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3화.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2)
홀린 듯한, 혹은 감탄한 듯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는 건 화산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법정과 종리형마저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모두가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백천이라는 이를. 현종과 청명의 위명에 가려 있던 그의 진면목을.
“고민이 형태를 갖춘 것은 그때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고민은 이미 그 전에 시작됐습니다.”
“……그 전부터?”
“예. 시작은 남궁 소가주님이었습니다.”
“예? 저 말씀이십니까?”
숨도 쉬지 못하고 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화들짝 놀라 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백천은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남궁 소가주님은 제가 그리 대단케 여기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
뜬금없이 한 대 얻어맞은 격이 된 남궁도위의 얼굴에 순간 발끈하는 기색이 스쳤다. 백천에게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말을 저리 해 버리다니.
“하지만 지금의 남궁 소가주님은 감히 제가 따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람입니다.”
“배, 백천 도장.”
“남궁 소가주님은 반파된 남궁세가를 이끌어 재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훌륭히 말입니다.”
그 말에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남궁도위가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 여기 있겠는가?
“그 모습에 때로는 감탄했고, 때로는 질투도 했습니다. 격차를 좁혀서, 이제는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겼던 이가 순식간에 다시 거리를 벌리며 멀어져 갔으니까요.”
현종이 이해하겠다는 듯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야 그저 기특했으나, 같은 연배인 백천은 따듯한 시선으로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경쟁심을 느낄 테니까.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차이가 벌어졌을까?”
백천이 남궁도위에게서 시선을 떼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를 앞서 나가는 이들이 남궁 소가주님만이 아니라는 것을.”
백천의 시선이 이번엔 설소백에서 멈춰 선다.
“설 궁주님께서는 오히려 소가주님보다 더 어린데도 빙궁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설 궁주님께서 훌륭한 궁주가 될 것이라 믿고, 설 궁주님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밤잠을 줄여 가며 말입니다.”
그 말에 설소백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백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구석에 반쯤 숨어 있던 임소병에게 가 닿았다.
“녹림왕 역시 저와 연배가 그리 차이 나지 않음에도 녹림을 훌륭히 이끌고 있습니다. 신주오패 중 하나의 수장이라는 그 막중한 자리를, 저 장일소보다도 더 어린 녹림왕께서 다른 이들이 얕잡아 보지 않도록 제 신분과 나이를 숨겨 가며 이끌었습니다.
”임소병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펴지도 않은 부채로 제 얼굴을 부쳐 댔다.
그 모두를 바라본 백천이 고개를 돌려 현종에게 물었다.
“장문인.”
“…….”
“저분들과 제가 무엇이 다릅니까? 저는 무엇이 부족하기에 저분들처럼 될 수 없습니까. 저와 다르지 않은, 저보다 더 어린 분들조차 한 문파를 훌륭히 이끌고 있는데, 저는 어째서 아직도 장문인께 보호를 받고 비겁해지는 대가를 장문인께 미뤄야 합니까?”
“……그건…….”
현종조차도 이 말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백천은 대답을 구한 게 아닌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고민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백천이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제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남궁 소가주님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남궁 가주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소가주님께서도 절대 지금 같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천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말이니까요.”
백천이 가볍게 주억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가장 큰 차이는 하나였습니다. 무엇을 짊어졌는가?”
그의 시선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마치 당군악이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냐고 동의를 구하듯 말이다. 당군악 역시 그 시선을 받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가주가 될 이였기에 훌륭한 게 아니라, 가주가 되었기에 훌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리에는 그 자리에 합당한 책임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백천이 화산의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 역시 들어야 한다는 듯.
“책임을 짊어졌기에, 그 무게를 스스로 감당해 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
“짊어지지 않은 이가 짊어진 이들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다 논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같은 위치에 서고 싶다면 스스로 짊어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저는 이제 그 사실을 알기에, 제가 져야 할 짐을 피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니, 스스로 그 짐을 지려 합니다. 제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통해 더 성장하기 위해서, 더 당당해지기 위해서.”
“백천아…….”
“그러니 부디 장문인.”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읍을 했다. 더없이 공손했으나, 결코 비굴하진 않았다.
“허락해 주십시오.”
현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찌 이리 당당하고, 어찌 이리 대견할까?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때 나지막이 불호 외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아미타불.”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던 법정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분위기를 끊어 내려 했다.
“백천 시주께서는 너무 급한 듯합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백천아.”“…….”
하지만 그 말은 다름 아닌 현종의 목소리에 끊겨 버렸다.
“네 뜻은 알고 있으나, 그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걸 네가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느냐?”
무거운 뜻이 담긴 질문이었으나, 백천의 대답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홀로는 어렵습니다.”
“……홀로는?”
“예. 하지만, 장문인. 장문인께서도 홀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신 것은 아닙니다. 장문인의 곁에는 장로님들이 계셨습니다. 현상 장로님께서는 화산의 무학을 이끌어 주셨고, 현영 장로님께서는 화산의 재정을 감당해 내셨습니다.”
두 장로의 얼굴에 울컥 솟구친 감정이 어렸다.
“업무만이 아닙니다. 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올 때, 혼자 선 이가 그 고난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장문인 역시 저분들이 계셨기에 버텨 내셨을 겁니다. 그리고 운암 사숙과 운검 사숙을 비롯한 운자 배 사숙들도 최선을 다해 장문인을 지켜 내었습니다.”
“그래. 나 홀로 한 일이 아니었지. 결단코 아니었단다.”
“예, 장문인. 그러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홀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저를 받쳐 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묵하지만 누구보다 듬직하고 믿을 수 있는 사매가 있고, 제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옳은 길을 말해 줄 사질이 있습니다.”
유이설의 입매에 꾹 힘이 들어갔고, 윤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때로 사람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협의를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이가 있고, 배분은 낮아도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중재해 줄 사람이 있습니다.”
조걸이 울컥한 듯 시선을 위로 돌려 버리고, 당소소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저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누구보다 저를 채찍질하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그 눈빛을 평생 감당해 낼 것입니다.”
화산의 모두가 백천을 바라본다.
입고 있는 새하얀 백의처럼 빛을 내뿜는 이를.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습니까? 장문인. 제자, 누구보다 잘 해낼 것입니다. 모두가 저를 그리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백천의 시선이 마침내 청명에게로 향했다.
“저는 과거에 대해 원망이 없고, 후대에 대한 부채가 없는 이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제가 지금 장문인이 되어야 합니다. 다가올 전란의 시대에 화산이라는 검을 올바르게 휘두를 수 있는 이는 오직 저뿐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청명의 눈은 깊은 바다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하지만 백천은 그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참 동안 청명을 보던 백천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현종을 마주했다.
“그러니 장문인.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제자를 믿으려 하지 마십시오. 제자가 아닌 화산을 믿어 주십시오. 선조들이 전하려 한 뜻이 제게도 이어졌음을 믿어 주십시오. 화산이 제자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입니다.”
현종이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백천을 만날 때보다 더 이전의 일이었다.
‘사부님.’
누구도 맡지 않으려 한 장문의 직을, 그의 스승은 아직 준비가 덜 된 현종에게 넘겼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현종을 염려했다.
현종은 그 모진 세월을 감당해 냈다. 시린 한겨울을 온전히 말이다. 현상과 현영이 곁을 지켜 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 차가운 한기를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더 많은 시간을 주고 싶었다. 장문의 자리가 주는 책임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있는 시간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 백천은 그에게 말하고 있다.
그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 시간이, 그 자리가, 그 무게가 지금의 현종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 말이 더없이 기꺼우면서도 또한…….
현종의 침묵이 길어지자, 윤종이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뭐가 불편해도 단단히 불편해 보이는 법정과, 금방이라도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칠 기세인 종리형.
심지어는 화산에 우호적인 천우맹의 각 문주들조차도 지금의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이러다 일이 나도 크게 나겠다고 생각한 윤종이 슬그머니 입을 뗐다.
“차라리…… 오늘은 일단 자리를 파하시고, 추후에 다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자들은 듣거라.”
현종이 눈을 뜨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 경도된 화산의 제자들이 즉시 자세와 태도를 바로 했다.
“예, 장문인!”
현종이 심유하고도 추상(秋霜)과 같은 눈빛으로 백천을 응시했다. 백천은 어깨를 당당히 펴고 그런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자리에 걸맞지 않은 발언으로 화산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죄는 더없이 크다. 또한 감히 장문인에게 이양을 요구한 죄, 기사멸조에 해당한다!”
“자, 장문인!”
“아니…….”
기사멸조라는 말에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하여 현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말문 막히도록 싸늘해서 차마 이렇다 할 반발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지만, 오직 백천만은 흔들림 없이 현종을 응시했다.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온전히 그 뜻에 따르겠다는 듯 순순했다.
“하여, 나 현종은 화산의 장문인의 권한으로 죄를 범한 제자 백천에게 반년간 무공을 금제하고 매화동에 가두는 벌을 내린다.”
화산의 제자들이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백천은 반대로 눈을 감았다. 하고자 한 모든 것을 했으니 후회는 없다. 그저…….
“문파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법. 그 법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시와 때, 그리고 격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치죄는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없다.”
언제나 의견을 양보하던 현종이다. 그런 그가 서릿발 날리는 목소리로 명하는 일이기에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였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일 뿐.
모두의 가슴에 시린 한기가 파고들었다.
“장로 현상.”
“예, 장문인.”
“화산의 무각주로서 죄인의 죄에 대해 처벌을 집행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으득.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그 시린 파국이 사람들의 가슴을 쩍 갈라 낼 때, 모두의 귓가로 더욱더 칼날 같은 현종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파고들었다.
“단!”
눈을 감은 백천을 똑바로 응시하며, 현종은 그가 가진 모든 위엄을 담아 선언했다.
“화산 장문인의 권한으로,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을 장문인의 권한을 대리할 장문대리로 임명하는 바. 이 모든 형벌의 집행은 백천이 장문대리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유예한다! 이는 화산 장문인으로서의 명이니, 어떤 이견도 받지 않을 것이다.”
백천이 눈을 번쩍 떴다.
살짝 흐릿해졌던 그의 세상이 선명해지며, 시야 가득 현종의 모습이 들어왔다.
현종의 입가에는 언제부터인지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백천이 처음 화산에 오르던 날 현종에게서 보았던, 그 봄날의 매화처럼 따뜻한 미소가.
“백천아.”
“……예, 장문인.”
현종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젠 네가 화산의 장문인이다.”
“…….”
“부디 화산을 올바로 이끌어 주거라.”
백천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조금 전처럼 당당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두고 손가락질하거나 비웃지 못했다.
“명, 명을…….”
물기 섞인 백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화산에 새로운 장문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