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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182화 (1,183/1,567)

1182화.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1)

백천의 말은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았다.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일단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경악. 그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느끼는 당혹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화산의 문도들이 받은 충격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화산이라는 두 글자를 자신의 숙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한껏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백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백천과 가장 격렬하게 대립했던 조걸조차도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

그 순간 청명의 입에서 한탄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미친놈이…….”

표현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그 말만큼 지금 화산 문도들의 심정을 잘 보여 줄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만큼, 아니.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은 현종이 망연히 백천을 보다 물었다.

“자, 장문인이라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네게?”

“예.”

혼란과 불신이 휘몰아치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백천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장문대리로 임명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장문인이 되는 것은 문파의 법도에 따라 그 절차와 격식을 갖추어야 할 일. 하지만 장문인의 권한을 위임받는 장문대리에 대한 임명은 현 장문인의 명이 있다면 언제든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그렇기야 하다마는…….”

아니, 지금 그런 것을 따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장문인이나 장문대리나 말만 다를 뿐 아닌가?

지금 이 말인즉, 백천이 앞으로 현종 대신 화산의 대소사를 직접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엄격한 문규를 따르는 화산에서 제자가 장문인에게 직접 요청할 만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백천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겠지만, 이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너는 화산의 대제자이긴 하지만, 장문제자는 아니잖느냐. 네 위에는 운암이가 있다. 설령 요청한다 해도 운암이…….”

“그 부분은 운암 사숙과 이미 말을 나누었습니다.”

“……운암이와?”

“예.”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부연했다.

“제자, 오늘 아침에 이미 운암 사숙께 제 뜻을 전달했습니다. 운암 사숙께서는 그리하라 허하셨습니다.”

“아니, 그놈이…….”

현종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벙긋거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제멋대로 그런 결정을 한 걸 두고 탓하기에는 이 자리에 운암이 없는 것이 너무 걸렸다. 운암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 곧 천우맹과 화산의 주요한 결정에 그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방증이 아니던가?

‘어쩐지 들어오라 해도 극구 고사하더라니.’

운암이 자리를 지키며 백천의 편을 들어주었다면 모양새는 조금 좋아졌겠지만, 백천의 위에 여럿이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리에서 빠짐으로써 백천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겠지. 운암은 그런 사람이니까.

현종이 황망함과 당혹스러움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적당히 결정하고 꺼내는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자,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고 드리는 요청입니다. 젊은 치기와 성급한 혈기로 내린 결론이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하지만, 백천아. 네가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의 동의 역시 구해야 하지 않았느냐? 저 아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 같지 않으냐.”

“그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백천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배분 낮은 제자들의 중지(衆志)를 모아 장문의 자리를 요청하는 것은 그 모양새만 다를 뿐, 결국에는 아래에서 뜻을 모아 장문인을 몰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감히 화산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

“그러니 이건 온전히 저 혼자 감당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말에 현종의 당혹감이 얼마간 잦아들었다.

제자 된 도리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드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백천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의지견정한 태도가 현종마저 침착을 되찾게 했다.

“그래. 그렇구나.”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게 무슨…….”

하지만 현영의 반응은 현종과 다소 달랐다.

“아무리 문파의 법도가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타문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현영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장문인, 당장 저 방자한 녀석에게 죄를 물어야 합니다.”

“기다려라.”

“장문인!”

“기다리라 했다!”

현종에게서 일순 준엄한 기세가 뻗어 나오자 현영이 움찔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가 잠잠해지자 현종이 백천을 마주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장문인 같은 태도였다.

“합당하지 않은 요청이라면 당연히 그 죄에 걸맞은 벌이 내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 봐야겠지. 백천아.”

“예, 장문인.”

“네가 내게 말했듯, 모든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장문 자리를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더냐?”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더냐?”

“말씀드렸다시피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종이 대답 없이 기다린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장문인께서는 틀리지 않으셨습니다. 더없이 옳으십니다. 장문인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는 문도들을 지키는 것. 후대에 화산의 뜻을 이어 나가는 것. 그 의무를 지키고자 하심을 어찌 틀렸다 하겠습니까?”

“그럼?”

“하지만 이어받을 저희의 입장은 그와 또 다릅니다.”

“…….”

“장문인께서는 이어 주셔야 하지만, 저희에게는 지켜야 할 후대가 없으니 미래보다 현재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해야 할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백천이 담담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천하에 증명하는 것입니다.”

현종의 눈이 부릅뜨였다.

“가까이는 선대로부터, 멀리는 백 년 전에 천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로부터, 그리고 더 멀리는 처음 화산 연화봉에 화산이라는 도관을 세운 조사로부터!”

“…….”

“잇고 또 이어온 뜻이 여전히 화산에 존재하고 있음을, 그 뜻에 수많은 이들의 의지가 더해져서 과거보다 더욱 나아갔음을 이 손으로, 이 검으로, 이 목숨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꽉 쥔 현종의 주먹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도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현종조차도 몰랐다. 모두가 그저 백천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키겠다는 결정을 틀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약한 이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하는 것 역시 틀렸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저 말을 틀렸다 한다면 화산의 모든 것은 그 의미가 바래게 된다. 그렇기에 틀릴 수 없는 말이다.

“하여 저는 장문인의 선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 된 도리로, 화산의 의지를 이어 가야 하는 이로서 저희의 협의 역시 관철해야 합니다. 서로 옳지만 다른 그 두 뜻을 하나로 모두 만족시킬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선언과도 같은 백천의 말이 이어졌다.

“후대에게 이어 주는 것만을 사명으로 살아오신 선대에게서 그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이 이어받는 것.”

“…….”

“그게 제가 화산의 장문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장로들조차 더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운암 사숙께는 이 말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운암 사숙께서 장문인의 자리를 이어받으시길 권했습니다. 하지만 운암 사숙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 뜻이 옳다 여기지만, 자신은 증명할 이가 아니라 지켜 낼 사람이기에 받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운암이가…….”

“사숙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증명해야 하는 이가 이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화산에서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이는 다름 아닌 저, 백천입니다.”

현종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다. 그 작은 소년이 어느새 이토록 성장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시큰해졌기 때문이다.

‘언제 이렇게…….’

성장했다는 거야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자라주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언제나 아이의 성장은 윗사람의 예상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제자를 키우는 이가 꿈에도 바라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을 단번에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의 감정이 밀려든다.

하지만…….

“백천아. 네 뜻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너는…….”

“부족하다 하시겠습니까?”

백천이 묻고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장문인. 언제가 되면 부족하지 않습니까?”

“…….”

“십 년이 지나면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 십 년이 지나면 제가 완전해지겠습니까?”

“그건…….”

“선대가 보기에 후대가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한 때가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

“부족하다 생각되시면 이끌어 주십시오. 부족하다 생각되시면 조언하고 채찍질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건 제가 장문대리의 자리에 오르고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현종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얼굴로 백천을 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입술을 달싹이던 현종이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토해 내고는 물었다.

“언제부터였더냐?”

백천이 채 입을 열기 전에, 다시 재차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느냐?”

백천은 살짝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답했다.

“시작은 조걸 사질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걸이가?”

“예. 모든 게 잘못되어 간다는 걸이의 말에, 저는 말했습니다. 너는 어찌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하는지를.”

“그래.”

“답을 찾지 못한 제자들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이는 장문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

“그건 제게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저는 장문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에 따르려 합니다. 하지만 저의 입장은, 저의 생각은, 저의 의지는 그와 다릅니다. 하지만 저 역시 책임지지 않는 이이기에 감히 장문인의 선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민하고 고뇌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 끝에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백천이 주먹을 움켜쥔 채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책임을 짊어지면 된다. 책임지지 않는 이에게 선택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면 된다.”

그 말에 백천의 등을 지키던 제자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숙!’

특히나 조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백천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전해지지 않았다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자라다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곳의 누구보다 더 진지하게 조걸의 말을 들은 이는 다름 아닌 백천이었다.

“그렇기에 저는 이으려 합니다. 선대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제 손으로, 제 사형제와 제 사질들의 검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백천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다음 할 말에 진의를 모두 담겠다는 듯.

마침내 그 깊은 호흡은 의지라는 이름으로 화해 흘러나왔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짐의 무게를, 제자들의 목숨에 어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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