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5화 :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4) - 22.03.30
겉으로 포장이야 잘 되어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백천이 하는 '좋은' 말이 정말 '좋은'의미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세상에......'
'저 방장을......'
천우맹의 문주들이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물론 법정이 엿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애초에 대놓고 들이받아 버리던 인간이 이곳에 있으니까. 하지만......
'방식은 다른데 이게 좀 더......'
남궁도위가 슬며시 법정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 미세한 잔 떨림이 지금 법정의 기분이 어떤지 능히 짐작하게 했다.
방장만 보면 어떻게든 일단 걷어차 버릴 생각만 하는 조걸조차도 조금 질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다 윤종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사, 사형."
"왜?"
"저, 저래도 되는 겁니까?"
"되겠냐?"
윤종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하지만 조걸은 그처럼 태연할 수 없었다.
"그, 그런데 사숙은 왜 저러는 겁니까?"
"왜라니? 저양반 원래 저랬잖아."
할 말을 잃은 조걸이 순간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건 맞는데......'
외부에서 보면 화산에서 청명 다음으로 막 나가는 인간이 조걸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화산 문도들에게 물어보면 단 한 사람도 이견 없이 모두가 백천이 제일 제정신이 아니라고 대답할게 분명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상대가 저 법정인데......
그 순간, 침묵하던 법정이 입을 열었다.
"장문대리"
짧은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법정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확연히 낮아졌다는 것을.
"예, 방장."
"......그게 화산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정을 상대하는 백천은 여전히 담담했다.
"......맹주께서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법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자 현종은 백천의 등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물으시면 안 됩니다, 방장"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이미 이 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장문대리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러니 이는 제 의견을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 설사 저라고 한들, 지금 장문대리의 뜻을 뒤집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법정의 눈가가 눈에 보이도록 파들파들 떨렸다.
법정이라는 이에게 악감정밖에 남지 않은 이들조차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불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불안함보다 통쾌함이 더 크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화산은 소림과 그 뜻을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미로군요."
"예. 다만 이것은 그저 화산의 뜻일 뿐입니다. 천우맹은 그 뜻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던 법정이 시선을 현종에게로 돌렸다.
"천우맹의 뜻은 어떠합니까?"
"상황이 달라졌으니 그 뜻을 다시 물어봐야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물으십시오."
"아니, 방장 그건......"
"어려울 이유가 있습니까?"
법정의 얼굴에선 냉기가 뚝뚝 흘렀다.
"시기가 급하니 격식과 예의는 무시해도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리 시기가 급한 일에 따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지요?"
장문인을 정하는 일조차 그를 앞에 두고 했으니, 의견을 묻는 것도 그의 앞에서 하라는 의미다. 과한 요구이기는 하나, 말 자체에는 빈틈이 없었다.
법정이 막 한마디 더 뱉어 현종을 몰아붙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희에게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도위가 정좌한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미 대답을 했습니다. 처음과 다를게 없습니다."
법정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현명한 선택이오, 소가주. 묵은 감정은......"
"방장께서는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순간 말을 끊고 들어오는 남궁도위의 발언에 법정이 흠칫했다. 무슨 오해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 말대로라면 남궁은 이미 오대세가에 다시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의미인데.
남궁도위는 법정의 시선에 어린 의문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남궁은 이 자리에 앞서 장문인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게......"
"화산의 장문인 말입니다."
그제야 남궁도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한 법정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바뀐 것은 없습니다. 화산의 장문대리께서 결정을 내리셨다면, 남궁은 그 뜻과 함께합니다. 남궁세가 역시 오대세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소가주!"
법정이 언성을 높인 순간, 당군악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궁이 없는 오대세가라면 사천당가도 굳이 복귀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군요. 방장, 당가 역시 화산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으득.
법정이 입술을 짓씹으며 당군악을 노려보았다. 백천이나 남궁도위야 아직 나이가 어리니 혈기와 치기에 휘둘릴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알 만큼 산 당군악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당군악은 그저 여유로웠다.
"세상에는 주판만 튕겨서는 계산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더구나...... 여기서 제가 오대세가에 합류하겠다는 말을 했다가는 당가도 가주가 바뀔 판인데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벌써 뒷방으로 물러날 수는 없잖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당패를 돌아보았다. 당패가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고, 따로 진지하게 말씀은 좀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정도죠."
"......생각은 있었네."
"하기야 눈앞에서 이걸 봤는데"
"살짝 아쉬울 수도 있겠네, 이거."
"크흠, 모함입니다."
당패의 너스레에 분위기가 확 풀리기 시작한다. 대놓고 웃는 이는 없었지만, 짧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 일변한 분위기에 법정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 빙궁도요!"
그때 설소백이 흥분한 듯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북해빙궁도 화산과 그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화산이 천우맹을 지킨다면, 빙궁 역시 화산과 함께 천우맹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백천이 그런 설소백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벼, 별말씀을!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닙니까!"
들썩이는 설소백을 옷자락 가볍게 잡아당기는 걸로 진정시킨 맹소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법정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리되면, 남만야수궁이 따로 구파일방에 들어간다고 해 봐야 방장께서 그리 달가워 하지 않으시겠지요."
"......"
"주인이 환영하지 않는데 객이 자리를 청할 수는 없으니, 남만야수궁도 천우맹에 남도록 하겠습니다. 방장께서 섭섭하실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겠군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법정은 그 딱딱한 심지를 느끼면서도 뭐라 입을 열어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남은 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그 시선을 받은 이가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뭘 보십니까?"
임소병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동네 개를 쫓 듯 손짓했다.
"잘나신 정파 분들이 다 안 들어가는데, 산적 새끼들이 눈치도 없이 구파 밥그릇에 숟가락 들이밀면 대가리에 목탁 처박히는 거지. 내가 병신도 아니고."
"......"
"뭔 선택권이나 주고 선택하라고 해야지. 처음에 묻기라도 하던가"
그래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임소병이 진저리를 내며 손사래를 쳤다.
"아, 남아요. 남는다고요.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그게 끝이었다. 현종이 천우맹의 해체를 입에 담은 지, 불과 일각도 지나기 전에 천우맹에 속한 모든 문파가 천우맹의 존속에 동의한 것이다.
임소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모르겠네. 우리야 그렇다 치고, 정파 분들이야 저기로 가면 얻을 게 좀 있을텐데. 남궁 소가주님께서는 안 아쉬우려나? 속으로는 땅을 치고 계시는 것 아닌가?"
그 말에 남궁도위가 짜증 어린 얼굴로 슬쩍 그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했듯이...... 남궁은 화산의 뜻에 함께할 뿐 입니다."
"뭐, 그거야......"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남궁도위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은혜만 있었을 때도 남궁은 화산을 따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화산과 남궁의 사이에 단순히 은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같이 수련을 했고, 때로는 때리고 얻어맞고, 욕하고 같이 바닥을 굴렀습니다."
남궁도위의 시선이 백천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있어서 현종이 그저 고맙기만 한 존재라면, 백천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런 이들을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예?"
"친우라 합니다."
남궁도위가 백천을 보며 말하고는 슬쩍 웃었다.
"물론 그리 정이 깊지는 않고, 미운 정만 쌓였으니 친우라기보다는 악우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벗은 벗 아니겠습니까? 화산에 은혜를 갚는 것이 남궁의 의무라면, 친우와 함께 가고 싶어 함은 남궁의 의지입니다."
남궁도위의 시선이 이번에는 법정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장문대리께서는 저를 훌륭하다 여기며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방장의 시선에는 제가 여전히 미덥지 못한 애송이로만 보일 텐데 말입니다."
법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도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제 몸값을 좀 더 쳐주는 곳을 선택하는 게 맞겠지요. 심지어 그곳에 친구들도 있는데 남궁이 뭘 더 망설이겠습니까. 오대세가로 돌아갈 이유 따위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에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잘난 신분 가지고 태어난 양반인 줄 알았더니, 그냥 자기가 잘나신 거였네. 없이 태어난 놈 서러워서 살겠나."
임소병의 너스레에 웃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법정만은 웃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커녕 한기까지 도는 눈으로 백천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래서...... 이래서 이 상황은 막아야 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다. 화산을 얻으면 모두를 얻고, 화산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그렇기에 화산의 중심인 현종과 청명이 빠져나갈 수 없는 길로 그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현종도 청명도 아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이가 갑자기 튀어나와 그의 모든 안배를 망쳐 버린 것이다.
'아니, 아직이다.'
법정은 치밀어오르는 울화와 분노를 꾹꾹 눌렀다. 이전까지였다면 여기서 있는 대로 노호성을 내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예전 같지는 않다. 아직 그에게는 길이 있다.
법정은 가진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백천을 응시했다. 백천 하나 때문에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면, 백천의 뜻만 꺾으면 모든 것을 순리대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이리라.
"장문대리."
"예, 방장."
"장문대리께서는 지금 화산이 한 선택이 옳다고 보시오?"
그 물음에 백천은 말없이 법정을 응시했다.
백천에게 시대의 거인, 법정의 무거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혈기 넘치게 선택하고 서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장문대리는 자신이 한 선택이 타당한지는 조금도 증명하지 못하였소. 논리 없이 그저 혈기만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때문에 흘려야할 숱한 피를 대체 어찌 감당하려 하시오!"
백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법정은 더 기세를 끌어 올렸다.
"장문대리께서는 정말 천고의 죄인이 되는 길을 가시려는 거요? 그 선택이 천하를 얼마나 큰 도탄에 빠뜨릴지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것이외까!"
서릿발 같은 호통이었다. 무릎 위에 앉힌 법정의 손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백천은 가만히 법정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결정을 올곧게 받아 내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혈기라 하셨습니까?"
"그렇소이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방장."
법정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여기에 대체 무슨 오해가 있단 말이오!"
"물론 저는 아직 혈기가 넘치는 청년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오판을 할 수 있고, 경험도 부족하겠지요."
"알고 있다면......"
"하나."
그 순간 백천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법정의 말을 끊어 내며, 그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저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화산의 장문인은 혈기 따위로 문파의 방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게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뭐......"
"똑똑히 알아 두십시오. 지금 방장께서 마주한 이는 이대제자 백천이 아니라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입니다."
"장문대리!"
"그리고!"
그 순간 백천이 노기 어린 얼굴로 법정을 노려보았다.
"방장께서 화산이 어떤 곳인지 아는 분이라면, 화산의 선조들이 천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이라면! 어리석다 욕하고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잠시 말을 멈춘 백천의 시린 눈빛이 법정을 베었다.
"화산을 대표하는 이에게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부터 갖추십니오.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득!
법정의 손에 잡힌 염주 알이 끝내 산산조각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