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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84화 (1,185/1,567)

# 1184화 :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3) - 22.03.29

짧고도 긴 친묵이 고였다.

그건 침묵이라기보단 고요였고, 고요라기엔 정적에 가까웠다.

백천의 마지막 말이 남긴 여운이 방 안의 모든 이들에게 스며들었다.

어쩌면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강호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파 중 하나의 장문이 바뀐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의 가슴에는 격정이 밀려들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휘몰아치는 숱한 감정이 그들을 쉽사리 이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가 이 광경에 가장 크게 감동했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반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의 머릿속이 가장 복잡한가 헤아리기는 너무도 쉬웠다.

법정의 눈이 연신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까지 대해처럼 깊은 눈빛을 보이던 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게 대체......'

그는 당혹감을 어쩌지 못하는 표정으로 현종과 백천을 번갈아 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한 문파의 장문을 택하는 일은 절대 쉽사리 결정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문인이 어떤 자리인가? 한 문파의 미래를 결정하는 막중한 직위다.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버리다니.

아무리 화산이 형식 따위는 진즉에 내다 버린 바격적인 문파라고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다. 차라리 이 모든게 화산의 문도들이 작정하고 짠 연극이라 믿고 싶을 정도였다. 그 편이 더 믿을 만하니까.

하지만 법정의 그런 막연한 기대마저 산산이 조각내 놓는 이가 있었다.

"이...... 이게 뭔......"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완전히 넋을 놓아 버린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혼이 빠졌다는 말도 지금 청명의 상태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

"이게...... 아니...... 아니, 이게 뭔...... 이게......"

"......"

"문파가 거꾸로 돌아가도...... 정도가 있지. 아이고...... 아이고오......"

그는 썩은 생선같은 눈으로 천장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내가 이...... 꼴을 보자고 내가...... 내가...... 아이고 사형...... 화산은 망했소...... 화산은......"

물론 법정은 청명이 협객의 모습과 사기꾼의 모습을 둘 다 가지고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법정이 보기에도 저건 도저히 연기라고 치부하긴 힘든 반응이었다.

그럼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이 자리에서 결정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제정신인가?'

법정은 황당하다 못해 황망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 보았다.

그가 아는 현종은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한 이였다. 그런데 그런 현종이 이런 중차대한 일을 이리 휘뚜루마뚜루 처리하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아니지.'

멍하니 있던 법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현종을 탓할 때도, 지금의 상황을 평가하고 있을 때도 아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잘못하면 아차 하는 순간에 이 자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휩쓸려 버릴 수도 있다는게 중요했다.

위기감을 느낀 법정이 짧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방 안에 선명히 울려 퍼진 그 목소리에 그제야 홀린 듯하던 이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법정이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입을 뗐다.

"......맹주님. 제가 감히 타문의 대사(大事)에 왈가왈부할 처니는 아니나, 이건 너무도 전격적인 듯 합니다."

법정이 말을 내뱉고 저도 모르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로 다급하게 말을 하다 보니, 현종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을 해 버리고 만 것이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지만, 현종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께서 보시기에는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이 일은 화산의 장문인 제가 정한 일입니다. 차대의 장문을 정하고 임명하는 일에 대한 권한은 오직 당대 화산의 장문인 저에게 있습니다."

법정의 입술이 꽉 맞물렸다.

현종의 말이 맞다. 한 문파의 다음 장문을 정하는 일은 오직 당대 장문인의 의지에 달린 일. 장문을 돕는 장로들이나, 태상장문이라 해도 이 일에 관해서는 의견을 낼 수 있을 뿐, 장문인의 선택을 강제할 수 없다.

그런 마당에 타문의 방장이 하는 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법정은 여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의 입장상 도저히 그냥 물러나선 안 되는 것이다.

"하오나...... 장문을 임명하는 일은 당연히 격식을 갖추어야 할 문파의 가장 큰 중대사가 아닙니까."

"그러합니다."

현종이 다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장문이 아니라, 장문대리가 될 것입니다. 장문대리는 장문인이 정한 일에 관해 장문인의 권한을 대행하는 임시직이니 굳이 격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 말에는 법정조차 할 말이 궁색해졌다. 애초부터 억지에 가까운 반발이었지만, 이제는 그 억지마저 부릴 구석이 남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장문대리는 들어라."

"예!"

현종이 제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백천에게 내밀었다.

"화산 장문의 이름으로 화산 장문대리 백천에게 소림과의 협의에 관한 전권을 부여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천이 당당한 자세로 검을 받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허리춤의 매화검을 풀어 낸 후 그 자리에 현종이 준 자하신검을 동여맸다.

그 자하신검을 보는 법정의 속을 말로 해 무엇 하겠는가?

저 자하신검은 다름 아닌 법정이 찾아 화산에 돌려준 것이다. 그런데 그 검이 지금 법정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허리춤에 자하신검을 찬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반대로 돌려 법정을 마주 보고 앉았다. 바닥에 정좌한 그의 뒤로 상석에 앉은 현종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 순간 법정은 제멋대로 뒤틀리려는 안면 근육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심력을 써야 했다.

"......아미타불."

본능적으로 불호를 왼 법정이 눈을 감아버렸다.

'진정하자.'

생각해 보면 당황할 일은 아니다 워낙 황당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기에 장경각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해졌을 뿐, 따지고 보면 그저 대화할 상대가 바뀐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저 백천이라는 이가 보여 준 모습이 법정조차 다시 볼 정도로 대단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대제자인 백천에 대한 평가였다.

그 평가의 기준이 이대제자가 아닌 장문인이라면, 그에게 굳이 후한 점수를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쨋거나 노회할 만큼 노회한 현종보다는 이제 갓 감투를 쓴 얼기 장문인이 상대하기는 훨씬 현할 수도 있지 않은가?

법정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백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백천이 법정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먼저, 방장께 저지른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워낙 시급한 사항이라 의도치 않게 방장께서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천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법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차피 이제 와 불평해 봐야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너그러움이라도 보여 주는 쪽이 낫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백천은 화산의 장문인으로부터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은 장문대리로서 화산의 입장을 밝히려 합니다."

"으음, 백천  도장. 아니...... 장문대리."

"예."

"말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소. 소승에게 현종진인을 화산의 장문이 아닌 천우맹의 맹주로 대해 달라한 건 바로 그대들이 아니시오?"

법정이 슬쩍 다른 이들을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소승은 이곳에 천우맹의 맹주와 협의를 하기 위해 온 것이거늘, 어찌 화산의 장문이 천우맹의 맹주를 대리하여 소승과 협의를 한단 말입니까? 그건 사리에 맞지 않소이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이미 법정이 그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해를 좀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 하셨소?"

"예, 방장. 저는 이 협의를 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장께서 화산에 제안하신 것에 대한 화산의 대답을 들려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이 자리는 물론 천우맹과 구파일방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화산이 그 뜻을 밝힐 수 없는 곳이라 하진 않으시겠지요? 방장께서 각 문파마다 다른 제안을 하셨으니, 저희 역시 그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려."

정리하자면 현종은 화산의 장문인 자리를 백천에게 대리시켰으나, 천우맹의 맹주 자리는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천은 천우맹주 대리가 아니라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법정이 화산에 건넨 제안에 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방장께서 해 주신 제안에는 화산의 모든 문도들이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하면......"

"하지만, 방장."

백천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한없이 부드러워 보여야 할 미소가 이상하게도 굳은 표정보다도 몇 배는 단호해 보였다.

"화산은 방장께서 하신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화산은 구파일방으로 복귀하지 않습니다."

법정의 눈이 절로 부릅뜨였다.

차근차근 대화를 통해서 좋은 방향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이 애송이 놈이 대뜸 시작부터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말이다.

"자, 잠시만! 장문대리!"

"그리고!"

백천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천우맹에 대한 권리는 천우맹에 속한 모든 문파가 나눠 가지는 바. 설령 지금 천우맹에 속한 문파들이 구파일방과 그 뜻을 함께한다 해도."

백천이 이곳에 앉은 모든 이들을 제 눈에 담았다. 모두의 선명한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기대, 그 태도가 전해 주는 부담감을 안다. 백천은 그 어느 하나도 피하지 않고 오롯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모든 심력을 담아 말했다.

"화산만은 천우맹에 남을 것입니다."

그 목소리는 새하얀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그려낸 선처럼 선명하고 뚜렷하게 퍼져 나갔다.

"하여 화산 장문인의 이름으로 선언하건데, 천우맹의 해체는 없습니다. 모든 문파가 천우맹을 떠나 화산만이 남는다 해도, 화산은 천무맹의 이름을 지켜 나갈 것입니다."

법정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 애송이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법정이 받은 충격과는 달리, 그런 법정을 상대하는 백천은 태연자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 물론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해?"

오해라니, 또 무슨 오해?

태산과도 같이 버티며 엄정하게 말하던 백천이 이번엔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물론 방장께서 그리 생각하실 리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산이 소림이나 구파일방을 적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곳을 향해 가되 조금 다른 길을 걷는 것뿐이지요."

헌앙한 그의 얼굴에 훈풍 같은 미소가 걸렸다.

다른 상황이라면 어찌 좋은 의미가 아닐 수 있으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이들, 심지어는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그 미소를 보며 속이 뒤틀렸다.

"저희가 구파일방의 휘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들, 설마하니 천하의 소림이 화산 하나 포용하지 못하겠습니까?"

"......"

"강호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중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막 장문대리에 오른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법정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순간, 백천이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장."

"어......"

법정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놓고 법정을 먹여 버리는 백천을 지켜본 당군악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화산파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저 모양이냐? 왜......

그들이 알던 화산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모두가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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