군요.”
백천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방장께서 한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결국에는 같은 대화의 반복이 될 뿐입니다.”
“.......소승이 무엇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외까?"
“개인인 저는 부족할 수 있지만, 화산의 장문은 결코 부족한 이가 될 수 없습니다. 장문이란 문도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이전에 문파의 뜻을 대행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그 사실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백천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법정을 주시했다.
“방장께서 논하신 대의는 '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쪽이 옳다' 입니다. 맞습니까?”
“그리 단순하게 말할 것은 아니오. 정확하게는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쪽에 가깝지요.”
“포장이 훌륭하나, 결국에는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이들을 희생시킨다는 의미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법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대리. 희생을 달가워하는 이는 없소이다. 살릴 수 있는 이들을 살리지 않을 이도 없습니다. 치기에 이끌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 버린다면 그 모든 대가는 천하의 만민이 지게 되는 것이외다. 대체 화산은 언제까지 그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론을 붙들고 있을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옳지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더 적은 이를 희생시킨다는 건, 결국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
지금까지 백천에 대한 존중을 최대한 유지해 왔던 법정의 입에서 처음으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게 화산의 논리입니까?”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냉소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사람의 목숨에는 위아래가 없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걸 모르는 이가 누가 있소? 하지만 그건 그저 이상일 뿐이오. 하나의 죽음과 천 명의 죽음.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장문대리께서는 무엇을 택하시겠소?" |
"......"
“위아래가 없고, 서로 같은 가치를 지니기에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이 더 적은 이들의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외다.”
“그렇습니까?”
백천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방장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사람의 목숨의 경중을 나눌 수 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 기준이 수이건 뭐건 말입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백과 하나는 어떻습니까?”
“아니, 열과 하나는? 둘과 하나는 어떻습니까?"
법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자였던가?'
입장 때문에 반목하긴 하지만, 백천이라는 이에게 가졌던 좋은 인상이 모조리 무너질 만큼 한심한 논리였다. 법정은 이 의미 없는 논쟁을 더 이어 갈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더는 말을 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
“방장.”
그 순간이었다. 백천의 안색이 일변한 것은.
“그럼 제가 거꾸로 방장께 묻겠습니다.”
".........무얼 말이오?”
“방장께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하셨으니, 거꾸로 다시 물어보지요. 모두가 같은 이라 할 때, 하나의 목숨과 천의 목숨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법정이 살짝 머뭇거렸다. 같은 질문임에도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단 느낌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동일한 이라는 조건까지 내건 질문에서 대체 무엇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불자인 나는 선택할 수 없지만, 소림의 방장인 나라면 마땅히 천을 택할 것이오. 서로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기에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은 이를 선택하는 것이오. 선택이 어렵다 해서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그게 책임이라는 것이외다. 장문대리!"
“물론 그런 방장의 생각은 존중합니다. 결국 방장께서는 하나를 희생시켜 천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소.”
더는 둘러 말하기도 지쳐 버린 법정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쯤 되면 설사 백천이 말꼬리를 잡아 봐야 억지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진 백천의 질문은 법정이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백천의 눈빛이 순간 법정을 궤뚫을 듯 날카로워졌다.
“그럼 한 사람의 목숨과 천을 먹여 살릴 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법정의 눈빛이 일순 멍해졌다. 황당해서가 아니라, 지금 백천이 무슨 질문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다시 묻겠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만금을 얻어 내 굶어 죽어 가는 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고 천 명을 구하시겠습니까?"
법정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절로 서서히 벌어졌다.
'이건......’
질문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해 버린다면 그는 사람의 목숨 대신 돈을 택한 이가 되어 버리지 않는가?
방장이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백천이 다시 물었다.
“혹시 돈이 문제입니까? 그럼 곡식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인을 살릴 곡식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 대신 곡식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이보시오. 장문대리........ 이게 뭔........”
“곡식도 어렵습니까? 그럼 차라리 그 곡식들을 키워 낼 거름더미로 하시지요. 만석의 쌀을 얻어 낼 거름이라면 방장에게는 한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군요.”
“장문대리!”
참다못한 법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소림 방장 법정이 내뿜는 살기다. 천하의 누구도 쉬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백천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앉으십시오.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궤변을...!”
"어째서 궤변입니까? 방장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한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천 명을 살릴 수단이 더 중요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가 목숨 하나 따위 거름더미보다 못하다 해서 뭐가 문제가 됩니까?"
“이보시오, 장문대리!”
“애초에!”
백천의 입에서 벌컥 언성을 높였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게 되면, 결국은 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나누게 됩니다! 그럼 평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평가하게 되고, 깎아내리지 말아야 할 것을 깎아내리게 됩니다!”
법정이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해남의 목숨!”
백천의 두 눈에 불길이 타올랐다.
“그다음에는 적진에 포위된 아군의 목숨! 그다음에는 전방에서 싸우다 쓰러진 부상자의 목숨! 그다음에는 타문의 목숨! 그 뒤에는 전력이 되지 않는 어린 제자들의 목숨! 저울질하여 더 가치 없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 이 세상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그렇게 잃지 말아야 할 것마저 모조리 내다 버리면서 무엇을 지키시겠다는 겁니까! 방장께서 말씀하시는 더 많은 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방장께서 말씀하시는 천하만민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조차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이가 대체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지켜 내겠다는 것입니까? 방장은 만민을 논하지만, 그 만민을 가장 가치 없게 여기는 이는 되레 방장이 아닙니까! 그게 소림의 대의고, 그게 방장의 대의라면!”
백천이 이를 악물고 쐐기를 박았다.
"화산이 그 대의와 함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118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