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6화 :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 (1) - 22.03.31
투둑.
부서진 염주 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끊긴 실에서 주르르 흘러내린 염주 알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도르륵 무심하게 이어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말 그대로 화등잔만 하게 부릅뜬 당소소가 백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손만 뻗어 유이설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당겼다.
"......사고."
"왜?"
"어, 어떻게 좀 해 봐요."
"뭘?"
"아니, 저......"
"못 말려, 어차피."
유이설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덤덤하게 중얼거린다.
"사질은 때릴 수라도 있지."
그 말을 듣고서야 당소소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막 나가기로 작정해 버리는 순간, 화산에서 가장 말릴 수 없는 인간은 전 중원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화산광견 청명이 아니라, 화산정검 백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본 다른 이들의 반응 역시 당소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걸의 입은 거의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고, 윤종은 얼마나 놀랐는지 그 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세상에......'
윤종이 동그래진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단언할 수 있다. 화산에는 백이 넘는 문도가 있지만, 천하의 법정 앞에서 저런 말을 엄하게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백천뿐일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법정에게로 쏠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잘게 떨리고 있는 법정의 어깨로 향했다.
소림의 방장이 지금 노기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다. 소림이 어쩐 곳인지, 소림의 방장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 광경에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화산의 제자들만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섬뜩함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품고 있었다.
그래, 분명 백천의 언행이 과했을지 모른다. 너무 격한 어조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말이라 해도 표현을 순화할 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천이 과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 지금 백천이 꺼낸 말은, 화산에 몸을 담은 이라면 누구나 제 가슴 한편에 꾹꾹 눌러 놓고 있던 울분이기 때문이었다.
화산의 선조들이 천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조차도 그 사실을은 애써 무시하며, 화산을 괄시하고 이용하려고만 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원통했던가?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백천이 그 사실을 준엄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 법정을 상대로 말이다. 바라고 또 바랐음에도 차마 꿈에서조차 그려보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방 안을 휩쓰는 정적 속에서 법정은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산산조각이 난 염주 알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천하의 누가 소림의 방장 법정 앞에서 감히 도리를 논한단 말인가? 천하의 누가 그를 가르치려 든단 말인가? 이건 소림의 방장에 대한 무시이자, 불도를 걸어온 법정이란 노승에 대한 모욕이나 다람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질타는 법정이 아니라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종리형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인가!"
목소리를 높인 종리형이 노기등등한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그가 나설 상황이 아니라 입을 닫고 있었지만, 이건 그가 보기에도 선을 한참 넘은 처사였다.
"장문대리에 오르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인가? 장문대리가 아니라 정식으로 장문의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그 입에 담을 만한 언사가 아니거늘! 어디 천지를 모르......"
하지만 그 순간 종리형을 만류하고 나선 이는 다름 아닌 법정이었다.
"그만하시오, 장문인"
"방장! 하지만 이건 무례가 과하......"
"그만!"
순간 내력을 담은 법정의 호통이 격한 종리형의 반발을 대번에 짓눌렀다. 종리형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법정을 돌아보았다.
흩어진 염주알을 빤히 보던 법정이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장문인.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건 장문인께서 화내실 일이 아닙니다."
"방장......"
"......아미타불."
법정이 눈을 꼭 감은채 불호를 외었다. 작은 목소리로 불호를 연이어 왼 그는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후에야 눈을 떴다.
그리하여 마주한 것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백천의 태연한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당당한 모습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건방진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법정에게는 어떠한가?
"......그 부분은......"
살짝 말을 끊고 심호흡한 법정이 토해 내듯 말했다.
"소승의 과요. 사과드리겠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단순하게 받아들이자면 백천이 법정의 잘못을 지적하고, 법정이 그것을 인정한 것뿐이다. 겨우 그 정도 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상황의 이면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는 이들은 절대 그리 단순히 평가할 수 없었다.
법정이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불호를 외고는 말했다.
"그대가...... 화산의 장문인을 대리하는 이이며, 화산의 장문인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 잠시 잊었소이다. 다 소승이 모자란 탓이오."
화산 제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화산의 장문인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의미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법정이 말한 '화산의 장문인'이 받아야 할 대접은 현재 화산이 가진 힘과 세력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명백히 하나다. 저 법정이 처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과거 화산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그 말을 제 귀로 들은 화산 제자들의 심정을 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백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의 무인이자 화산의 제자로서는 말이 과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드려야겠지만, 지금의 저는 일개 무인이 아니라 화산의 장문을 대리하는 입장이므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양해랄 것도 없소이다. 그게 옳은 처사요."
법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당군악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다른 이들은 어찌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는 법정의 달라진 부분이 확연히 보였다. 예전의 법정이었다면 대화가 이렇게 이어지지는 못 했을 것이다.
'화산의 영향을 받은 건 우리뿐만이 아니구나.'
아니, 어쩌면 법정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화산 때문에 흔들렸던 자신을 일신하고 말이다.
궁극적으로야 좋은 일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건 지금 백천은 논쟁을 해야 할 판이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는 법정을 상대로 말이다.
"하지만, 장문대리."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법정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소승이 사과드린 부분은그 어조와 태도에 있었던 바, 장문대리께 드린 말씀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외다. 이제는 장문대리께서 소승의 질문에 답을 주실 때요."
법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백천을 응시했다.
"장문대리께서는 분명 이 선택이 젏은 혈기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소이다. 그렇다면 소승을 납득시킬 만한 대답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몇몇 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심정적으로 구파일방에 합류하고 싶었던 이들이 있었겠는가? 모두가 내심으로는 천우맹의 존속을 바랐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던건, 어쨌거나 법정이 내세운 대의에 반발할 명분과 논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을 대체 무슨 논리로 반박 할 수 있겠는가?
"그러지 못한다면, 장문대리께서는 그저 사사로운 감정으로 천하에 위기를 초래한 악적이 되실 수 밖에 없소이다. 알고 계시겠지요?"
교묘한 화법이었다. 과하지 않게, 표나지 않게 악적이란 표현을 써서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들며 대답할 이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표현 하나를 물고 늘어진다면 대답이 궁한 이가 꼬투리 잡는 꼴이 되어 버릴터.
모두가 걱정 어린 눈으로 백천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방장."
하지만 백천의 대답은 과감하다 못해 시원하기까지 했다.
법정이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하실 대답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장문대리."
법정이 추궁하는 듯한 눈빛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라면 그만두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화산의 위명을 깎아먹는 동시에, 장문대리를 그 자리에 임명한 장문인의 명예마저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가만 듣고 있던 백천이 나직하게 법정을 불렀다.
"방장. 방장께서는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모순된 말을 하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법정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 방문하셨을 때, 저는 방장이 과거와 달라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기꺼웠고, 더 없이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때 혹시 방장께서 뭐라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글쎄요. 워낙 많은 말을 한 터라."
"모두가 틀리지 않았다. 서로가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누군가 틀리지 않았다 해도 서로가 처한 입장이 다르면 추구하는 것이 어긋날 수 있다. 방장께서는 그날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법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분명 그가 직접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낸단 말인가?
"그날 방장께서 하신 말씀이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 입장과 생각을 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후인이 선인으로부터 배운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방장께서는 어떻습니까?"
그 말에 법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방장께서는 지금, 방장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가 틀린 이고, 죄인이며, 천하를 도탄에 빠뜨릴 악인이라 말하고 계십니다."
그 날카로운 지적에 법정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들을 설득하고자 했던 말이 외려 비수가 되어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자가......'
법정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백천을 뚫어지게 보았다.
사실 뒤에서 지켜보며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천은 지금 처음으로 장문대리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자리에 올라, 다른 이도 아닌 법정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이가 그의 질문을 슬쩍 미뤄 두는 여유를 부려 가며 법정이 내세운 논리의 허부터 찔러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실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입니다. 적어도 저는 방장의 대의에 공감하였으나, 지금 방장께서는 그 대의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소승은......"
"저는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방장께서 말씀하시는 대의가 방장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한 도구로만 활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법정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백천은 그런 그의 반응을 빤히 보면서도,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 태도에 대한 불신을 방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 가고자 함이 아닙니다. 또한 협의를 파하는 이유로도 끌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백천을 놀란 눈으로 보았다.
장문대리가 되어 방장과 처음 가지는 논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득을 취해 놓고는 자신이 가져온 이득을 내려놓겠단 말이 아닌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백천의 말은 그런 이들 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부족하면 배우면 되고, 모자란 부분은 타인이 채워 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제가 방장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거절의 이유로 끌고 오는 것은 제 말을 제가 스스로 반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법정의 얼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듣기에 따라서야 좋은 소리지만, 이건 결국 법정은 제가 한 말도 지키지 않는 이지만, 백천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이라는 의미도 되지 않는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그 사실에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백천이 말을 이었다.
"화산이 소림과 다른 길을 가는 데 다른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 방장께서 말슴하시는 대의가 화산의 가르침과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어긋난다고 하셨소?"
"예, 방장."
백천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단호히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장문대리로 있는 한, 화산은 모두를 구하는 대의를 위해 구할 수 있는 이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 희생은 다름 아닌 화산의 몫이 될 것입니다."
담담하지만 실로 확고한 음성이었다. 화산의 모든 이에게 강한 전율을 안겨 줄 목소리였다.
"그게 화산이 과거로부터 이어 온 의지이며, 화산이 지켜 나가야 할 협의입니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 방장께서도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이게 화산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며......"
백천의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조금은 따뜻하고, 또 조금은 엄정한 눈길이었다.
"앞으로도 걸어갈 길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의 눈빛이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